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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신년음악회 역사와 빌리 보스코프스키(Willi Boskovsky)

想像 2024. 3. 20.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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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신년음악회 역사와 빌리 보스코프스키(Willi Boskovsky) 


 

음악회 청중과 TV 시청자들의 수효로 볼 때 , 신년 음악회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 의해 기획된 가장 대중적인 음악회라고 할 수 있다. 1984년 오스트리아 라디오 방송사의 집계에 따르면 약 4억의 사람들이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통해 신년 음악회를 시청한다고 한다. 게다가 1990년에는 위성중계덕분에 중국인들에게도 그 프로그램이 송신되어 시청자의 수효가 무려 10억이라는 천문학적인 수치를 초과하게 되었다니, 신년 음악회를 시청하는 사람들은 어림잡아 8억에서 12억 정도 된다고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는 전세계의 수 많은 청취자들을 끌어 들이는 정기 연주회가 되었다. 오스트리아로서는 신년 음악회가 국가의 문화적 위상을 정립하는 중요한 측면을 갖는 것이어서 신문지상에 나는 독자들의 편지를 해마다 신년 음악회가 불러 일으키는 논쟁의 결과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 이런 경우에 필하모닉 품격과 자질 요건 혹은 필하모닉 전통에 의한 지시사항 등은 필하모닉 콘서트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열띠게 논쟁을 벌일 수 있는 것들이다.

 

신년 음악회가 기획된 배경은 빈 필하모닉과 요한 슈트라우스 사이의 유동적인 연관성으로 특장 지워진다, 처음에는 “왈츠의 왕”과 빈의 가장 이름높은 오케스트라를 엄밀하게 “경음악”과 “순수음악”이라는 장벽에 의해 분리시켰다. 그리하여 빈 음악을 대표하는 두 거봉이 함께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1873년 11월 4일 요한 슈트라우스는 처음으로 궁정오페라 관현악단의 카펠마이스터인 오토 데소프와 감독인 요한 헤르벡 그리고 콘서트마스터인 요제프 헬레스베르거 등과 더불어 지휘를 했다. 또한 그는 궁정무도 악장으로 요제프 라너의 [로맨틱한 사람들]과 자신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지휘하기도 했다.

 

빈의 선구적인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릭은 이런 모양새의 이상한 특성을 감지해 내고서 다음과 같이 썼다. “라너나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작품들을 빈에서 한번 더 접하기 전에 중국에서 연주를 열어야 한다는 것은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연주회가 있은 지 한 20년쯤 후에 또 한번의 강렬한 접합점이 마련되었다. 1892년 신년에 요한 슈트라우스 I세의 불운의 오페라 <기사 파즈만>이 궁정오페라단에 의해 상연되었다. 1894년에도 역시 동일한 궁정오페라단 감독 빌헬름 얀이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박쥐>를 무대에 올렸다. 마침내 1899년 6월 3일에 그는 눈을 감았다.

 

1921년에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빈 시립공원 요한 슈트라우스의 기념비 제막식에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연주했다. 이런 경의의 표현은 빈 필하모닉과 요한 슈트라우스 사이에 고조되어가는 연관성의 첫 징표가 되었다. 1925년 그의 탄생 백주년을 맞아 빈 필화모닉은 왈츠왕 슈트라우스를 기념하여 획기적인 연주회를 마련하였다. 국립오페라단 감독인 프란츠 샬크와 궁정악장 칼 루체의 지휘하에 오케스트라가 쇤브룬궁정 정원에서 6월 13일에 예비 축하연주를 가졌고, 그 후 10월 25일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와 루체가 탄생일을 경축하는 연주회를 지휘했다. 마지막으로 12월 5일에는 경축년의 대미를 장식하는 음악회가 프란츠 샬크의 지휘로 열렸다.

 

경축 음악제가 성황리에 마쳐진 후 슈트라우스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뤄졌다. 그 결과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레퍼토리로 그의 작품들이 확고히 자리잡게 되었다. 1926년 펠릭스 바인가르트너는 또 다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슈트라우스 음악회를 가졌고, 1928년에는 에리히 클라이버 지휘로 빈 필하모닉이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연주했다.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일은 1929년 8월 11일에 일어났다.

