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itri Shostakovich, 1906~1975
Symphony No. 9 in E flat major, Op.70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비로소 7번부터 이어지던 전쟁 교향곡의 대미를 이 9번으로 장식한다. “승리의 교향곡”으로도 불리어졌지만 이 9번은 이전의 7번과 8번의 드러난 애국주의 경향이 희석되었다는 평가를 받아 악명높은 안드레이 주다노프의 비판의 희생물이 되자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의도적으로 공산당을 찬양하는 “숲의 노래”를 작곡하면서 10번 교향곡과 다소 멀어지게 된다.
20세기에 들어와서 교향곡이란 장르는 서서히 쇠퇴해지고 말았다. 그 이전에는 교향곡 자체는 조성의 튼튼한 골격하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체라는 것이 지배적인 인식이었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조성을 파괴하는 경향이 주류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가 되어 버렸다. 현대음악의 무조적인 형식은 궁극적으로 교향곡을 시들하게 만들 것임은 명약관화하였다.
이러한 본토 유럽의 변화와 맞물려 러시아에서도 갖은 시도의 노력이 행해졌지만 그렇게 성공적일 수는 없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혁명을 거치면서 소련이라는 정치적인 재편에 의해, 유럽과는 다른 형태를 띠게 되었다. 즉 러시아 5인조나 차이코프스키 등의 시도에는 분명히 한계가 존재하였으며 아직 근대적인 음악을 태동시키지는 못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 모든 것들이 스탈린의 체재 하에 묶인 상황의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요구하는 음악을 작곡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런 음악은 유럽과는 다른 스타일의 서사적이고 기념비적이며 다분히 선동적인 표제음악이 요구되었다.
스탈린이 문화적인 열등감을 박차고 일어설, 새롭게 준비된 천재로서의 쇼스타코비치를 자유 세계의 문화적 아성에 전면적으로 내세운 것은 자칫 쇼스타코비치의 능력이 과소평가 될 수도 있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계획경제처럼 그도 계획된 예술가에 불과하다는 폄하의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쇼스타코비치를 생각함에 있어서 이러한 생각이 얼마나 유치한 사고임을 잘 알고 있다.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에게 주어진 제약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낸 교향곡의 업적과 유산에 대해서는 분명히 합당한 평가를 받아한다. 또한 우리는 정확하게 이런 면들을 고찰할 수 있어야 한다. 제한된 세상에서 펼쳐진 그의 천재성은 어떠한 수식어구도 필요 없으며 단지 귀만 기울인다면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현대에 작곡되었지만 현대음악이라고 하기보다는 다소 근대적인 음악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러나 이렇게 말러의 뒤를 잇는 듯한 음악적 어법과 표제적인 면과 정치적인 풍자를 표현하는 듯한 그의 음악은 현대음악이냐 아니냐 라는 구별보다는 더 우선되는 의미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의 표제적이며 서사적인 작품보다는 절대음악적 성격이 강한 작품에서 표현되는 진실한 소리가 그 주인공이다. 즉 그러한 절대음악에서 쇼스타코비치가 이야기하는 것이 그의 참다운 주장임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우리는 그의 이런 음악정신을 교향곡 제1번, 4번, 5번, 10번, 그리고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에서 접해볼 수 있다.
1948년 2월, 제2회 작곡가 비판사건 때 쇼스타코비치는 미아스코프스키, 프로코피에프, 하차투리안 등과 함께 소련연방공산당 당국으로부터 '고전적 전통의 파괴자, 반민중적·형식주의적 작곡가, 타락한 서구 부르조아 문화의 추종자'라는 심한 규탄을 받았다.
쇼스타코비치의 이 교향곡 제9번은 이러한 시대적 영향으로 인해 좋지 못한 평을 받았던 것이 사실이지만, 양식적으로 잘 완비되어 씌어진 작품이며, 짧고 간소한 형태의 곡임에도 불구하고 외견보다도 훨씬 진지한 의도를 가지고 공들여 쓰여진 하나의 보석 같은 작품이다. 그가 이와 같은 곡을 쓰게 된 외면적 이유는 전쟁의 승리에 의한 밝은 희망을 가벼운 형태로 노래하려 한 데 있으나, 내면적으로는 해를 거듭하면서 점점 강해진 그의 신고전주의적 희구에 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스스로 '이 곡은 작고 즐거운 것인데, 비평가는 공격하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음악가는 연주하는 것을 좋아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지듯이 이미 원숙의 경지에 달한 쇼스타코비치의 독자적인 기법을 재정리하고 일체의 군더더기를 버림으로써 하나의 고전적인 완성된 세계로 응집시키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교향곡 제7번 이후 소위 '전쟁 3부작'의 마지막이 되는 이 곡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인 1945년 8월, 소련 작곡가의 복지 시설인 이와노보 근교의 '작곡가 휴식의 집'에서 완성되었으며, 1945년 11월 3일, 레닌그라드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 되었는데, 초연 당시 '승리의 교향곡'이라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