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춤
Le Roi Danse, 2000
제라르 코르비유 감독의 [왕의 춤]은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 궁정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 프랑스 궁정에서는 작곡가 장 밥티스트 륄리와 극작가 몰리에르가 손잡고 왕과 귀족들의 화려한 취미생활에 봉사하고 있었다. 륄리는 본래 이탈리아 출신으로 열두 살 때인 1646년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스무 살 때 프랑스 궁정의 바이올린 주자와 무용수로 일하면서 왕실과 인연을 맺었다. 이듬해 그는 프랑스 왕을 위한 작곡가가 되었으며, 1661년에는 프랑스 왕실 악단의 총감독 겸 작곡가의 자리에 올랐다.
륄리는 특별히 발레를 좋아하는 왕을 위해 발레곡을 많이 작곡했다. 루이로 하여금 태양왕이라는 호칭을 갖게 한 [밤의 발레]도 바로 그가 작곡한 것이다. 륄리는 어린 왕에게 아름다운 구두를 선물하고, 구두를 신은 왕은 [밤의 발레 ]를 춘다. 힘찬 음악, 아름다운 의상과 화려한 무대, 절도 있는 안무 등이 어우러진 이 공연에서 루이 14세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태양왕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영화에는 [밤의 발레] 외에 [쾌락의 발레], [크세르크세스의 발레], [알시디안느의 발레] 등 륄리가 작곡한 발레곡이 나온다. 루이 14세 시절, 발레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프랑스 궁정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장면들이다.
이 무렵 프랑스 궁정에는 또 한 사람의 엔터테이너가 있었다. 바로 극작가 몰리에르였다. 그는 주로 지방무대에서 활동하다가 1658년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한 [사랑에 빠진 의사]가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왕실 전속의 프티 부르봉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러다가 1665년 왕실 전속극단의 총감독이 되었다.
영화 [왕의 춤]은 각각 왕실 악단 총감독과 왕실 전속 극단 총감독으로 일했던 륄리와 몰리에르의 활동상을 보여준다. 1661년 8월 17일, 몰리에르는 작곡가 륄리와 손잡고 [훼방꾼들]이라는 작품을 만들어, 이제 막 실질적인 권력을 거머쥔 태양왕 루이 14세에게 바쳤다. [훼방꾼들]은 고전 희극과 발레가 결합된 새로운 양식으로, 여기서는 음악과 춤이 대사 못지않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새로운 양식을 ‘코미디 발레’ 라고 했다. 프랑스 궁정 사람들은 발레를 좋아했다. 하지만 당시 궁정에는 발레 공연을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갖춘 무용수가 부족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몰리에르는 연극의 막간에 발레를 공연하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그렇게 해서 코미디 오페라와 발레를 샌드위치처럼 결합한 코미디 발레라는 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몰리에르는 희극의 대가로 꼽힌다. 그의 연극은 그냥 재미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당대의 위선에 대한 풍자도 담고 있었다. [왕의 춤]에는 몰리에르의 희극 [엘리드 공주]의 공연 장면이 나온다. 륄리와 몰리에르가 배우로 출연해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연기하는 것을 보고 왕을 비롯한 관객들은 폭소를 터트린다. 하지만 이를 바라보는 대비와 성직자들은 심기가 불편하다.
그러다가 결국 사건이 터지고 만다. 몰리에르의 [타르튀프]라는 작품이 문제가 된 것이다. [타르튀프]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던 귀족과 성직자들을 풍자한 작품이다. 애초에 루이 14세의 후원을 받고 만들어졌지만 성직자와 귀족, 대비의 강력한 항의로 결국 공연이 금지되고, 륄리와 몰리에르도 곤경에 처하게 된다.
1670년, 루이 14세는 [멋진 애인들]이라는 코미디 발레에 출연한다. 여기서 왕이 맡은 역할은 아폴로. 그는 온몸에 황금 칠을 하고 아폴로로 출연해 태양왕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려 한다. 하지만 중간에 몸을 돌리다가 균형을 못 잡고 그만 넘어지고 만다. 발레를 추기에 너무 몸이 늙은 것이다. 왕은 곧바로 무대를 떠나고, 그 후로 다시는 무대에 오르지 않았다.
춤으로 더 이상 왕을 즐겁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륄리는 절망한다. 바로 그때 몰리에르가 찾아와 새로운 작품으로 왕을 즐겁게 해 주자고 한다. 그것이 바로 유명한 코미디 발레 [서민귀족]이다. [서민귀족]은 주르댕이라는 주인공을 통해 부자들의 위선을 풍자적으로 폭로한 몰리에르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므슈 주르댕은 당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신흥 중산층, 말하자면 ‘벼락부자’이다. 돈은 많지만 평민에 불과한 그는 자신의 재력에 맞는 품위를 갖추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안고 음악, 무용, 검술, 철학 선생 등을 고용해 귀족의 생활을 배운다. 하지만 워낙 무식한 탓에 그 과정에서 온갖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진다. 그의 딸 루씰은 클레몽트라는 청년과 결혼하려고 하지만 주르댕은 그가 평민이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클레몽트는 터키 왕자로 분장해 주르댕 앞에 나타난다. 그는 엉터리 터키 말을 하고, 엉터리로 터키식 종교의식을 치르지만 무식한 주르댕은 그것도 모르는 채 자기도 왕족이 되었다고 좋아한다.
[왕의 춤]에 나오는 장면이 바로 이 대목이다. 사람들이 모두 합심해 주르댕을 속이며 엉터리로 터키식 종교의식을 치르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에서 륄리의 [터키 의식을 위한 행진곡]이 연주된다. 여기서는 대사, 음악, 연기, 연주 모든 것이 우스꽝스럽게 과장되어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특히 악사들의 과장된 몸짓이 인상적이다. 자기들이 희극배우나 된 것처럼 온몸으로 깔깔거리며 연기한다.
