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음악/바로크음악

스카를라티 : 소나타 [Alexandre Tharaud]

想像 2024. 7. 31.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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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board Sonatas

Domenico Scarlatti, 1685-1757


 

▒  현존하는 스카를라티의 550여곡의 소나타는 화려한 기교와 대담함 이베리아 반도의 색채가 물씬 느껴지는 가장 중요한 바로크 건반음악 중 하나이다. 스카를라티의 건반 소나타는 대부분 단악장에 A-B 2부 형식으로 되어 있고, 각 부분은 도돌이표가 붙어 한 번씩 반복된다. 길이도 짧은 것은 불과 1분 정도, 길어 봐야 10분 내외일 정도로 매우 단순하다.

 

이렇게 고전 이후의 소나타와 비교하면 얼핏 단순유치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향 나폴리를 비롯한 이탈리아 음악 특유의 낭랑한 선율미가 녹아있는가 하면 당시 관행을 상당 부분 거스르는 반음계, 대담한 조바꿈이나 화음 밖의 비화성음 중 하나인 강한 악센트의 아치카투라(Acciaccatura. 짧은 전타음), 기타의 라스게아도 주법을 연상시키는 불협화음의 강렬한 연속 난타, 이베리아 반도의 전통 음악에서 많이 사용되는 선법인 프리기아 선법의 도입 같은 (당시 기준의) 음악적인 파격이 더해진 곡도 상당히 많다.

이외에도 왼손과 오른손을 엇갈리게 하는 주법이나 한 음을 손가락만 바꿔가며 연타하는 주법 등 당시에는 매우 새롭고 또 어려운 연주 기교였지만 이후 건반악기 연주법 전반에 걸쳐 상용되는 여러 기교들도 선보이고 있어서, 피아노를 비롯해 건반악기 전반을 다루는 연주자들은 그냥 지나치기 힘든 곡들이 많다.

 

TRACK LIST

 

01. Sonata in F minor, Kk.239
02. Sonata in A Major, Kk.208
03. Sonata in C Major, Kk.72
04. Sonata in G Minor, Kk.8
05. Sonata in D Major, Kk.29
06. Sonata in C Major, Kk.132
07. Sonata in D Major, Kk.430
08. Sonata in C Major, Kk.20
09. Sonata in F Minor, Kk.481
10. Sonata in C Major, Kk.514
11. Sonata in D Minor, Kk.64
12. Sonata in D Minor, Kk.32
13. Sonata in D Minor, Kk.141
14. Sonata in B Flat Major, Kk.472
15. Sonata in A Minor, Kk.3
16. Sonata in E Major, Kk.380
17. Sonata in G Major, Kk.431
18. Sonata in D Minor, Kk.9


 

도메니코 스카를라티 [Domenico Scarlatti, 1660 ~ 1725]

 

 

이탈리아 출생의 작곡가이자 하프시코드 연주자. 바로크에서 고전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특히 소나타 형식의 정립에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나폴리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당대 오페라와 오라토리오의 본좌 작곡가였던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음악을 매우 쉽게 접하고 배울 수 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당대 작곡가이자 음악이론가, 교사들이었던 가에타노 그레코, 프란체스코 가스파리니, 베르나르도 파스퀴니 등에게 하프시코드 연주법과 작곡, 이론, 화성학, 대위법을 배운 뒤 1701년에 나폴리 궁정 예배당 전속 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다. 이때 나이가 불과 15세였으니, 스카를라티의 음악적 재능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1703년에 아버지가 나폴리를 떠나 로마로 가자 어린 스카를라티에게는 오페라 음악을 쓸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도메니코의 첫 오페라들인 《돌아온 옥타비아L'Ottavia ristituita》 및 《주스티노Giustino》가 4월 시즌에 초연되었다. 1704년에는 아버지와 로마에서 합류했는데, 아버지 알레산드로는 아들을 이탈리아 반도 북동부의 베네치아로 보내 음악적인 경험을 더 쌓도록 했다.

