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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와 반유대주의,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히틀러와 나치

想像 2024. 3. 7.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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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와 반유대주의,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히틀러와 나치


 

20세기 동안, 바그너의 꼬리표에 따라 다녔던 것이 그의 반유대주의, 이스라엘에서의 그의 음악 연주 금지, 그의 열렬한 숭배자였던 히틀러 및 나치이. 그가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지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가 비판받게 된 대부분의 사건들은 그의 사후에 일어난 것들이다. 즉 바그너가 죽고  한참 지난 1930년대에 그의 음악을 나치 당이 전용함으로써 필요이상으로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바그너는 꾸준히 그리고 열심히 유대인, 특히 유대인 작곡가가 독일의 해로운 외래 요소라고 비난했다. 그의 반유대인 수필 중 처음이자 가장 찬반 논란이 큰 것은 1850년에 "K. Freigedank"("자유로운 생각")이라는 필명으로 Neue Zeitschrift에서 출판한 "음악 속의 유대주의"("Das Judenthum in der Musik")이었다. 

 

수필은 유대인 작곡가, 가령 바그너의 동시대인이자 경쟁자였던 펠릭스 멘델스존이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와 같은 유대인 작곡가들이 "대중적인 비선호"되는지 설명하는 내용이다. 바그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이질적인 외모와 행동 때문에 독일인들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으며, 따라서 "... 우리는 항상 본능적으로 그들과의 실질적인 접촉에 불쾌감을 느낀다" 고 썼다.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은 얕고 인공적인 음악만 쓸 줄 알며, 이는 그들이 "민족의 참 정신"과의 연결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필의 결론에서, 그는 유대인에 대해 "너희들이 너희들의 저주라는 짐으로부터 정화될 방법은 단 하나다: 아하수에로(방랑하는 유대인, 전설의 인물)의 정화 - 복종하는 것!"이라고 썼다. 이것이 실제적인 물리적 소멸을 의미하기 위해 취해진 것이지만, 수필의 문맥상 그것은 유대주의의 박멸을 가리킨다. 근본적으로, 바그너는 유대 문화의 포기와 유대인을 독일 문화계로 흡수시키기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첫 출판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그 자신의 이름을 걸고 소책자로 1869년에 재출판하여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공연 시에 여러 대중적 항의를 야기시켰다. 바그너는 비슷한 시각을 여러 다른 글, 가령 "독일인이란 무엇인가?" (1878) 등에서 반복했다.


20세기 후반에 들어, 로버트 구트만 같은 학자들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가 그의 글에 국한되지 않고 오페라 또한 숨겨진 반유대주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주장을 발전시켰다. 가령, 반지의 미메(Mime)나 마이스터징어의 직스투스 베크메서(Sixtus Beckmessere)와 같은 인물은, 비록 유대인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반유대적인 전형적인 인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은 논란이 많다. 그런 식으로 가정된 "숨은 메시지"는 종종 복잡하게 얽혀 있고, 편견 어린 과대해석의 결과일 수도 있다. 바그너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쳐, 엄청난 양의 자신의 모든 측면(자기 자신의 오페라, 자신의 유대인에 대한 관점, 기타 태양 아래에 있는 실질적인 모든 다른 주제까지)을 분석하는 글을 써 왔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런 가정된 반유대인 메시지는 전혀 언급된 바가 없다.

 

바그너 자신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독특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존경했지만, 그는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 혈통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간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이스라엘의 신은 예수의 아버지인 그 신과 다르고, 십계명은 기독교의 교훈에 있는 자비와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또한 불교에 매료되었고, 여러 해 동안 불교 오페라인 "승리자"(Die Sieger)를 구상했고, 이것은 붓다의 마지막 여행을 비유한 Sârdûla Karnavadanaan에 기초할 계획이었다. "승리자"의 면면은 결국 파르지팔에 흡수되어, 기독교의 바그너화된 기묘한 판을 그려낸다. 가령 성찬식에서의 화체설(포도주와 빵이 그리스도의 피와 살도 된다는 설)은 미묘하게 재해석되어, 뭔가 기독교적인 것보다는 이교도의 이식에 더 가깝에 되었다.

 

그의 매우 공공연한 반유대주의적인 시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유대인 친구와 동료의 광범위한 망을 갖고 있었다. 이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 그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의 초연을 지휘하도록 고른 유대인 지휘자 헤르만 레비였다. 바그너는 처음에, 아마도 오페라의 종교적인 내용 때문에 그러했겠지만, 파르지팔을 지휘하기 전에 레비가 세례를 받기를 원했지만, 나중에 그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레비는 바그너와의 가까운 우정을 계속 이어갔으며, 작곡가의 장례식에서 운구를 부탁 받았다.

