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린츠 근교의 시골 마을 안스펠덴에서 교사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4살 때부터 바이올린과 음악에 대한 기초 지식을 부모에게 배웠고, 11살 때는 아버지의 사촌에게 통주저음과 파이프오르간 연주법을 배웠다. 하지만 아버지가 집안 살림에 보태기 위해 술집에서 댄스음악을 연주하다가 알코올 의존증에 빠지는 바람에 안톤이 13살 때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가세가 급히 기울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계 압박을 줄이기 위해 안톤을 린츠 근교의 장크트 플로리안에 있는 가톨릭 아우구스티노회 수도원의 기숙학교로 보내기로 결정했고, 3년 동안 수도원 성가대원으로 활동하면서 바이올린과 피아노, 오르간 등의 악기 연주법을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뒤 수도원장 미하엘 아르네트의 주선으로 린츠의 교원양성학교에서 본격적인 교사 수업을 받기 시작했고, 린츠의 유력 이론가인 아우구스트 뒤른베르거에게 화성학과 대위법도 배웠다.
1841년에 1차 교원 임용시험에 합격해 보헤미아 근처의 벽촌 빈트하크에서 첫 교사 생활을 시작했지만, 턱없이 적은 급료에다가 성격이 괴팍했던 교장이 학교 수업 외에 텃밭의 농사일이나 교회 관리 등 과외 업무까지 떠맡긴 탓에 대단히 여유없는 일과를 보냈다. 결국 교장과 다투는 바람에 교구 학교들을 장학사 자격으로 시찰하고 있던 수도원장 아르네트로부터 징계성 전근 조치를 받았는데, 말이 징계였지 실제로는 더 좋은 조건과 높은 급료를 받을 수 있는 혜택을 주기 위한 조치였다.
2번째 부임지인 크론슈토르프에서는 대체로 널럴한 조건으로 교직을 맡았고, 여가 시간에 계속 음악 수업을 받거나 친구들과 조직한 합창단에서 지휘를 맡는 등의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1845년에는 2차 교원 임용시험을 통과하고 모교인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 기숙학교의 교사로 채용되었다. 수도원에서는 교사 외에 오르가니스트로도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브루크너가 처음 가지게 된 음악가로서의 공식 직함이었다.
1855년에는 당대 음악이론 교육의 1인자였던 지몬 제히터의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1861년까지 화성학과 대위법 등을 엄격하게 다시 배우면서 완벽한 이론가로 탈바꿈했다.제히터의 이론 수업을 마친 후에는 자신보다 10살 어렸던 린츠 오페라극장 지휘자 오토 키츨러에게 음악형식론과 관현악법을 배웠고, 키츨러가 극장 상연에 열의를 보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키츨러와 공부하던 시기부터 브루크너는 교사 대신 작곡가로 입신할 뜻을 굳혀 종교음악 외에 피아노곡이나 가곡, 실내악 등 세속음악의 창작에도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했고, 수업 말기에는 첫 교향곡을 작곡했다. 1863년에는 브루크너가 작곡한 합창곡이 출판되면서 처음으로 브루크너의 작품이 출판되기도 했다. 이후 전 생애 동안 창작에 매진하면서 바그네리안의 모습을 곳곳에서 보여주었는데, 당시 바그너파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브람스와 그 추종자들로부터 이런 이유로 폄하를 당하거나 촌뜨기 취급을 받았다.
브루크너가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물론 자작 교향곡이나 여타 작품들의 공연이 계속 있기는 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거의 다 실패로 돌아가는 바람에 가뜩이나 적었던 자신감을 더욱 억누르는 결과가 되었다. 이런 실패는 자작곡에 대한 무수히 많은 개정판을 낳게 되었다. 오히려 브루크너는 작곡 보다는 오르간 연주로 명성이 자자했고 1869년과 1871년에는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국제 오르간 콩쿠르에 오스트리아 대표로 참가할 만큼 오르가니스트 브루크너는 1급 실력을 인정받았다.
작곡가로서 브루크너가 처음 성공을 거둔 것은 교향곡 제7번이 라이프치히에서 초연된 1884년이었다. 그 직후에 초연된 현악 5중주의 전곡 초연도 대성공을 거두었고, 그 기세를 이어서 그 동안 실패했던 작품들도 점차 호평을 받기 시작했다. 이런 유명세는 부와 명예를 얻는 것으로도 이어졌고, 1891년에는 비엔나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오스트리아 정부로부터 종신 연금을 받고 만년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로부터 집까지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나이가 나이었던 탓에 브루크너는 점차 건강 악화로 고생하게 됐고, 1894년 후반에 빈 대학에서 마지막 강연을 개최한 이후로는 공적 활동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 조차 힘겨워했기 때문에, 황실에서는 벨베데레 궁전의 부속 건물이었던 단층 주택을 새로 제공했다. 창작은 계속 진행했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아 마지막 작품이 된 교향곡 제9번은 3악장까지만 완성되고 4악장은 미완성인 채로 남아버렸다. 사후 유해는 유언에 따라 방부 처리되어 장크트 플로리안 수도원의 대성당 지하에 있는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브루크너의 중요한 작품으로는 교향곡과 종교음악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열한 개의 교향곡과 세 개의 미사, 테 데움 등의 종교 음악을 작곡했다. 그의 작품은 풍부한 화성, 복잡한 폴리포니, 유도동기, 긴 연주시간으로 유명하여 독일-오스트리아의 낭만파 최후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구스타프 말러는 끊임없이 신을 찾았고, 안톤 브루크너는 이미 신을 찾았다.” 독일 출신의 지휘 명장 브루노 발터가 남긴 말이다. 말러와 함께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교향곡의 거장’ 브루크너는 대중에게 친숙한 작곡가는 아니다. 교향곡 하나의 연주 시간이 길면 1시간 30분을 가뿐히 넘기는 데다 형식과 구조도 복잡해 웬만한 사람 귀에는 어렵게 들리기 마련이라서다. 클래식 애호가 중에서도 모든 시대 작품을 정통한 이른바 ‘고수’들이 찾아 듣는 음악으로 통한다.
그러나 일단 한번 빠지면 결코 헤어날 수 없는 게 바로 브루크너의 작품 세계다. 말러가 장대하면서도 격렬한 관현악법과 염세적인 세계관으로 청중을 놀라게 한다면, 브루크너는 범접할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와 속세를 초월한 듯한 종교적 통찰력으로 듣는 이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든다. 브루크너의 작품 세계를 살펴보고 싶다면 올해가 적기다. 브루크너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라서다. 세계 곳곳에서 그를 기리는 클래식 공연들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