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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요·가곡·국악

판소리 〈춘향가〉 전곡 감상 (下)

by 想像 2024. 8.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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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list

 

1. 십장가 대목(창:한농선, 강종철, 조통달, 박송희)  
2. 옥중가∼이도령 장원급제하는데(창:안향년, 조상현)  
3. 어사또가 서리역졸에게 분부하는데∼농부가(창:한농선, 박송희, 안향년, 강종철, 조상현) 
4. 어사와 방자의 상봉 대목(창:조통달, 조상현)  
5. 박석티 대목∼어사또와 춘향모의 상봉(창:한농선, 조상현, 박송희, 한농선) 
6. 어사또와 춘향의 옥중 상봉 대목(창:조상현) 
7. 암행어사 출두 대목∼끝(창:한농선, 박송희, 안향년, 조상현, 조통달, 강종철)  

 


 

판소리와 창극

 

판소리란 고수의 북 반주에 맞추어 한 사람이 몸짓(발림)을 섞어가며 말(아니리)과 노래(소리)로 춘향가, 심청가 등의 이야기를 청중에게 전달하는 공연예술로 소리하는 사람이 혼자서 여러 역할을 해내는 일인 다역극(多役劇)이다. 소리하는 한 사람은 이야기를 청중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꾼, 이야기 속에 나오는 해설자, 그리고 이야기 속에 나오는 각 등장인물의 역할 등을 번갈아 가며 맡게 된다. 판소리판는 소리판을 이끌어 가는 주체인 소리꾼(창자 또는 광대)과 북 장단을 치는 고수와 소리를 듣는 청중으로 구성되지만, 판소리판의 청중은 헛기침도 제대로 못하고 부동자세로 감상해야하는 서양음악의 청중과는 다르다. 판소리 공연에서의 청중은 '얼씨구', '좋다', '으이' 등의 추임새를 통하여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며, 창자와 끊임없는 상호작용으로 판을 이끌어 간다.


조선조 후기부터 문헌에 나타나는 판소리는 원래 12바탕이었으나, 외설스럽고 조잡한 내용을 가진 바탕은 차차 도태되어, 고종 때에 판소리 연구가 신재효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6바탕을 새로이 정리한 후 현재는 <변강쇠타령>을 제외한 5바탕만이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으며, 이 5바탕 판소리를 '바탕소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승과정에서 탈락한 7바탕은 <옹고집타령>, <배비장타령>, <강릉매화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변강쇠타령>이다.


판소리는 기록된 음악이 아니라 구두전승의 과정을 거쳐서 발전해 온 민속음악이다. 구두전승의 판소리는 전승지역, 전승계보, 음악적 특성에 의하여 크게 동편제, 서편제, 중고제라는 3개의 유파로 구분되나, 조선 말기 이후부터 판소리 명창들의 지역 이동이 심하고 교습지역 및 스승의 변동으로 판소리에 이런 유파의 특성도 희석되고 지역적 연고성이 끊어지게 되어 지금은 다만 전승계보에 따라 그런 특성이 일부 판소리에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현재의 판소리를 이해하기 위한 개념으로는 판소리 유파는 적절하지 않으며, 김연수 명창은 판소리 유파를 따지는 것은 무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일제시대만 해도 판소리의 이런 유파적 특성을 지닌 판소리가 전승되고 있는 것을 유성기음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판소리 유파 즉 '제(制)'의 하위개념으로 '바디'가 있는데, '제' 속에 여러 가지 '바디'가 존재하는 양상으로 이해된다.


판소리에는 서양음악의 박자의 개념에 해당하는 '장단'에는 매우 느린 진양조, 보통빠르기의 중모리·엇중모리, 조금 빠른 중중모리·엇모리, 빠른 자진모리, 아주 빠른 휘모리가 있으며, 판소리의 '조(調)/길'에는 화평하고 담담하고 여유 있는 평조(平調), 점잖고 품위 있고 우아한 우조(羽調)와 슬프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계면조(界面調)가 있다.


20세기 초 서구문화의 유입은 판소리 존립의 기초가 되는 전통사회를 그 근저에서부터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판소리도 생존을 위한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판소리를 배역에 따라 분창(分唱)하고, 무대배경과 의상·연기를 추가한 창극이 나타난다. 창극은 연극처럼 여러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각기 배역에 따라 연기를 하면서 판소리를 부르는 연극적 판소리이다. 다시 말하면, 판소리라고 불리는 음악의 매개를 통해 공연되는 연극이다