 

바그너의 죽음 무렵에, 유렵의 국가주의자 운동은 1848년의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인류 평등주의를 상실하고 있었고, 군사주의와 공격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으며, 이에는 비스마르크의 정권 교체 및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적지 않은 부분 영향을 주었다.

 

1883년 바그너의 죽음 후에, 바이로이트는 신화와 오페라에 끌린 우파 독일 국가주의자의 초점이 되어갔고, 이들은 바이로이트 모임으로 불렸다. 이 모임의 한 사람은 Houston Stewart Chamberlain으로, 나치라면 읽어야 했던 수많은 철학적 저술의 저자였다. Chamberlain은 바그너의 딸인 에바와 결혼했다. 코지마와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1830년에 사망한 후, 축제의 운영권은 지크프리트의 미망인이었던, 영국 태생의 비니프레트에게 넘어갔는데, 그녀는 아돌프 히틀러와 개인적 친분이 있었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의 숭배자였고, 바그너의 음악과 독일인 국가(1871년 이전에는 형식적인 정체성이 없었던 국가)에 대한 히틀러 자신의 영웅적인 신화를 융합할 길을 물색했다. 예를 들어, 바그너 필생의 대작 '니벨룽의 반지’의 주인공 지크프리트를 아리안족의 심벌로 삼았다. 바그너 후기의 작품으로, 16세기 뉘른베르크에서 마이스터징거 (장인시인) 들의 노래경연을 소재로 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는 히틀러가 휘파람으로 모든 곡조를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좋아한 오페라로, 이곡을 나치 전당대회에서 축제의 오페라로 택했다. 히틀러는 나치 전당대회를 일부러 뉘른베르크에서 개최하였으며, 1943~1944년 시즌에는 바이로이트에서 오직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만을 상연하도록 하면서 전쟁의 선전도구로 이용하였다. 또한 나치의 뉘른베르크 집회는 매번 마이스터징거 서곡 연주로 문을 였었다. 나치의 뉘른베르크 야간 집회는 인상적인 조명과 바그너의 음악으로 집회장을 흥분과 감동으로 몰아 넣었다.  

 

몇몇 학자들은 바그너의 시각, 특히 그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해 왔지만, 이런 주장은 찬반 논란이 많다. 바그너의 작품은 나치식의 영웅주의와 별로 상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표면상의 "영웅"인 지크프리트는 얕고 별로 호소력 없는 시골뜨기일 뿐이다. 바그너의 공감은 분명히 염세적이고 여성같은 보탄에게 있었다. 바그너의 개인 철학의 많은 측면은 분명히 나치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을 터인데, 가령 그의 평화주의 같은 것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괴벨스는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39년에 파르지팔을 상영 금지했는데, 이는 오페라 전체에 평화주의적 목소리가 넘쳤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 대해 후세의 다른 사람이 그에 대해 가진 관점을 가지고 비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숭배는 되돌려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 바그너는 (1889년 4월 20일에) 히틀러가 태어나기 6년 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정치 철학자 레오 슈트라우스는 히틀러가 좋아한 것은 무조건 싫어해야 한다는 느낌 (혹은 정반대의 상황)은 불합리한 것이라고 쓴 바가 있다 -- 그는 이런 것을 Reductio ad Hitlerum (히틀러가 관련되었다는 것으로 돌리면 그건 무조건 틀린 게 된다는 뜻, Reductio ad absurdum (귀류법) 의 패러디) 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라면 히틀러가 채식주의를 실천했다고 (그는 채식주의를 아리아인의 순수성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 중심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그것을 경멸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의 작품은 이스라엘에서 사실상 연주 금지되어 왔으며, 그리고 극히 적은 수의 공연이 행해지기는 했으나 엄청난 찬반 논란을 일으켰다. 바그너의 곡은 사실 공영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는 흔히 방송되고 있지만, 공공 공연으로 무대에 올리려는 시도는 반대 시위, 특히 유대인 대학살 생존자들에 의해 저지되어 오고 있다.

 

 예를 들어 다니엘 바렌보임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한 소절을 2001년 이스라엘 축제의 앙코르로 연주한 뒤에, 의회의 위원회는 지휘자를 쫓아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처음에는 계획되어 있었던 발퀴레 공연을 포기해야 했다. 다른 경우에, 주빈 메타는 관중석의 항의성 퇴장과 야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서 바그너를 연주했다.바그너와 그의 음악이 일으키는 반응의 복잡함을 반영하는 수많은 역설 중 하나는, 현대 시오니즘의 창시자인 Theodore Herzl이 바그너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숭배자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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