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음악/차이코프스키

차이코프스키 : 교향곡 제5번, Op.64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 Yevgeny Mravinsky]

想像 2023. 5. 28.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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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y No. 5 in E Minor, Op. 64, TH. 29
Pyotr Ilyich Tchaikovsky, 1840-1893


차이코프스키가 [교향곡 5번]에 착수했던 1888년은 그가 [4번]을 쓴 지 11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3월에 작곡가는 오랜 서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모스크바 북쪽 근교의 프롤로프스코예라는 마을(훗날 작곡가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클린 시 근방)로 이사했다. 그는 숲에 둘러싸인 이 한적한 마을에서 묵은 피로를 풀면서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5월 말에 동생 모데스트에게 보낸 편지에는 ‘새 교향곡의 소재를 조금씩 모으려 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6월에 폰 메크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교향곡을 새로 쓸 생각이라고 말씀드렸던가요? 시작은 힘들었지만, 이제는 영감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어쨌든 두고 볼 일입니다.’라고 되어 있어 차이콥스키가 작곡에 본격적으로 손대기 시작한 것은 이 사이의 일로 보인다.

 

8월 초에 보낸 편지에 ‘대략 절반쯤 오케스트레이션했습니다. 그리 늙지도 않았는데 나이가 느껴지기 시작하는군요. 무척 피곤합니다. 예전처럼 앉아서 피아노를 칠 수도, 밤에 책을 읽을 수도 없을 정도로요’라고 쓸 정도로 작업에 몰두한 끝에, 이 곡은 8월 26일에 완성되었다.

 

초연은 같은 해 11월 17일 상트 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니 협회의 연주회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대중적으로는 적잖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비평가들의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어쩌면 연주가 그리 좋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차이코프스키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일류 지휘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작곡가 자신부터가 이 곡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꼭 비평가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지나치게 꾸며낸 색채가,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조잡한 불성실함이 있다.’ 어지간히 비판적인 비평가라도 함부로 입 밖에 낼 것 같지 않은 이런 냉혹한 평가를 내린 사람이 바로 차이코프스키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뒤의 공연에서도 계속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결국 그도 자신감을 회복했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은 풍부한 선율미 때문인지 클래식 작곡가의 음악치고는 유난히 다른 장르의 음악에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교향곡 5번]도 예외가 아니다. 아니 가장 뚜렷한 예를 제공한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민혜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노래의 첫 구절 ‘그대를 만날 때면 이렇게 포근한데….’ 대목은 바로 1악장의 서주 주제 선율을 따온 것이며(민혜경의 노래는 장조이므로 4악장이라고 하는 쪽이 나을지 모르겠지만), 애니 해슬럼(Annie Haslam)의 ‘Forever Bound’라는 곡은 반주가 2악장 코다 부분을 격하게 연주한 뒤 가수가 2악장 주선율을 토대로 노래하게 되어 있다. 정말이지 누군가가 말했듯이 ‘대중음악계 종사자들은 차이코프스키에게 기념비라도 세워주어야 할’ 판이다. 아마 아래에 적힌 각 악장의 해설을 읽으면서 곡을 듣다 보면, 이외에도 이런저런 선율을 들었던 듯한 기분이 기억의 저편에서 가물거리며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Leningrad Philharmonic Orchestra,  Yevgeny Mravinsky / Tchaikovsky: Symphonies Nos.4, 5 & 6 "Pathetique"

 

1악장 Andante - Allegro con anima

 

서주가 붙은 소나타 형식. ‘콘 아니마’는 직역하면 ‘영혼을 담아서’라는 뜻이다. 보통 ‘활기차게’ 정도로 해석되지만 악상 전개를 들어보면 여기서만큼은 달리 파악될 여지가 많기 때문에 그냥 직역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E단조 4/4박자의 서주 첫머리에 등장하는 어두운 클라리넷 선율은 교향곡 전체를 지배하는 핵심 악상이다. 이것을 ‘운명의 동기’라고도 부르는데, 굳이 추상적인 것을 꼭 주관적인 개념을 틀에 맞춰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이런 식의 고착화된 해석은 주로 일본 쪽에서 넘어온 것으로, 개인적으로는 그냥 되돌려주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서주 악상이 별다른 발전없이 몇 차례 반복된 후 주부로 들어가면 6/8박자로 변한다. 클라리넷과 바순이 옥타브로 연주하는 1주제는 서주 악상과 마찬가지로 어둡지만 한층 생동감이 있으며, 이 주제가 여러 가지로 변화해 등장한 뒤 B단조의 유려한 경과구 주제를 거친 뒤 D장조의 온화한 제2주제로 넘어간다. 발전부는 주로 1주제에 기초하고 있는데, 대부분 전개라기보다는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재현부에서는 경과구 주제가 C샤프단조, 2주제가 E장조로 등장한다. 코다는 강렬한 1주제 동기로 클라이맥스를 구축한 뒤 조용히 끝난다.