 

당시 빈 국립 오페라단의 감독이었던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짤츠부르크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연주회에 요한 슈트라우스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지휘했다. 그 프로그램의 작품들(<집시 남작>서곡, <박쥐> 서곡, 유명한 폴카와 왈츠 곡들 그리고 앵콜 곡으로 <무궁동>과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등이었다.)은 어떤 측면에서 신년 음악회의 기획을 예시하는 전조였다. 1930년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자신을 요한 슈트라우스의 지휘자로 인식하게끔 부각시켰다.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짤츠부르크에서 슈트라우스 음악회를 주도했으며 1933년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순회 연주곡으로 택했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는 슈트라우스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교황 앞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빈 필하모닉의 슈트라우스 연주회가 짤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하나의 관습으로 뿌리내려 가던 1933년에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동생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작품들도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후 1935년 브루노 발터는 짤츠부르크에서 “빈 음악”이라는 이름의 연주회를 지휘했는데 1939년에는 다시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요한 슈트라유스의 프로그램을 제시했던 것이다.
1939년 빈 필하모닉의 연보는 신년 음악회의 조성 쪽으로 결정적인 단계를 기록하고 있다. 12월 31일 아침 빈의 무지크페라인 음악홀에서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요한 슈트라우스 I세 특별 연주회’를 지휘했다. 그 다음 두번째 연주회는 신년의 전야에 이뤄지지 않고 신년 벽두에 마련되었다.

 

1941년 1월 1일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요한과 요제프 슈트라우스 작품들로 빈 필하모닉의 제1회 신년 음악회를 지휘했다. ‘슈트라우스 프로모션의 선구자’로서 클레멘스 크라우스는 신년 음악회의 창설을 위한 실질적 음악적 신임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그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슈트라우스 레퍼토리를 설정하고 체계적으로 그것을 확대시켜 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는 그 후 몇 년간(1942~1944) 신년 음악회의 감독직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치닫고 있던 1945년에는 신년 음악회를 열 수 없었다. 1946년은 요제프 크립스에 의해 그 음악회가 주도 되었으나, 1947년 부터는 다시 클레멘스 크라우스가 매해마다 신년 음악회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가 신년음악회를 이끌어 가던 기간 중에는 신년의 주요 이벤트에 대한 시도 차원에서 제야음악회를 재도입하였다. 이런 겹치기 공연에도 불구하고 신년 음악회 및 제야음악회의 티켓 구입은 빈에 있는 음악 애호가들이 전쟁처럼 치루어야 하는 가장 힘든 모험이었다.

 

1954년 1월 1일 오케스트라와 청중들은 마지막 영감에 찬 슈트라우스 지휘자로서의 클레멘스 크라우스를 지켜 보았다. 1954년 그의 죽음은 빈 필하모닉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의 후임으로 신년 음악회를 누가 계속 이끌어 가야하고 또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는 문제였다.

 

적절한 인물 모색작업이 그들 내부 차원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중에 1949년 이래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수석악장이던 빌리 보스코프스키가 신년 음악회 감독직을 인수 받았다. 빈 필하모닉의 선택은 청중들과 비평가들에게도 긍정적으로 수긍되었다. 그들은 “보스코프스키는 악장과 연주자(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자질을 겸비한 인물이면서 동시에 지휘자로서도 탁월한 인물이다. 제야와 신년에 그는 빈에서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수석의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라고 빌리 보스코프스키를 찬양했다. 빈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의 학생 연주자였던 보스코프스키가 이제는 완전히 음악의 제 1인자가 된 것이다. 그는 슈트라우스 형제들 시절에 악장들이 견지했던 구양식을 재현해 냈다. 보스코프스키는 전통과 원숙의 역동적인 합일을 재현해 냈던 것이다.

 

 

1959년 이후 신년 음악회는 텔레비전을 통해 송신되어 전통적인 빈 이벤트는 서유럽 TV 방송망에 극적인 경험을 제공해 주었다. 이런 변화는 음악회의 기획에도 영향을 미쳤고 국립 오페라 발레단에 의해 미리 방영됐던 발레 장면들도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보충적으로 삽입되었다.  그런데 해마다 보스코프스키의 빈 필하모닉은 수백만의 시청자들에게 매우 특별하면서도 한 치의 실수도 없는, 그래서 ‘빈식(Wein Style)’이라고 묘사되는 융통성 있고 정확한 연주를 들려 주었다.

 

“빈식”이라는 용어는 브루노 발터도 사용했는데 신년 음악회의 그라모폰 제작 녹음을 듣고 감동받은 그는 1961년 보스코프스키에게 편지를 썼다. “내 딸이 자네가 지휘한 왈츠와 빈 춤곡들의 음반을 갖다 주었다네. 진정한 한 음악가와 그의 영감을 받은 동료들이 분출해 내는 절대 음악적이면서 동시에 빈식의 특유한 연주를 내가 얼마나 가슴속 깊이 감동적으로 들었는지를 자네에게 말해야 겠네. 최고조의 리듬적 매력을 유지하면서 뉘앙스나 부적절한 효과들은 애써 고집하지 않은 채 그 모든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다네. 여기서 나는 훌륭한 작품정신으로 가득 차고 그것에 긴밀히 연결된 일류 음악가가 인솔하는 비루투오조 오케스트라를 이야기 하는 것이네…”

