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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Igor Fyodorovic Stravinsky, 1882-1971]

想像 2014. 6. 15.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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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빈스키 [Igor Fyodorovic  Stravinsky, 1882-1971]



러시아의 작곡가. 특히 〈불새 The Firebird〉(1910 초연)·〈페트루슈카 Petrushka〉(1911)·〈봄의 제전 The Rite of Spring〉(1913)·〈오르페우스 Orpheus〉(1947) 등의 발레 음악으로 유명하다.


러시아 시대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인 표도르 이그나체비치 스트라빈스키는 매우 유명한 베이스 가수였으며, 처음에는 키예프에서, 나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페라 가수로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4형제 중에 3번째였으며 음악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집에서 오페라를 연습하는 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와 발레를 볼 수 있었다. 9세부터 정규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았으며 조금 뒤부터는 화성법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재능과 열의는 분명했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형사법과 법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5년 졸업했다.


그동안 그의 음악적 관심은 작곡으로 쏠리게 되었다. 1902년 여름 아버지가 죽기 몇 달 전 같은 대학에 다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을 통해 그를 만났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초기 작품 경향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에게 음악원에 들어가 전통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말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길을 추구하라고 권유했다. 이 충고는 받아들여졌다. 1년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를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데 동의했으며 주로 악기편성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관계는 약 3년(1903~06) 동안 지속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작품을 계획하고 작곡하면서 자기 스승과 함께 검토하는 습관이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러한 작품들 가운데 다수를 편곡했으며, 그 가운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적·공개적으로 연주되었던 〈교향곡 E♭ 장조〉(1905~07)가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탄생된 마지막 작품이 짧은 교향시인 〈불꽃놀이 Fireworks〉(1908)였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딸에게 주는 결혼선물로 작곡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작품이 연주되기 전인 1908년 여름에 죽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는 스승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 만가〉(1908)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지만 악보는 남아 있지 않다.


스트라빈스키는 1905년 대학을 떠났다. 다음해 그는 사촌인 예카테리나 노센코와 결혼했다. 그들은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이 살고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아파트의 방 2개를 차지했으며, 여름에는 시골인 우크라이나 지방 볼리니아의 우스틸룽에서 지냈다. 1907년 아들 표도르가 태어났고 1년 뒤에는 딸 루드밀라가 태어났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의 협력시대


1909년 2월 6일 〈불꽃놀이〉와 초기의 관현악 소품인 〈환상 스케르초 Scherzo fantastique〉(1907~08)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을 때 안무가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 연주를 들었다.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막을 열게 될 발레 뤼스의 여름 시즌을 위한 준비작업에 분주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너무나 감명받은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자신의 예술적 협력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1909년의 발레 시즌을 위해 스트라빈스키는 많은 발레 음악 작품들의 편곡을 위촉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레 실피드 Les Sylphides〉를 위해 편곡한 쇼팽의 피아노 소품 2곡도 포함되어 있다. 디아길레프는 1910년의 시즌을 위해 새로운 발레 음악 〈불새〉를 그에게 위촉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두 사람 사이에 긴밀한 협조관계가 유지된 시기였는데, 이것은 디아길레프가 그의 발레단을 통해 스트라빈스키의 새로운 주요작품들이 부상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된 〈불새〉의 결정적인 성공(1910. 6. 25)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연주회 소품 Konzertstück〉의 작곡을 시작했지만 디아길레프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그는 이미 작곡을 마친 음악을 새로운 발레 대본에 맞게 수정하는 것에 동의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페트루슈카〉는 발레 뤼스의 1911년 시즌 파리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그 전에 스트라빈스키는 〈대 제물 Great Sacrifice〉이라 일컫는 원시적인 봄의 교향곡을 구상했는데, 다시 디아길레프가 발레의 형식으로 바꾸어 작곡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결과 〈봄의 제전〉(최종 제목)은 1911~13년에 걸쳐 2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 역동적인 음악은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스트라빈스키는 덴마크의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 The Nightingale〉을 각색한 짧은 오페라(1908~09년에 작곡하기 시작함)를 완성하려 했으나 〈불새〉를 위촉받아 중단되었다. 이 오페라는 원래 모스크바 자유극장에서 위촉한 작품이었지만 이 새로운 사업계획이 무산되자 디아길레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작품을 인수하여 1914년 여름 시즌에 파리와 런던에서 공연될 발레 뤼스를 위한 작품으로 개작했다. 한편 그해 여름에는 〈결혼 The Wedding〉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발레 칸타타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러시아 농민들의 선율과 관습에 근거하여 만들기로 결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이 새로운 작품은 1915년 또는 1916년에 발레 뤼스에 의해서 공연되었을 것이다. 비록 1917년에 작품이 완성되기는 했지만 최종적인 관현악 편성은 1923년에 가서야 결정되었다.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 발레 뤼스와의 밀월관계는 1910~14년의 5년이라는 상당 기간을 그가 러시아 밖에서 보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개 발레단의 여름 시즌 동안은 파리에서 보냈지만 때로는 그들을 따라 로마·베를린·빈·부다페스트·런던 등지로 여행하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여름의 일정 기간을 우스틸룽의 시골집에서 보냈으며 그곳의 조용한 분위기는 그를 창작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은 점점 줄어들었다. 가족의 건강은 좋지 않았으며 결핵 증세에는 스위스의 공기가 필요했다. 그의 2번째 아들 소울리마는 1910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태어났고 둘째 딸 밀레나는 1914년 레쟁에서 태어났다. 〈봄의 제전〉·〈나이팅게일〉의 부분들이 스위스의 클라랑에서 작곡되었으며, 공백기간과 전쟁기간에는 전적으로 스위스에 머물렀는데 처음에는 클라랑에서, 나중에는 모르주에서 살았다.


