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1769~1821)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베토벤(1770~1827)은 음악도 나폴레옹과 관련한 작품이 많다. 교향곡 제3번 '영웅'을 비롯해 제5번 '운명',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 역시 나폴레옹 때 작곡한 것들이다.
고전파 대표 작곡가 3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중 베토벤은 유일하게 귀족들과 '맞짱!'을 뜨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작곡가라 전해진다. 지금이야 작곡가들이 저작권료 수입이나 프리랜싱 활동으로 각개 전투를 하며 생계를 유지하지만, 그 당시 신분제 사회에서는 절대적으로 귀족들의 물질적 후원에 의지하여 음악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좀 쉽게 말해보자면, 그 당시 음악가들은 특정 귀족 가문의 ‘계약직’ 작곡가로서 그 귀족들의 여흥과 행사를 위한 음악을 전속으로 작곡하는 형태로 생계를 유지했던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때문에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귀족들 앞에서 연주를 할 때 귀족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들이 입는 의복을 입었다. 작곡가의 위상은 그 당시 궁정 하인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것을 거부하고 옷도 마음대로 입었다. 베토벤은 음악적 실력도 갑이지만 ‘사람 밑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사람 없다’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던 개념 차고 진보적인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처럼 인류의 평등과 자유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던 베토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전제 군주정치에서 비롯된 폐해를 누구보다도 깊이 실감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베토벤에게 프랑스 혁명의 혼란으로부터 나라를 일으켜 세운 나폴레옹에게 강하게 이끌리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베토벤의 전기를 쓴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에 따르면 당시 빈 주재의 프랑스 공사였던 베르나도트 장군이 이런 의지를 촉발시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베토벤은 베르나도트 장군에게서 나폴레옹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교향곡 제3번 ‘영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공화주의의 이상과 새로운 시대의 지도자 나폴레옹에 대한 존경심이 이 교향곡에 대한 최초의 발상을 제공한 셈이다.
나폴레옹에 대한 베토벤의 지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영웅 교향곡]은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갖지도 못했고, 헌정되지도 않았다. 베토벤은 완성된 악보에 “보나파르트 교향곡”이라고 써넣었고, 그를 로마의 위대한 집정관으로 비유하곤 했다. 그러나 결국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섰다는 소식을 듣자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한다. “그도 역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 이외의 모든 인간 위에 올라서서 독재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라고 소리치며 나폴레옹의 이름이 적혀있던 악보의 표지를 찢어서 내팽개친 것으로 전해진다.
베토벤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인 페르난디트 리스에 의해 전해지는 이 유명한 일화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애꿎게도 당시 나폴레옹을 깎아내리고 싶어 했던 영국의 속셈을 드러내는 단편적인 사건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에 크게 실망한 베토벤은 작품의 제목이었던 “보나파르트 교향곡”을 빼버리고 [신포니아 에로이카 – 한 위대한 인물을 추념하기 위해]라고 제목을 수정했다. 이 흔적은 현재 사본 악보와 함께 오스트리아 빈에 보존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