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프로코피에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想像 2008. 5. 24.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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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코피에프 [Sergei Prokofiev, 1891-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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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러시아의 작곡가로 교향곡·협주곡·영화음악·오페라·발레·표제음악을 포함한 폭넓은 영역의 작품을 남겼다.

▶ 혁명전 시절

프로코피예프는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곳 농부들의 노래와 함께 한 농촌에서의 생활은 일생 동안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어린 프로코피예프의 첫번째 음악 교사였으며 그와 함께 오페라를 보기 위해 모스크바로 여행을 하기도 했다. 모스크바의 작곡가이며 음악 교사인 세르게이 타네예프는 소년 프로코피예프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러시아의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에게 추천했다. 글리에르는 여름 동안 2번이나 손초프카를 방문해 그에게 음악이론과 작곡을 가르치면서 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준비를 시켰다. 그곳에서 보낸 기간 동안(1904~14) 프로코피예프는 창작에서 매우 빠른 성장을 보였으며, 음악적 사고에서 그가 보여준 독창성은 그의 선생을 놀라게 했다. 졸업을 하고 자신이 작곡한 최초의 대작인 피아노 협주곡 1번 D#장조 작품10을 직접 연주해 안톤 루빈스타인 상 피아노 부분을 석권했다.

음악원에서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의 학문적인 기초에 대한 확고한 기반을 쌓았으며 음악적 개혁에도 열중했다. 그의 이러한 열의는 음악적 혁신을 내세우는 진보적인 무리들에 의해 지지되었다. 그가 피아니스트로 등장한 최초의 공공 연주회는 1908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렸는데 진보적인 그룹을 청중으로 한 연주회였다. 얼마 후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와 비슷한 성향의 집단을 만나 그들의 호의적인 공감을 얻게 되는데 그들은 1911, 1912년의 모스크바 여름 교향곡 연주 시즌에 프로코피예프가 작곡가로서 데뷔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많은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응용하면서 그의 재능은 급속도로 개발되었다. 그는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작품, 특히 초기의 발레곡을 공부했지만 스트라빈스키의 혁신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고수했다. 당시의 새로운 연극·시·회화의 조류를 직접 접했던 것도 그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러시아의 모더니즘 시인들의 작품, 세잔과 피카소를 추종하는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 시대에 뒤떨어진 자연주의에 대항하는 실험적 작품을 공연한 프세볼로트 메이에르홀트의 연극 작품에 빠져 있었다. 1914년 프로코피예프는 위대한 발레 흥행사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알게 되었고, 그후 15년 동안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있어 가장 영향력있는 조언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10년 아버지가 죽은 후 비록 그의 어머니가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보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서 살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최신 예술 조류를 접하기 위해 런던과 파리를 방문했다. 러시아에 팽배해 있던 폭풍전야와도 같은 긴장된 분위기가 그에게 회의감을 주어 그는 낭만주의적 이상을 믿지는 않았지만 본질적으로 건전한 그의 인생관은 흔들리지 않았다. 홀어머니의 외아들이었기 때문에 징병에서 면제된 그는 계속 공부해 오르간을 완벽하게 익혔으며 모스크바와 그밖의 지역에서 연주회에 출연했다. 혁명 이전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은 실험에 집중되어 있었다. 화성적 사고와 설계는 점점 복잡해져갔다. 디아길레프를 위해 고대 슬라브의 전설을 주제로 한 발레곡 〈알라와 롤리 Ala and Lolli〉(1914)를 작곡했으나 디아길레프는 이를 거절했다. 이렇게 되자 그는 이 음악을 관현악을 위한 〈스키타이 모음곡 Scythian Suite〉 작품20으로 개작했다. 1916년에 있었던 이 작품의 초연은 악평을 받았으나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작곡한 음악 중 최고의 것이었다. 역시 디아길레프가 위촉한 발레곡 〈일곱 광대를 조롱한 광대의 이야기 The Tale of the Buffoon Who Outjested Seven Buffoons〉(1915, 1915~20년 〈어릿광대 The Buffoon〉로 개작)는 민담을 근거로 작곡되었으며 러시아 음악을 혁신하려는 프로코피예프의 실험적 시도를 위한 자극이 되었다. 오페라에 대한 발레의 우위를 주장하는 디아길레프의 견해에도 불구하고(디아길레프에게 있어 오페라는 사라져가는 장르였음) 프로코피예프는 오페라에 대해 적극적이었다. 1911~13년에 작곡한 미숙한 오페라 〈마달레나 Maddalena〉에 이어 1915~16년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을 각색한 〈노름꾼 The Gambler〉을 작곡했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전통을 계승한 그는 섬세한 서정성, 풍자, 정확한 낭송, 극적 효과를 교묘하게 결합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단악장으로 된 피아노 협주곡 1번 D#장조(1911)와 4악장으로 된 피아노 협주곡 2번 G단조(1913)로 인정받았다.

