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iserwalzer (Emperor), Op.437
Johann Strauss II, 1825∼1899
▒ 본래 ‘왈츠(Waltz, Waltzer)’는 18세기 중엽 오스트리아 및 바이에른 지방에서 유래한 민속춤곡이었다. ‘쿵작짝’하는 3박자 리듬에 기초한 이 춤곡이 연주되면 남녀가 서로 끌어안고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춤을 추게 되는데, 한 때는 그 모습이 너무 외설적이라 하여 금지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외설스런 춤곡이 19세기 들어 빈의 사교계로 진출하면서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고, 이 ‘빈 왈츠’는 1814년과 1815년에 걸쳐 열린 ‘빈 회의’를 계기로 유럽 전역에 전파되었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왈츠는 ‘고급 사교춤의 대명사’ 또는 ‘사교춤을 위한 음악’일 따름이었다. 즉 왈츠 음악의 목적은 사람들이 왈츠를 추는 동안 반주를 제공하는 데 있었으며, 그 이미지나 가치는 어디까지나 유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후반에 ‘왈츠의 왕’으로 일컬어지는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활약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에 의해서 왈츠는 한 차원 높은 ‘예술음악’으로 격상되었던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왈츠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장남으로, 1825년 빈 근교의 장크트울리히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음악가의 길을 걸었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악단을 이끌며 아버지의 악단과 경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타계한 후에는 아버지의 악단을 흡수하여 빈, 나아가 유럽 최고의 ‘왈츠 음악가’로 인기와 명성을 떨쳤다.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는 170여 곡의 왈츠를 남겼는데, 초기에는 ‘빈 왈츠’의 선구자들인 요제프 라너나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가 만들어놓은 형식을 답습했다. 즉 짧은 도입부에 이어 5개의 작은 왈츠가 이어지고, 회상 형식의 코다(종결부)로 마무리되는 구성방식을 취했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선율의 호흡을 길게 가져가고, 종종 3부 형식의 작은 왈츠를 등장시키며, 작은 왈츠 안에서 빈번한 전조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대선율을 도입하는 등 보다 새롭고 풍부한 표현을 추구하기도 했다.그러던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확립한 것은 1850년대 후반의 일이었다. 이 시기에 그는 작은 왈츠를 이루는 두 선율의 대비효과를 높이고 곡 전체의 흐름을 유기적으로 정리함으로써 왈츠음악 특유의 유희적 매력을 보다 세련되게 부각시키는 경지에 올라섰다. 특히 1860년에 작곡된 [가속도 왈츠, op.234]는 유난히 흥미진진하면서 완숙기의 명작들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멋진 작품이다.
1860년대 후반에 이르면 마침내 ‘왈츠의 왕’의 본색이 드러나게 된다. 1864년의 [조간신문, op.279]를 필두로, [빈의 봉봉, op.307],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op.314], [예술가의 생애, op.316], [빈 숲 속의 이야기, op.325], [술, 여인, 노래, op.333] 등 이른바 ‘영광의 300번대’로 불리는 명작들이 줄줄이 탄생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왈츠들은 길고 아름다운 도입부를 지니고 있으며, 이전보다 한층 수준이 높아진 멋진 관현악법으로 장식되어 있다. 특히 목관군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관현악법의 절묘함에 대해서는 바그너와 브람스도 찬사를 보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뒤로 가면서 작은 왈츠의 수가 4개로 줄어든 작품이 늘어나기도 했다.
1870년대 들어 슈트라우스는 오페레타(희가극) 장르에 진출했다. 그 여파로 오페레타에 썼던 선율들을 활용한 왈츠를 썼는가 하면, 한편으로 무도회장보다는 콘서트홀에 어울리는 왈츠들도 작곡했다. 이 시기에는 작은 왈츠의 수가 3개로 줄어든 작품이 등장했는데, 도입부와 종결부가 더욱 충실해지고 작은 왈츠 자체도 한층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내성부에 충실을 기하면서 종전까지 리듬 악기로 쓰였던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화성악기로 쓰인 탓에 왈츠의 리듬이 전면에 부각되지 않은 작품들도 나타났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레몬꽃 피는 고장, op.364], [남국의 장미, op.388], [봄의 소리, op.410], [황제 왈츠, op.437] 등이 있다.
이렇게 해서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춤의 반주음악에 불과했던 왈츠를 보다 예술성 높은 ‘감상용 음악’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렸다. 그 결과 그의 왈츠곡들은 무도회장을 벗어나 콘서트홀에까지 진출했으며, 오늘날에도 세계각지의 공연장에서 때로는 앙코르 곡으로, 때로는 메인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연주되고 있다.
1880년에 발표된 오페레타 [여왕의 레이스 손수건]에서 발췌한 선율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 비록 오페레타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거기에 사용된 선율에 애착을 느꼈던 슈트라우스는 가장 멋진 선율들만을 골라내서 이 왈츠를 작곡했다. 흥미롭게도 그 중에는 식탁 위의 음식을 나타낸 선율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슈트라우스는 미각과 청각의 공감각적 교류를 추구했던 듯하지만, 그로 인해 오페레타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왈츠가 성공을 거둠으로써 그는 보상을 받았고, 오페레타도 다시금 관심을 끌게 되었다.
황제 왈츠, Op.437 (1889)
슈트라우스 원숙기의 대표작으로, 그의 왈츠곡들 가운데 가장 힘차고 당당하며 스케일도 크다. 그야말로 ‘황제’라는 제목에 더없이 어울리는 곡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제목의 유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진다. 그 하나는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프로이센 왕 빌헬름 2세의 독일 황제 즉위 1주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누구에게도 헌정되지 않은 것은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 곡의 초연은 1889년 11월 독일의 베를린에서 빌헬름 2세가 주최한 무도회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 곡이 그 무도회를 위해서 작곡된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자리에서 헌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후에 악보가 너무 빨리 출판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슈트라우스가 이 곡을 헌정하고 싶었던 대상은 프란츠 요제프 1세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당시 오스트리아 황제는 그 해 1월에 일어난 이른바 ‘마이얼링 사건’으로 황태자를 잃고 비탄에 젖어 있었다. 아마도 그런 황제에게 흥겨운 왈츠를 헌정하기는 어려웠으리란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 곡을 작곡하던 무렵의 슈트라우스 자신에게 눈길을 돌려보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른다. 당시 60세를 넘긴 슈트라우스는 가히 ‘왈츠의 황제’라고 할 만한 명성과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빈에만 세 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 이젤 거리에 위치한 본가는 위풍당당한 3층짜리 석조 건물로 화려한 응접실과 서재는 물론이고 파이프 오르간까지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그는 젊고 아름다운 세 번째 부인 아델레와 함께 살면서 많은 친구들과 빈 시민의 사랑을 받으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을 음악을 통해서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과 위로를 선사한 그로서는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호사였다고 할 수 있으리라.
[네이버 지식백과]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왈츠 [Johann Strauss Ⅱ, Waltz] (클래식 명곡 명연주, 황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