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뿔테안경에 긴 생머리, 흰 드레스, 청아한 목소리, 나나 무스꾸리. 그녀가 그동안 발표한 노래는 1,500곡, 발매된 음반만 450장, 판매된 음반은 3억장이 넘는다. 골드앨범(판매량 50만장 이상)과 플래티늄앨범(100만장 이상)도 3백여장 이다.
무스꾸리는 모든 장르의 곡들을 다 소화해 낸 매우 특별한 가수다. 그녀는 그리스 민속 음악에서 볼레로 심지어 클래식도 연주하였다. 일단 그녀에게 악보가 넘겨지면, 그 곡은 새로운 노래들로 변하곤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신이 내린 최고의 아름다움을 지녔다’고 플라시도 도밍고도 극찬을 한 바 있다.
나나 무스꾸리는 1934년 10월 13일 제우스의 탄생지로 알려진 그리스 최대의 섬 크레타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지방 극장의 영상기사였고 어머니도 극장에서 안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다 무스꾸리가 3살때, 가족들은 아덴으로 이사를 했다. 무스꾸리를 권위 있는 아덴 예술학교에 입학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음악에 소질을 보이는 그녀를 위한 부모의 선택이었다.
1950년, 무스꾸리는 아덴 예술학교에 들어가 오페라에 중점을 두고 열심히 공부했다. 학교에 입학한 지 8년쯤 지난 후, 그녀는 친구가 노래하던 재즈클럽에서 노래를 하게 됐다. 엘비스 프레슬리, 프랭크 시나트라, 엘라 핏제랄드등 대중가수들의 노래였다. 그런데 어느날, 담당 교수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녀가 대중음악을 불렀다고 화가난 교수는 무스꾸리가 연말 시험을 보지 못하게 방해한 후, 그녀를 아예 학교에서 추방시키는데 앞장을 섰다.
오페라 가수의 꿈이 사라져 버리자, 그녀는 아덴의 재즈 클럽 '자키'에서 노래하며 지낼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그것은 그녀에게 위기가 아니라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리스의 유명한 작곡가 마노스 하지다키스를 만난 것이다. 하지다키스는 ‘오버 앤 오버’를 작곡한 유능한 인물로 무스꾸리의 좋은 동반자가 되어 주었다.
1958년 음반을 발표했고 이듬해 '그리스 음악제'에서 대상과 차상을 휩쓸었다. 그리고 '지중해 음악제'에서도 대상을 받은 나나 무스꾸리는 유럽으로 진출했다. 1962년에는 퀸시 존스를 만나 뉴욕에서 ‘The girl from Greece sings’ ( Nana Mouskouri in New York) 음반을 만들었다. 이 음반은 전 세계에 그녀의 이름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됐다. 1965년에는, 가수’해리 벨라폰테’와 함께 1년 동안 공연을 가졌다. 당시 벨라폰테는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던 대중음악의 스타였다.
무스꾸리는 1963년 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살았다. 첫 남편과 별거를 하게 되자 1974년 부터는 스위스 제네바로 거처를 옮겼다. 2003년에는 두번째 남편 ‘안드레 샤펠’을 만나 지금까지 스위스에서 살고 있다.
2004년부터 시작한 무스꾸리의 ‘World farewell tour’는 7월 23일, 그리스 ‘아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었다. 그녀의 50년 음악 인생에 ‘아듀’를 고한 것이다. 헤로데스 아티쿠스(Odeon of Horodes Atticus) 음악당에서 열린 고별콘서트는 그리스 총리를 포함한 만여명의 청중들이 운집을 했다.
콘서트를 끝낸 그녀는, 오랜세월동안 자신의 노래를 사랑해준 전세계의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유니세프(UNCEF)친선대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그녀는, 앞으로는 젊은 가수지망생들을 지도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흔히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를 금세기 최고의 여성 엔터테이너로 꼽는다. 그리고 나나 무스쿠리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에 대한 유럽의 대답’으로 통한다. 수많은 히트곡 가운데 ‘Plaisir d’amour’,Verdi(베르디)의 오페라 'Nabucco' 3막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팝으로 편곡 리메이킹한 곡인‘Song for liberty’ ‘Only love’ ‘Over and over’,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원곡을 리메이크한 ‘Why worry’ 등은 국내에서 특히 사랑받는 곡들.
대표곡 감상 |
1. Plaisir d'amour
2. Only Love
3. Over And Over
4. Song For Liberty
5. Why Worry
6. Amazing Gr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