망명시대


이 기간은 그에게 고립의 세월이었으며 결국 그를 망명으로 이끌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로부터뿐만 아니라 발레 뤼스(이 발레단의 유럽 공연 계약은 취소되었고 미국 순회공연으로 대체됨)와도 단절되었으며 베를린에 본사가 있는 그의 음악 출판사와도 관계가 끊어졌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제네바에서 전쟁 동안 그의 작품을 출판해줄 그 지역 출판업자를 찾았다. 스위스의 소설가 샤를 페르디낭 라뮈와 공동으로 '읽고 연주하고 춤추는' 오락물인 〈병사의 이야기 The Soldier's Tale〉(1918)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소규모 순회극단의 순회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잔에서의 성공적인 초연 이후 이 계획은 갑작스런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취소되었다.


프랑스 시대


전쟁이 끝나자마자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로 결정했다. 그후 20년(1920~39) 동안 그는 비아리츠·니스·포렙페·파리 등 여러 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그의 음악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 양식에서 러시아적 특징을 포기하고 신고전주의 어법을 수용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며 소위 그가 '견본·실험·융합'이라 불렀던 여러 해 동안의 시도가 있은 다음에야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1927)·〈시편 교향곡 Symphony of Psalms〉(1930) 등과 같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초기 걸작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 스트라빈스키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되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쟁 전에 비해 훨씬 느슨하게 되었는데 이는 스트라빈스키가 확고한 근거 없이 떠돌아다니는 발레단에서는 영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후 디아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한 새로운 발레곡은 〈풀치넬라 Pulcinella〉(1920)뿐이었는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의 악보를 스트라빈스키가 개작하고 나폴리의 코메디아 델라르테(16~18세기 이탈리아의 가면희극) 시나리오인 〈아폴로 무사게테스 Apollo Musagetes〉(1928)를 수정한 이 작품은 발레 뤼스가 무대에 올린 그의 마지막 신작 발레곡이 되었다. 1929년 디아길레프가 죽자 그의 발레단도 해체되었다.


러시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피아노와 목관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1923~24), 피아노 소나타(1924),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데 A장조 Serenade in A〉(1925),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1929), 2대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협주곡(1935) 등을 비롯한 일련의 새로운 작품들은 주로 독주자로서 그 자신을 위한 곡들이었다. 매년 상당 기간을 독주자와 지휘자로 연주여행을 하는 데 보냈다. 이러한 여행은 대부분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925, 1935, 1937년 각각 3차례 북아메리카를 방문했으며 1936년에 1번 남아메리카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창작은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말 러시아의 무용가 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녀 자신의 발레단을 결성하여 스트라빈스키에게 〈요정의 입맞춤 The Fairy's Kiss〉(1928)·〈페르세포네 Persephone〉(1934)를 위촉했다. 〈요정의 입맞춤〉은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음악과 성악 음악을 선곡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페르세포네〉는 20세기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의 시를 노래와 낭독, 춤과 마임이 있는 멜로드라마로 개작한 것이다. 당시 그는 새로 창단된 미국 발레단을 위해 〈카드 놀이 The Card Party〉(1937)를 작곡하기도 했다. 1938, 1939년에는 가족의 사별이 이어졌다. 1938년 가을 그의 맏딸이 폐결핵으로 죽었고 1939년 3월과 6월에는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각각 그 뒤를 이어 죽었다.