 

빌리 보스코프스키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 음악회를 정확히 25회 지휘했다. 1979년을 마지막으로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신년 음악회의 감독직을 사임했던 것이다.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국제 음악계의 지휘 거장들 사이에서 로린 마젤을 선택했다. 그는 근 20년간 연주회와 오페라 연출 녹음제작 등으로 빈 필과 함께 활동해 오다가 마침내 신년 음악회의 감독직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이로써 지휘자 겸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보스코프스키의 뒤를 바이올리니스트 겸 지휘자였던 마젤이 승계하게 되었다. 마젤은 1980년부터 86년 까지 일곱차례 신년 음악회를 구상했다. 그 일곱번의 연주는 실황음반으로(후에는 콤팩트 디스크로) 제작되어 보존되고 있다.

 

1986-87년 이후 빈 필하모닉은 신년 음악회의 지휘자를 다양하게 초빙하고자 원해왔다. 그리하여 1987년에는 헤르베르트 폰 가라얀이 지휘를 맡았고 그 뒤를 이어 클라우디오 아바도(1988), 카를로스 클라이버(1989), 주빈 메타(1990), 그리고 다시 클라우디오 아바도(1991)가 신년 음악회의 지휘자로 뽑혔다. 1992년 신년 음악회는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두번째로 지휘를 맡았고 1993년에는 처음으로 리카르도 무티가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신년 인사를 올렸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빈과 빈 필하모닉, 그리고 왈츠는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3각관계를 형성하면서 지금까지 그 독특한 영역을 유지해 왔다. 빈 왈츠가 빈 필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은 생명력과 토착적인 리듬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로 빈 출신의 지휘자 빌리 보스코프스키(1909~1991)를 꼽지 않을 수 없다.

 

왈츠는 원래 도나우 강변을 중심으로 오래전부터 형성되고 전래되어 온 렌틀러(Landler)라는 3박자 춤곡을 개량한 데 지나지 않는다. 이 렌틀러 춤곡은 빈 사람들의 애환과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랜 세월을 함께 해왔기 때문에 빈 사람, 빈 토박이가 아니고서는 그 가락의 참맛을 표현해 내기가 어렵다. 마치 재즈 음악을 빈 사람들이 제대로 음미하기가 어려운 것 처럼, 빈 왈츠는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호흡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절실하게 설명해 준 음악가가 곧 빌리 보스코프스키다. 그는 빈에서 태어나 빈에서 죽은 완벽한 빈 기질의 전형을 보여준 음악가다. 당대의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또한 지휘자로서, 그가 체질적으로 익혀온 옛 렌틀러 가락을 자연스럽게 빈 필을 통해 발산시켜 왔다.

 

렌틀러를 왈츠로 개작하여 민속음악 차원이 아닌 연주용 또는 감상용 음악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사람은 물론 요한 슈트라우스 일가다. 다만 그들이 19세기를 거치면서 왈츠의 형태를 완벽한 모습으로 정착시켰다면, 이것을 20세기로 연결시켜 가장 친근한 세계인의 음악으로 확장시킨 공로자로 보스코프스키를 꼽아야 한다. 바로 여기에 보스코프스키의 음악적 생명이 있다.

 

그는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전형적인 빈의 기질로 빈 왈츠를 지휘한 금세기 최고의 지휘자였다. 바이올린을 켜면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빈 왈츠를 연주하는 보스코프스키의 모습은 ‘우아함’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날 빈 신년 음악회가 이처럼 사랑받는 세계인의 축제로 자리잡은 것도 보스코프스키의 절대적인 공로에 힘입은 바 크다.

 

1991년 그가 별세했을 때 오스트리아는 최대의 예우로 ‘왈츠의 거장’을 추모하는 장례를 치렀다. 그의 장례식이 거행되던 날, 빈 필하모닉은 그가 생전에 자주 지휘했던 빈 왈츠들을 묶어 영전에 바쳤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비롯한 17곡의 왈츠 곡들이 이 레코드에 실려 있는데, 그 모두가 보스코프스키의 생애를 추모하는 최고의 레퍼터리들이다. 빈 필하모닉의 부드럽고 따뜻한 연주와 함께 빌리 보스코프스키의 음악적 성과를 가늠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Vienna Philharmonic New Year's Concert - 1958
Willi Boskovsky

 

Tracklist
A1 Champagne Waltz 
A2 Viennese blood Waltz 
A3 Pizzicato polka 
A4 Love songs Waltz 
A5 Cheerful courage polka 
B1 Explosion polka 
B2 Viennese sweets Waltz 
B3 Persian March 
B4 Woodruff Over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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