스카를라티의 젊은 시절 정확한 활동 양상이나 일화는 잘 알려지고 있지 않다. 1709년에 로마에 거주하고 있던 폴란드 망명 왕실의 여왕 마리 카시미르의 전속 쳄발리스트 겸 작곡가로 부임했다. 왕비의 위촉을 받아 작곡한 첫 작품은 오라토리오 《클로도베오의 개종La conversione di Clodoveo》인데, 아쉽게도 소실되었다. 삼년에 걸쳐 스카를라티는 왕비를 위하여 몇 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역시 대부분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 작품들은 스카를라티의 작곡 실력을 과시하기에 모자람이 없었고, 1715년부터는 로마의 극장들에 오페라를 제공했다.

종교적으로는 바티칸의 명망한 성가대 카펠라 줄리아(Capella Giulia)의 부감독을 지냈고, 카시미르 여왕이 떠난 1714년부터는 감독에 임명되었다. 이 시기에 영국 런던에서 자작 오페라를 상연하는 등 명망있는 작곡가로 입지를 굳혔다.

 

한편 이 시기 동안 건반 명연주자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오토보니 추기경(Cardinal Ottoboni)의 저택에서 독일 출신으로 이탈리아에 유학 중이었던 동년배 라이벌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과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연주 대결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 결과는 하프시코드는 스카를라티 승, 오르간은 헨델 승이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로 지냈고, 헨델은 자신의 협주곡집에 스카를라티의 주제를 번번히 인용하기도 했다.

 

1719년에 스카를라티가 로마의 직책들을 사직하고 팔레르모로 떠났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기에 영국을 방문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증거는 없다. 다만 스카를라티의 오페라 《나르시소Narciso》가 1720년 런던에서 상영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아쉽게 이 오페라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1719년 포르투갈 왕실에서 초빙 제의를 받고 리스본의 궁정 작곡가로 임명되었는데, 이 일에는 당시 포르투갈 공주였던 마리아 막달레나 바르바라와 남동생 돈 안토니오의 전속 음악교사일도 포함되어 있었다.

1727~28년에는 잠시 로마로 돌아가 일하면서 죽기 직전의 아버지와 만나고, 첫 아내 마리아 카테리나 젠틸리와 결혼했다.

1729년에는, 후에 페르난도 6세가 되는 스페인 황태자 페르난도와 결혼해 스페인 왕실의 며느리가 된 마리아 공주를 따라다시 스페인의 세비야로 갔다. 1733년에 궁정이 불타자 마드리드로 이동했다. 스페인에서는 그 지방의 민속 춤곡인 플라멩코를 비롯한 전통 음악의 강한 영향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평생 동안 직책을 유임하면서 수백 편에 이르는 건반 소나타를 비롯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1738년 그가 출판한 유일한 악보집인 30곡의 《쳄발로 연습곡집(Essercizi per Gravicembalo)》을 스페인도 아닌 런던에서 출판했는데 당시 런던의 음악가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는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자신의 《12개의 합주 협주곡(12 Concerti Grossi, Op.6)》의 1번 협주곡의 마지막 악장에서 스카를라티의 K.2 소나타를 사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찰스 애비슨의 협주곡 12개는 전부 스카를라티를 주제로 차용한 것이기도 하다.

 

1739년에 첫 아내와 사별한 뒤에는 스페인 여성인 아나스타시아 마하르티 히메스와 1742년 재혼해 여생을 보냈고, 당대 본좌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와 친교를 맺고 그를 위해 성악 작품들을 써주기도 했다. 1746년에는 펠리페 5세가 죽고 페르난도 6세가 등극하자 왕은 파리넬리를 왕립 오페라 감독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파리넬리의 음악 활동이 더욱 왕성해졌고 덩달아 스카를라티도 바빠졌다.

1757년에 마드리드에서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고, 유해는 산 노르베르토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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