미국시대


제2차 세계대전은 그의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1939~40년의 학기 동안 찰스 엘리엇 노튼 강의를 맡아달라는 하버드대학교의 요청은 유럽을 떠나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940년초 그는 여러 해 동안 교제해왔던 화가 베라 드 보세와 결혼했다. 하버드에서 음악 시론에 관한 강의가 끝나자 그들 부부는 캘리포니아를 여행했으며 할리우드에 집을 샀다. 그 집에서 그들은 25년 이상을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2곡의 중요한 관현악 작품인 〈교향곡 C장조 Symphony in C〉(1938~40)·〈3악장의 교향곡 Symphony in Three Movements〉(1942~45)이 작곡되었다. 〈목관 악기들을 위한 교향곡 Symphonies of Wind Instruments〉(1920)은 교향곡 계열에 있어 러시아 시대의 전형적인 음악 재료들을 독창적이고 정교하게 처리한 반면, 〈교향곡 C장조〉는 교향곡 형식에 있어 신고전주의적 원칙의 결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3악장의 교향곡〉은 협주곡의 본질적 특징을 교향곡의 특징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이다.


1948~51년에 그는 영국계 미국인 시인 W.H. 오든과 미국 작가인 체스터 캘먼의 대본에 의한 신고전주의의 전작 오페라인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을 작곡했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했으며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의 초연을 지휘했다. 이 작품을 쓰고 있는 동안 그는 미국의 젊은 음악가 로버트 크래프트를 초청하여 할리우드의 집에서 진행중인 그의 음악작업을 돕도록 했다. 이 작업은 성공적이어서 크래프트는 결국 친구·상담자·음악조수로서 스트라빈스키의 집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때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발전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난봉꾼의 행각〉 이후 자신의 신고전주의 작품들 안에서 착상들이 무르익고 있던 '특별한 부화기'를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렬음악에 관심을 갖는 크래프트의 경향은 스트라빈스키로 하여금 당시 그에게는 생소했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폰 베버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의 몇몇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실험하도록 자극했다. 음렬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고조되었고 그의 어법도 점점 깊이 동화되어갔다. 우선 그의 음렬음악은 조성음악의 틀 안에서 수행되는 조심스런 실험이었으나 전위와 역행, 그리고 역행 전위를 포함하는 음렬음악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칸티쿰 사크룸 Canticum Sacrum〉(1955)과 발레곡 〈아곤 Agon〉(1953~57)은 규모가 큰 작품들인데 이 작품에서 음악은 선법적이고 조성적인 시작으로부터 완전히 음렬적인 중심으로 옮겨가며,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의 선법적이고 조성적인 음악으로 복귀한다. 완전히 음렬적인 첫번째 작품은 〈트레니 Threni〉(1958)이며 그 뒤를 이어 〈움직임 Movements〉(1959)·〈변주곡 Variations〉(1964)·〈진혼 칸티클 Requiem Canticles〉(1966) 등이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그의 러시아 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걸작들에 필적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음렬음악 작품들은 그가 작곡한 조성음악에 비해 길이가 짧은 특징을 갖고 있지만 음악적 비중은 더 크다.


〈진혼 칸티클〉 이후 나빠진 건강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활동을 격감시켰지만, 죽기 1년 전인 1970년에도 그는 바흐의 몇몇 전주곡과 푸가들을 편곡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의 산미켈레 섬에 묻혔다.


음악에 대한 기여


스트라빈스키의 20세기 음악에 대한 특별한 공헌은 폭넓고 다양하다. 그는 결코 선입견을 가지고 작곡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항상 신선하고 비판적인 귀로, 사용 이전의 음악 재료들을 실험했다. 그는 발전에 관한 기존의 관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자신의 음악 재료들을 독자적인 실험체계에 종속시키려 했다. 이것은 특히 시간과 박자, 강약이 관련될 경우에는 언제나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스트라빈스키는 연장과 생략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대칭적 유형의 복합박자를 실험하는 데 흥미를 가졌으며 대칭적 악구의 전통을 깨뜨렸다. 그는 음향의 명료도와 강세의 정도에 대해서도 세심한 처리를 했다. 그는 음악에 건강한 느낌을 주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맥박을 돌려주었으며, 이는 그토록 많은 그의 작품들이 춤추는 데 적합한 이유가 된다. 그의 음악은 '깨끗한 소리'(단순히 음량을 크게 하기 위해 여러 악기들이 함께 소리내지 않음)를 만들었으며,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1917) 이후로 그는 관현악 처리에 있어 서로 비슷한 악기들의 악기군을 사용하여 쓸모 없이 쉬는 악기만 많아지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는 결코 악기 처리에 대한 공식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 어법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악기 배치와 서로 다른 음향을 가지고 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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