창극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에서 첫 선을 보였다. 1908년 김창환(金昌煥) 등에 의하여 <춘향가>, <수궁가> 등이 창극으로 공연되었는데, 이러한 창극은 원각사 폐쇄 이후에도 경향 각지에서 흥행하였다. 특히 1933년에는 남도 명창을 중심으로 <조선성악연구회>가 구성되고, 본격적인 창극 공연이 잇달았다. 이 시대의 창극무대를 주도하였던 사람들은 흔히 5명창으로 불리는 김창환, 김창룡, 송만갑, 이동백, 정정렬 등과 이화중선, 김초향, 김추월, 신금홍, 박녹주, 김소희 등의 여류명창들이었다. 창극의 활성화는 상대적으로 판소리의 위축을 가져왔다. 사사계보를 달리하던 여러 명창들이 한 무대에서 공연을 하게되면서, 지역적인 특징과 동서편의 구별이 줄어들게 하는 원인도 되었다.


음반 <명창 춘향가>

 

사운드스페이스가 기획 제작한 이 음반은 1970년대 초에 녹음되어 현대음반주식회사에 의해 <창극(판소리) 완전 대춘향전>이라는 이름으로 6장의 LP음반과 5개의 카세트 테이프로 출반된 적은 있으나, CD음반으로 출반되기는 처음이다. 이 음반이 30여년 만에 CD음반으로 빛을 보게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이러한 형태의 창극 녹음 음반은 더 이상 기대하기 힘들다. 많은 인원 동원과 비용 지출로 편이성과 상업성이 없어 기획·제작하는 음반사가 없기 때문에, 과거에 출반된 유성기음반이나 LP음반의 재발매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음반의 처음은 춘향전 이야기를 요약하여 대금 반주 하에 조상현 명창이 해설(7:45)을 한다. 연주자는 전편 후편으로 나누어 부르고 있다. 전편은 처음부터 "오리정 이별 대목"까지(CD 2의 2번째 트랙)로 김소희, 성창순, 김경희, 3사람의 연주자가 북 반주만으로 소리를 한다. 김소희 명창이 주로 이도령역을, 성창순 명창이 춘향역을, 김경희 명창이 방자역을 맡고 있다. 김소희 명창이 향단이 역을 하기도하고, 성창순 명창이 김소희 명창이 불러야 할 "천자 뒤풀이 대목"을 부르기도 한다. 전편의 후반부 상당부분을 김소희 명창이 판소리를 부르는 스타일로 계속 부르고 있다. 김소희 명창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카세트에는 연주자로(도와주신 분) 김경희 명창(방자역)이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김경희 명창이 아니고 그의 동생인 김정희 명창인 것 같다고 확인하여 주었지만, 연주자란에는 김경희 명창에 대해서만 실었다. 후편은 "신연맞이"부터 끝까지인데, 조상현, 안향년, 조통달, 박송희, 한농선, 강종철, 6사람의 연주자가 등장하고, 반주도 북 반주와 더불어 가야금, 대금, 아쟁이 추가된다. 조상현 명창이 이도령과 변학도역을, 안향년 명창이 춘향역을, 조통달 명창이 형리, 이방, 군사사령, 방자역을, 박송희 명창이 월매, 기생, 아낙네역을, 한농선 명창이 향단이, 기생, 아낙네역을, 강종철 명창이 형리역을 맡고 있지만, 조금씩 다른 역을 하기도 한다. 조상현 명창이 군사사령역을, 안향년 명창이 아낙네역을 하고 있다. 안향년 명창의 소리가 단연 돋보인다.

 

연주자

김소희(1917년 - 1995년 : 전북 고창 출생)

유랑 가극단의 가설포장 안에서 들리는, 이화중선 명창의 심창가 중 "추월(秋月)은 만정(滿庭)허여......"로 시작하는 느린 진양조에 간장을 녹이는 진계면조의 구슬픈 소리를 듣고 소리의 길로 들어선 김소희 명창. 1930년에 송만갑 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김소희 명창은 국창이라는 수식어로도 부족한 판소리의 대가였다. 16살에 음반 취입한 이래, 뛰어난 무대 매너와 맑은 소리로 관객들을 사로잡았으면,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정열을 기울였으며,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우리 소리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었다. 김소희 명창은 판소리 뿐 만 아니라 다방면의 예술에 뛰어나, 그의 서예 실력은 국전에 입상할 정도로 명필이었다.
김소희 명창은 1989년(당시 73세)에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젊은 시절에 녹음을 많이 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아쉬워하였고, 50대 중반의 소리가 제일 좋은 것 같다고 말씀한 적이 있다. 이 음반의 소리는 김소희 명창의 50대 중반의 소리로, 이 음반의 후편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전편에서는 상당부분을 혼자 부르고 있다.