 

 

2악장 Andante cantabile, con alcuna licenza - Moderato con anima

 

괴상한 암호처럼 들리기도 하는 이 악장의 악상지시어는 ‘안단테로 노래하듯이, 다소 자유롭게’라는 뜻이다. 박자 역시 악상지시까지는 아니더라도 특이한 편이어서 12/8박자이다. 조성(D장조)과 형식(세도막 형식)은 상대적으로 평이하다(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현의 간단한 도입에 이어 호른이 주선율을 노래한다. 매우 달콤하면서도 그리움에 찬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선율은 앞서 말했듯이 대중음악에 차용되었을 정도로 유명하다. 얼마 후 오보에가 연주하는 F샤프장조의 부주제가 부드럽고 밝은 표정을 띠고 나타난다. 이 주제는 확대되어 정점에 이른 뒤 가라앉고, 이어 F샤프단조 4/4박자의 중간부로 넘어가면 클라리넷이 새로운 악상을 연주한다. 이것이 점차 고양되어 악상이 다시 정점에 이르면 서주 악상이 강렬하게 덮어 씌우듯이 연주되며, 여기서 중간부가 끝난다. 세 번째 섹션은 첫 번째와 거의 동일하지만 오케스트레이션 등에 약간의 변화가 있다. 코다에서 서주 악상이 다시 한 번 활약한 뒤 조용하게 끝난다.

 

 

3악장 Valse (Allegro moderato)

 

A장조, 3/4박자. 보통 교향곡의 3악장에는 미뉴에트(고전파 교향곡)이나 스케르초(낭만파 이후)가 오지만 차이코프스키는 왈츠를 사용하는 파격을 감행했다(이 시도는 당시 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유려하고 몽환적인 느낌의 왈츠 섹션과 민활하게 움직이는 무궁동풍의 악상을 지닌 중간부가 멋진 대비를 선보인 뒤 다시 왈츠 섹션으로 돌아간다. 말미에 서주 악상이 다시 등장하는데, 바순으로 연주되어 음색 면에서 원 악상과 상당히 이질적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알아차리기 힘들다. ‘북방의 왈츠 왕’으로 불리기도 했던 차이코프스키의 왈츠 가운데서도 손꼽을 정도로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4악장 Finale (Andante maestoso - Allegro vivace)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알레그로로 장엄하게)로 지정된 긴 서주(악장 전체의 1/3 가량을 차지한다)는 E장조, 4/4박자이며 론도의 요소가 가미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는 서주 악상이 장조로 바뀌어 처음에는 현악 합주로, 그 다음에는 현이 반주하는 관악 합주로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갑자기 팀파니와 더불어 현악기군이 강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하는 1주제가 주부의 첫머리를 장식하며, 이를 받는 8분음표+점4분음표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오보에 독주가 경과구를 형성해 잠시 전개된 뒤 목관이 연주하는 희망에 찬 느낌의 2주제가 연주된 뒤 금관이 서주 악상을 다소 거칠게 연주하면서 발전부에 접어든다.

 

여기서는 1주제와 2주제 모두 발전하며, 재현부 말미의 강렬한 팀파니 연타 뒤 전 관현악이 잠시 침묵에 빠졌다가(여기서 박수를 치는 것은 공연장 예절을 이야기할 때 실수로 흔히 거론되는, 아주 ‘고전적’인 예이다) 다시 트럼펫이 서주 악상을 당당하게 연주하면서 코다로 접어드는데 여기서부터는 일종의 행진곡으로 볼 수 있다. 악상은 점차 고조되어 잠시 프레스토로 휘몰아친 다음 1악장 1주제가 6/4박자로 변형된 채 당당하게 연주되면서 끝난다.

 

브람스는 이 곡의 연주를 듣고 나서 찬사를 아끼지 않았지만, 피날레에 대해서만큼은 뭔가 부족한 것 같다면서 의구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사실 이 마지막 악장은 듣기에 따라서는 베토벤 이래 교향곡의 역사에서 빠지는 일이 없었던 ‘암흑에서 광명으로’라는 모토에 충실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종의 허장성세에 불과한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허세가 불안감이나 두려움을 감추고자 할 때 부리게 되는 것임을 감안하면, 당시 작곡가의 내면에서 어떤 생각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을지 대체 누가 알겠는가. 차이코프스키는 이 곡이 초연된 지 거의 정확히 5년 뒤, 저 유명한 [비창 교향곡]을 초연한 지 불과 아흐레만에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하게 된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5번과 민해경의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중 하나인 민해경의 명곡 가운데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라는 노래가 있다. "그대를 만날 때면, 이렇게 포근한데..."로 시작하는 이 노래의 이 첫 부분이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5번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동기이다. 그런데 이 동기가 이 곡 첫 머리에서부터 조성을 바꿔가며 마지막 악장 끝까지 사용되는 순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분명히 들리는 동기는 이 곡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민해경'을 떠올리게 할 만큼 유사하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나 베토벤 비창의 선율을 팝 음악에 인용하듯이 이 곡의 작곡가도 그런 시도를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이 곡은 '민해경 교향곡'이라는 별칭을 가질 만하다. 앞서 언급한 '민해경 주제'는 곡 전체를 관통하며 흐르는데, 흔히들 이 멜로디가 운명을 상징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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