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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켐프 (Wilhelm Kempff,1895 ~ 1991,Pianist)

想像 2011. 1. 15.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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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해석의 전형은 흔히 빌헬름 박하우스와 빌헬름 켐프의 양대 산맥으로 이야기된다. 이를테면 이들의 연주와 해석이 독일 음악의 가장 전통적이고도 순수한 계승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 모두 19세기 말엽에 출생했고 20세기 초엽부터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여 독일 음악의 합리적 전통을 되새기는 작업을 이행했다. 특히 빌헬름 켐프의 레퍼토리는 바하에서 모차르트와 슈베르트를 거쳐 브람스에 이르는 고전 음악의 핵심들. 그 중에서도 베토벤에 대한 강렬한 추억을 남겼다.

음악적 구성력이 뛰어나고 역동적인 동시대의 ‘라이벌’ 빌헬름 박하우스에 비하여 강렬함이 뒤처진다는 얘기가 있고 바로 그 점이 러시아의 에밀 길레스와도 대별된다는 얘기가 있지만,빌헬름 켐프의 타건은 베토벤이 고전주의의 완성자이지만 동시에 낭만주의의 비조라는 점을 기억한다면,그리고 그의 피아노 소나타가 대체로 음악적 양식의 완성보다는 ‘개인적 독백’에 가까운 측면이 있음을 고려한다면,빌헬름 켐프의 피아노는 베토벤의 가장 은밀한 서정과 닮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빌헬름 켐프는 1895년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위테르보크에서 태어났다.루터파를 신봉하는 오르가니스트 가문 출신인 켐프는 일찍이 피아니스트로 아주 독보적인 천재성을 드러내보였다. 천재들이 거의 그러하듯 켐프 역시 어린 시절 수많은 일화를 만들었다. 그 중의 하나. 9세 때 베를린 음악학교의 시험을 볼 때 바하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암보로 이조(移調)하여 연주해서 교수들을 깜짝 놀라게 했던 일이 있었다.

1905년부터 그는 베를린 대학에서 리스트의 전통을 이어받은 하인리히 바르트(Heinrich Barth)에게 배웠는데,한스 폰 뷜로의 제자였던 바르트가 양성한 제자들로는 특히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을 꼽을 수 있다. 스무 살 때 켐프는 피아니스트,오르가니스트와 동시에 작곡가로 활동했다. 이 학교를 졸업한 뒤엔 베를린 음악대학으로 다시 진학하여 피아노,오르간,음악학을 연마했다. 물론 재학 중에도 이미 직업적인 아티스트로 착실히 명성을 쌓아 올려갔다. 하지만 1916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의 첫 협연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고,베를린에서 개최된 첫 독주회에서 베토벤 소나타 ‘함머클라비어’와 브람스의 ‘파가니니의 변주곡’등을 연주하면서 진정한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17년(22세)에 최고의 영예인 '멘델스존 상'을 받고 졸업했고 본격적인 연주활동에 나섰다. 1917-1918년 켐프는 독일과 스칸디나비아 반도 순회연주를 한 바 있다. 졸업 이듬해에 베를린·필의 독주자로 계약을 맺었고,1920년에 대망의 첫 레코딩을 했다. 이 당시 켐프는 시벨리우스와 푸르트뱅글러,달베르,니키슈와의 우정을 유지해나갔다.

1920년 스칸디나비아 반도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켐프는 베토벤의 ‘에코세이즈’와 ‘바가텔’을 수록한 첫 음반을 내놓는다. 이어서 1924년부터 1929년까지는 슈투트가르트의 베르텐베르크 국립음악원의 학장직을 맡았고,1931년부터 1941년 사이에는 에트빈 피셔와 발터 기제킹,에두아르트 에르트만,엘리 네이 등과 함께 포츠담에서 서머 스쿨을 열기도 했다.가르치는 일과 연주활동을 양립시킬 수 없을 만큼 그는 분방한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포츠담 음악연구소의 마스터 클라스를 이끌면서 연주활동을 펼쳤고 1931년엔 독일 예술원 회원으로 추대됐다.

빌헬름 켐프는 교육자,작곡가(네 개의 오페라,두 개의 교향곡,두개의 현악4중주와 바이올린 협주곡등을 작곡했다.)로 활동하면서 이따금 켐프는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1928년 바흐의 ‘푸가의 기법’을 지휘했다.)즉흥에 강한 오르가니스트로 나타나는가 하면,게오르크 쿨렌캄프와 파트너를 이루어서는 실내악 연주자로,로테 레만과 함께는 특히 피아노 연주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시기에 켐프는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일본에서 대단한 명성을 얻게 되고,특히 1938년에는 파리에서 연주했다.

그러다 전쟁 이후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더 이상 활발한 연주활동이 불가능해지자(히틀러 통치시절 켐프는 수동적인 태도를 취해 몇 년간 유럽무대에서 고립되었다),켐프는 다시 작곡을 시작했고,자신의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다. 1950-1951년 베토벤의 소나타  전곡의 연속 연주와 전집 레코딩의 위업을 달성하여 세계최고의 베토벤 아티스트라는 명예를 안았다.

단지 1964년에만 이루언진 그의 미국데뷔무대는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 만년에 병마에 시달린 켐프는 베토벤을 조심스럽게 연주하고,슈베르트의 소나타들을 다시금 새롭게 발굴해내고 난 뒤에는 다시 바흐로 회귀한다.

그는 주로 베토벤의 32개 소나타와 다섯 개의 콘체르토를 연주하며 생활을 해나갔으며,지칠 줄 모르는 슈베르트 소나타의 개척자였으며,정작 자기 나라에서는 좋게 평가받지 못하고 연주되지 않았던 쇼팽, 리스트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켐프의 연주에서는 천재적인 드라마티즘,아라우와 제르킨과 리히테르의 연주에서 엿보이는 정묘한 콘트라스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처음의 참모습상태에 있었던 것처럼 텍스트에 표시된 대로 연주하는데,가장 자연스러운 템포와 제일 알맞은 음색을 택한다.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8번《비창》, Op.13
I. Grave - Allegro di molto e con brio 
II. Adagio cantabile 
III. Rondo (Allegro)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14번《월광》, Op.27-2
I. Adagio Sostenuto
II. Allegretto 
III. Presto agitato

베토벤 : 피아노 소나타 23번《열정》, Op.57
I. Allegro assai
II. Adante con moto
III. Allegro ma non trop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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