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을 사랑한 예술가 요하네스 브람스
요하네스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사랑을 모르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너무도 열정적인 사랑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 사랑을 평생 갈구하였으며 사랑을 지켜나간 너무도 인간다운 인간이었다. 특히 그의 사랑 중 클라라 슈만과의 사랑은 그의 예술가적 인생의 거의 대부분의 영감을 얻게 한 사랑으로 그가 클라라를 만난 순간이 예술가로서 새로 태어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브람스, 클라라를 만나다
브람스가 클라라를 처음 만난 것은 1853년 9월 30일, 그의 나이 스무 살 때였다. 그는 당시 거의 무명에 가까운 신인 피아니스트로서, 친구 요하임의 간곡한 권유에 따라 뒤셀도르프에 있는 슈만의 집을 방문했던 것이다. 브람스가 함부르그에서 연주회를 가지고 나서 슈만에게 그의 작품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슈만은 그의 작품을 개봉도 않은 채 반송했고, 브람스는 그 때문에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 때문에 그는 요하임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으나 그 후 슈만의 작품을 면밀히 연구해 본 결과 슈만의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어 다시 용기를 내어 그를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브람스의 피아노 연주로 그의 작품을 들어본 슈만 부부는 브람스의 음악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브람스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슈만은 <새로운 길>이라는 에세이에서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표현을 부여한 사람"이라고 그를 격찬했다.
그 후 브람스는 11월 3일까지 슈만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당시 슈만 부부의 일기에는 하루도 그의 작품에 관한 찬사가 없는 날이 없었다. 브람스 역시 이들 부부에 관한 깊은 존경과 친밀감이 더해 갔음은 물론이다. 특히, 당시 피아니스트로서 서른 네 살이던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정점에 이르러 있었으니만큼, 젊은 브람스가 그녀의 뛰어난 미모와 재능에 매력을 느꼈음은 숙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브람스는 점차 클라라를 사모하게 된다.
브람스는 자신의 마음을 '존경, 경애'라는 말로 대신하고 '슈만 부인이기 때문에 존경!'이라고 자신을 타이르고자 노력한다. 그 증거로 [피아노소나타 작품2]를 클라라 부인에게 헌정하고, 또 창작에만 그의 온 정열을 쏟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다시금 진정한 사랑으로 피어나는 전환기를 가지게 된다.
우정과 존경은 사랑으로 변하고
1853년 슈만이 정신병이 악화되어 라인강에 투신했다는 소식을 들은 브람스는 당장에 슈만 부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1854년 3월 4일 슈만은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브람스는 깊은 상처를 받은 클라라를 도와 절망에서 그녀를 구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6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7번째의 아이를 임신한 클라라를 위로하기 위해 새로운 [피아노 3중주곡 제1번](작품8)을 들려주고 이윽고 막내아들이 태어나자 그녀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슈만의 주제(슈만이 클라라에게 헌정한 곡)에 의한 변주곡]을 작곡했다. 이 처럼 그녀의 슬픔을 달래고 공감을 나누는 동안 우정과 존경은 사랑의 감정으로 변해갔고, 마침내 그녀를 떠나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클라라가 자신보다 14살 연상이라는 사실은 그의 불타는 사랑에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종종 편지를 통해 그의 끓어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고백하기도 했지만, 클라라는 매정하게 자신은 슈만의 아내라는 사실만을 상기시켰고 자신은 '오직 모성적 우정'만을 줄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암시했다. 물론 클라라 역시 브람스와의 관계에서 삶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느끼고 많은 기쁨을 누렸음은 부인할 수 없다. 브람스의 사랑이 없었다면 그녀는 그토록 끔찍한 재앙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브람스의 영혼의 내부에서는 자신이 사랑하는 연인 클라라와 자신이 음악가로 회복하기를 바라는 은인이요 친구인 슈만의 부인 클라라에게 충실해야겠다는 소망 사이에서 끝없는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 폭풍과 같은 심경은 그가 1854년 말에 작곡하기 시작한 어둡고 열정적인 발라드들 속에 반영되고 있다.
남아있는 자를 위한 '레퀴엠'
당시 착상한 광포한 <피아노 4중주 C단조 작품 60>의 도입부를 친구에게 소개하면서 당시의 자신의 절박한 심정을 주저 없이 토로하고 있다. "자, 이제 막 자신을 쏘려고 하고 있는 한 남자를 상상해 보게. 왜냐하면 그에게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느니 말야." 하지만 다행이도 그를 이런 악몽과 같은 내면의 싸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즉 1856년 7월 마침내 슈만이 죽은 것이다.
슈만이 죽자 브람스는 그 유명한 '독일 레퀴엠'을 작곡한다. 브람스의 레퀴엠은 그 출발점부터 카톨릭의 그것과는 달랐다. 가톨릭의 레퀴엠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한다는데 기반을 두고 있다면 이 레퀴엠의 근본 사상은 죽음에 의해 남겨진 사람,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로해 주고자 했다. 즉 남아 있는 자 클라라를 위한 레퀴엠이었던 것이다. 그는 "현세에 살아있는 사람을 위해 레퀴엠을 바치고 싶다."(다시 말하면 '클라라 부인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다.
이처럼 브람스의 클라라에 대한 사랑은 외부의 장애가 사라지고 그가 자유롭게 클라라를 요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오히려 그의 정열은 차분히 가라앉아 예술적 영감으로 승화되어 갔다. 물론 긴 인생 속에서 다른 사랑의 향기를 느끼게 한 여성이 없었을리는 없지만, 결국 어떤 여성도 클라라와 떨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불타는 정열을 예술적 영감으로
20살부터 64살로 타계하기까지 브람스의 마음속에 있었던 존재는 클라라였다. 거기에서 생겨나는 모든 힘. 모든 열정이 창작에 모아졌다. 클라라가 1895년 가을 프랑크푸르트에서 헤어진 후 뇌졸중으로 쓰려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브람스는 피할수 없는 '죽음'의 예감을 가졌고, 예술가로서 브람스는 죽음에 앞서서 성경 말씀에 의한 [네 개의 엄숙한 노래]를 쓰기 시작하여 그의 생일인 5월 7일 완성하였다. 이 네곡에 사랑하는 그녀에 대한 배려와 자신의 생애의 마지막에 대한 예측을 인생의 무상함과 사랑의 위대함과 함께 실었다.
이 곡들은 클라라에게, 자신에게,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낸 엄숙한 사랑의 찬가이자 자기 인생의 고백인 셈이다. 거기에는 순수하게 살았던 인간의 가장 자연스런 심상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클라라의 죽음을 안 것은 그 날부터 13일 후의 일이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가 77세의 나이로 타계했을 때 브람스는 "나의 삶의 가장 아름다운 체험이요 가장 위대한 자산이며 가장 고귀한 의미를 상실했다."고 그녀의 죽음을 요약했다. 이듬해 4월 3일 대작곡가는 64세를 일기로 클라라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