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곡가. 조부는 독일의 소크라테스라 불린 계몽주의 철학자 M. 멘델스존, 부친은 은행가 A. 멘델스존으로 유대인의 명문가계였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미술·문학에서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고, 교양있는 양친을 비롯해 베를린의 뛰어난 예술가·학자들의 지도를 받아 재능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다.
1816년에는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고, 그 사실을 명시하기 위해 멘델스존 바르톨디라는 이름을 가졌다. 19년 이후 작곡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고, J.S. 바흐의 대위법과 W.A. 모차르트의 고전적 양식을 이상(理想)으로 한 교육을 받았다. 21년에 J.W. 괴테를 방문한 이후에 5회의 방문을 통해 큰 영향을 받았다. 25년에는 파리로 가서 직업음악가로서의 길을 선택했는데, 젊은 그의 사상에 큰 영항을 준 인물은 J. 파울·W. 셰익스피어·괴테 등이었고, 《현악 8중주곡 내림마장조(1825)》의 스케르초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발푸르기스의 밤>에 의거하고 있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존경심은 서곡 《한여름밤의 꿈》을 낳았다.
20세 때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거의 1세기 만에 부활·상연해서 대성공을 거두었고, 영국 여행의 인상은 《핑갈의 동굴》, 교향곡 제 3 번 《스코틀랜드》로 결실되었다. 30년의 이탈리아 여행은 교향곡 제 4 번 《이탈리아》를 낳았다.
33년 뒤셀도르프에서의 니더라인음악제로 큰 성공을 한 그는 그곳 음악감독의 지위를 얻고 《메시아》를 비롯한 헨델의 오라토리오를 상연하였고, 그 영향에서 오라토리오 《성바울》과 피아노곡집 《무언가》의 대부분을 작곡하였다. 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관현악단의 제 5 대 지휘자로 취임하여 뒤셀도르프에 한정되었던 음악생활을 독일의 중심적 존재로까지 높였다.
바흐를 비롯한 오래된 음악의 소개와 함께 그 시대 사람들의 작품 연주에 헌신적인 노력을 하였고, R. 슈만·N. 가제·L.H. 베를리오즈의 작품을 소개하였다. 39년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목사의 딸과 결혼하여 3남 2녀를 얻었다. 43년 라이프치히음악원 설립에 공헌하였고, 스스로 원장직도 맡았는데, 성(聖)토마스교회 합창대장인 M. 하우프트만·슈만·F. 다피트·C.F. 베커와 같은 당대 일류 음악가를 교수진으로 맞는 데 수완을 발휘하였다.
라이프치히에 본거를 두고 뒤셀도르프·런던·베를린 등 각지에서 지휘자로서, 또한 피아노와 오르간 명연주가로서 활약을 계속했는데, 47년 5월에 누이의 죽음에 따른 충격 때문에 같은 해 11월 4일에 라이프치히에서 죽었다. 말년의 명작으로는 《바이올린협주곡 마단조(1844)》, 오라토리오 《엘리아(1864)》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