조상현(1939년 - : 전남 목표 출생)

12살 때부터 정응민에게 소리를 배웠고, 후에 서울로 상경하여 박녹주에게 소리를 배우며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완벽하게 조화된 연기력과 타고난 성량을 발휘하여 무대 주연을 도맡아 하였다. 창극무대는 물론 라디오방송, TV출연으로 그이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서편제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박유전제의 소리를 정재근 - 정응민으로 이어받은 명창으로 강산제(보성소리)를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는 명창으로 평가받고 있다. 82년 제2회 국악 대상을 수상했으며, 91년에 판소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남도립 남도대학 국악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후학양성에 몰두하고 있다. 현재 최고의 남자명창으로, 판소리 5바탕을 다 부를 수 있지만, 최고명창에 걸맞은 음반이 없는 것이 아쉽다.

강종철(1923년 - : 전북 김제 출생)

송만갑 제자인 윤두로부터 판소리를 배웠고, 김연수 명창으로 열사가를, 정응민 명창으로부터 수궁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국립창극단에서 활동한 바 있다.

성창순(1934년 - : 전남 광주 출생)

16세에 김연수 창극단에 입단하여 연극활동을 하였으며, 공기남 선생으로부터 심청가를, 정응민 선생으로부터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 춘향가, 수궁가를 배웠으며, 박녹주 선생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1978년에 전주대사습 판소리 장원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1991년에 강산제 판소리 심청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안향년(1945년 - 1981년 : 전남 광산 출생)

부친인 소리선생 안기선, 정응민, 김소희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1970년대 초반에는 소리판을 휩쓸었고, 창극 무대의 춘향, 심청, 황진이와 같은 주역은 거의 모두 안향년 명창이 독차지하였다. 안 명창의 소리는 정말 미려하였다. 소리가 기름지면서도 반듯반듯하게 가락을 이어가는 품세는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상성과 하성을 마음대로 넘나들며, 소리가 겁나 정도로 서슬이 깃들여 있다. 1981년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판소리를 하는 명창중의 한 사람은 "안향년이 지금 살아있다면, 아무도 그 앞에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고 서슴없이 말하곤 한다. 즉 최고라는 이야기이다.

김경희(1920년 - 1989년(?) : 전북 고창 출생) :

김소희 명창의 동생으로, 김여란, 정권진, 김소희 명창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동생 김정희와 함께 창극, 국극 활동을 많이 하였다. 이 음반의 방자역을 맡고 있는 사람이 김경희 명창이 아니고, 김정희 명창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한농선(1934년 - 2002년 : 일본 동경 출생)

본명은 귀례로, 가야금의 명인 한성기의 무남독녀이다. 동경에서 태어났으나, 목포에서 자랐다. 박초월, 박녹주 명창으로부터 흥보가, 수궁가를 배웠다. 미모의 한농선 명창은 영화 <홍살문>, <한> 등에도 출연한 바 있다. 한농선 명창은 동편의 끗끗하고 우조의 소리를 맛깔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2002년 초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지만, 동년 4월 8일 심근경색으로 타계하였다.

박송희(1927년 - : 전남 화순 출생)

본명은 박정자로, 송희 이름은 김소희 명창이 소개해 준 한학자가 지어준 예명이다. 박기홍, 김소희, 박녹주, 박봉술 명창 등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동일창극단, 햇님국극단, 국립창극단 단원으로 활약하였다. 비교적 고제풍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박송희 명창의 장기는 박녹주 명창으로부터 배운 <흥보가>와 박봉술 명창으로부터 배운 <적벽가>이다. 198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흥부가 예능보유자 후보자로 지정된 후 2002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에 출강하고 있으며,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서 전수소를 운영하고 있다.

조통달(1946년 - : 전남 익산 출생)

박초월 명창의 외조카이자 양아들이다. 소리에 통달하라고 박초월 명창이 지어 준 이름이다. 정응민 명창으로부터 심청가를 배워, 보성소리의 한 맥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 판소리 신동 유태평양 군을 제자로 두어 매스컴에 각광을 받은 바 있다. 198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준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반주자

 

이 음반에는 반주자로 북, 대금, 가야금, 아쟁이 등장하고 있으나, 북은 김동준 명인의 사모님이 조순애 명창께서 김동준 명인은 분명히 아니고, "한일섭 선생같다."라고 확인하여 주었다.

한일섭(1929년 - 1973년 : 전남 화순 출생)

어려서 매형이자 성창순 명창의 부친인 성원목으로부터 판소리를 배웠다. 한일섭 명인은 남해성 명창의 남편이자 성창순 명창의 외숙이다. 태평소, 아쟁, 북 등 여러 악기에 능하였으며, 신민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 연반주자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확인하여 최대한 밝혔지만, 30여년 전의 녹음으로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출처: 정창관의 국악 음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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