연극과 음악, 발레가 결합된 종합예술의 형태를 띠기는 하지만 [서민귀족]은 엄밀한 의미에서 연극이다. 륄리의 음악은 극의 분위기를 북돋아주는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몰리에르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연극과 음악, 무용 세 장르의 예술에 서열을 매기면서 음악과 무용을 ‘연극을 위한 장식품’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서민귀족]에서 음악의 비중은 그다지 크지 않다. 말 그대로 막간극의 반주 정도 밖에 안 된다. 륄리는 몰리에르와 함께 하는 코미디 발레에서 자기 음악이 부수적인 역할 밖에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못마땅했던 것 같다. 작곡가라면 음악이 주가 되는 작품을 쓰고 싶어 하니까. 그래서 심사가 뒤틀린 것일까. 륄리는 몰리에르에게 오페라에 발레와 코미디를 집어넣어 자기 예술을 망쳤다고 비난한다.
[서민귀족]이 공연된 이듬해인 1671년, 파리에서는 륄리의 라이벌인 로베르 캉베르의 오페라 [포몬느]가 크게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대사 없이 오로지 노래만 부르는 오페라인데, 공연은 성공했지만 무대의 기계 장치에 너무나 큰 돈을 투자하는 바람에 대본을 쓴 페랭이 빚에 몰려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륄리는 궁지에 몰려있는 페랭을 찾아가 오페라 공연의 권한을 쉽게 넘겨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 루이 14세를 찾아가 파리에서 공연되는 모든 오페라 공연에 대한 독점권을 요구한다. 왕으로부터 오페라 독점권을 부여받은 륄리는 한창 리허설 중인 몰리에르를 찾아가 그동안 그와 함께 만든 모든 작품의 소유권이 자기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이 일로 륄리와 몰리에르의 오랜 동반자 관계는 종지부를 찍게 된다.
륄리와 결별한 몰리에르는 작곡가 샤르팡티에가 와 손을 잡는다. 그리고 [서민귀족]과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상상병 환자]를 무대에 올리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다. 1673년 2월 17일, 주인공으로 출연한 몰리에르는 공연 도중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영화에서는 몰리에르가 [상상병 환자]에 출연해 처음에는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펼치다가 나중에 해골 가면을 쓴 무희들이 슬로 모션으로 죽음의 춤을 추는 가운데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폐병을 앓고 있었던 몰리에르는 무대에서 쓰러졌으며, 그 후 얼마 안 지나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몰리에르로부터 독립한 륄리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양식을 모색한 끝에 1673년, 기존의 프랑스 연극과 발레 음악의 전통을 계승한 ‘서정비극’이라는 새로운 오페라 양식을 선보인다. 륄리의 서정비극은 이탈리아 오페라와 구별되는, 어떤 의미에서는 최초의 프랑스 오페라라고 할 수 있다. 서정비극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보다 극을 훨씬 중요하게 취급하고, 발레와 합창 역시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며, 기악이 단순한 노래 반주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역할을 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말하듯 노래하는 레치타티보와 본격적인 노래인 아리아가 확연하게 구분되는데, 서정비극에서는 이것이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아리아가 길고 기교적인데 반해, 서정비극의 아리아는 짧고 간단하다. 또한 서정비극에서는 레치타티보가 극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륄리는 프랑스어의 특징을 살린 독특한 레치타티보 즉, 이탈리아 레치타티보보다 훨씬 선율적이고, 프랑스어의 운율이 충분히 살아나는 레치타티보를 썼다.
[왕의 춤]에도 륄리의 서정비극이 나온다. 1686년에 작곡한 마지막 서정비극 [아르미드]를 비롯해 [파에통], [아티스], [이시스], [아마디스] 등이다. 마지막에서는 대표적인 서정비극의 여러 장면들이 연달아 나온다. [이시스]에 나오는 [프랑스의 행복을 위해 신이 선택한 사람]과 [영웅의 위대함과 당당한 위용을], [아르미드] 중 [그 이름의 찬란함이 세상 끝까지 퍼지기를] 그리고 [아마디스] 중 [하늘이 이 땅에 알리는도다]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오페라를 감상하는 왕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그는 매년 한 편 씩 꼬박꼬박 오페라를 써서 무대에 올렸지만 왕의 환심을 사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다.
1687년 1월 8일, 이 날은 륄리가 작곡한 [테 데움]이 연주되는 날이다. 륄리는 왕의 자리를 마련해 놓고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왕은 오지 않고 결국 연주가 시작된다. 화가 난 륄리는 격정적으로 지휘를 하다가 그만 지휘봉으로 발등을 찍고 만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기다란 막대 모양의 지휘봉을 바닥에 쿵쿵 내리치며 지휘를 했는데, 그러다가 그만 실수로 자기 발등을 찍은 것이다. 상처는 심각했다. 의사들은 발을 잘라야 한다고 했지만 륄리는 끝내 이것을 거부했다. 발을 자르면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게 된다며 버텼다. 결국 염증이 온몸으로 퍼졌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륄리는 화려했던 지난날을 회상한다. 그리고 외롭게 세상을 떠난다.
륄리가 죽고 난 후, 궁정에서 음악이 사라졌다. 거울의 방에서 저물어가는 해를 바라보던 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다.
“오늘은 왜 음악이 없지?”
그런 후 방을 나가는 왕과 신하들의 뒷모습을 배경으로 륄리의 [스페인의 폴리아]가 흐른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왕의 춤 - 제자르 꼬르비유 감독 (영화 속 클래식)
01. Lully: Te Deum Motet à deux choeur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