러시아에서 2번의 혁명이 발발했던 1917년은 창작에서 풍성한 수확을 거둔 해였다. 1917년 2월 황제가 퇴위하자 그는 페트로그라드의 거리로 뛰쳐나와 승리의 기쁨을 표출했다. 사회적인 혁신에 크게 고무된 그는 1년 동안 엄청난 양의 신작을 쏟아냈다. 소나타 2곡,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고전 교향곡 Classical Symphony〉, 합창곡 〈그들은 일곱 Seven, They Are Seven〉을 작곡했고, 웅장한 피아노 협주곡 3번 C장조 작품26의 작곡을 시작했으며, 이탈리아의 극작가 카를로 고치의 희극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오페라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The Love for Three Oranges〉을 계획했다. 1917년 여름 그는 러시아의 좌익 예술 활동을 이끌었던 예술가 동맹에 가입했지만 내전으로 거의 9개월 동안이나 페테로그라드와 단절된 채 카프카스에 갇혀 있게 되었고, 1918년 봄이 되어서야 페트로그라드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난세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음악이 설 장소가 없다는 결론을 얻고는 러시아를 잠깐 떠나 해외순회연주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공식 허가를 얻은 프로코피예프는 내란이 격렬한 시베리아를 지나는 어려운 경로를 통해 여행했다.

▶ 국외체류시기

다음 15년간은 일반적으로 프로코피예프의 생애에서 국외 체류 시기로 불린다. 계속되는 소련의 봉쇄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데도 불구하고 그는 러시아와의 접촉을 끊지 않았다. 외국에서의 처음 5년 동안은 대체로 '방황의 시절'로 특징지을 수 있다. 1918년 여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도중에 그는 도쿄[東京]와 요코하마[橫浜]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가졌다. 뉴욕에서 있었던 '볼셰비키 피아니스트'의 획기적인 피아노 독주회는 호평과 악평의 양극적인 반응을 얻었다. 프로코피예프는 시카고 오페라 협회에 들어가 그곳에서 희가극을 위촉받았다. 이탈리아인이었던 오페라 제작자와 지휘자는 고치의 플롯에 의해 오페라를 만들려는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1919년에 완성된 〈3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의 초연은 1921년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그후 몇 년 지나지 않아 이 오페라는 서유럽은 물론 소련 내에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미국에서 스페인 혈통의 젊은 성악가 리나 루베라를 만나 결혼했고 두 명의 아들 스비야토슬라프와 올레크가 태어났다. 미국에서 계속적인 후원을 받지 못한 그는 1920년 봄에 디아길레프와 지휘자인 쿠세비츠키를 만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그들은 곧 그를 서유럽 최고의 음악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폭넓게 인정받게 해주었다. 1921년 파리와 런던에서 디아길레프의 발레단에 의해 공연된 〈어릿광대〉, 1921년에 있었던 〈스키타이 모음곡〉의 파리 초연, 1924년에 공연된 〈그들은 일곱〉은 대단한 관심을 끌었으며 뛰어난 개혁자로서의 그의 명성을 확고하게 해 주었다. 프랑스에서 완성된 피아노 협주곡 3번의 성공적인 연주(1921)는 프로코피예프의 역동적인 민족양식의 정점을 기록했다.

1922~23년 남부 독일 바이에른 알프스의 에탈에서 1년 6개월 이상을 보냈다. 연속되는 초연의 피로에서 벗어나 창작 노선을 재검토한 그는 작품 출판을 준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당시 러시아의 작가 발레리 브류소프의 소설을 각색한 오페라 〈불꽃의 천사 The Flaming Angel〉의 기초 작업에 몰두했다. 여러 해 동안 작업(1919~27)을 해야 했던 이 오페라는 제작자가 없어 그의 생전에는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독일에서의 활동이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자 1923년 가을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집중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면서 풀랑크와 오네게르 같은 진보적인 프랑스 음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23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에 대한 비평에 반발해서 보다 전위적인 양식으로 기울었다. 이러한 경향은 쿠세비츠키가 위촉한 서사적인 교향곡 2번 D단조 작품40 같은 1920년대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의 강한 극적 속성과 충격적인 비례 감각은 자신이 개작한 오페라 〈불꽃의 천사〉로부터 주제를 가져온 교향곡 3번 C단조(1928)에서도 찾을 수 있다. 디아길레프와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그는 새로운 단막 발레 〈강철의 춤 Le Pas d'acier〉(1927 초연)·〈방탕한 아들 The Prodigal Son〉(1929 초연)을 작곡했다. 〈강철의 춤〉은 독창적인 무대 기법과 경제적 혼란 속에서 산업화를 시작한 1920년대초의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미지를 대담하게 살린 연출로 파리와 런던에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방탕한 아들〉은 성서에서 취한 주제와 서정적인 음악을 사용하고 있다. 이 작품은 정서적인 이완과 양식의 명료성에 대한 추구를 반영하고 있는데 이는 또한 현악 4중주 1번 D단조 작품50,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C장조 작품56(1932), 발레 곡 〈드네프 강 위에서 On the Dnieper〉에서도 나타난다.

1927년 소련을 여행했으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러시아의 혁신적 음악가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혁신적인 제작자 메이에르홀트와의 협력을 강화했으며 메이에르홀트는 1929년 브뤼셀에서 공연된 오페라 〈노름꾼〉의 완전한 개작을 도왔다. 1920, 1930년대초 프로코피예프는 서유럽과 미국의 음악적 중심지를 여행하면서 피아니스트로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1925, 1930, 1933년의 미국 순회연주는 연일 성황을 이루었으며 이러한 성공으로 〈방탕한 아들〉의 음악적 재료를 사용한 교향곡 4번 C장조 작품47(1930,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50주년을 위해 위촉됨)과 현악4중주 1번(국회도서관을 위해 위촉됨) 등의 작품이 이어졌다. 그의 새로운 피아노 협주곡인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 4번 작품53(1931)과 5번 G장조 작품55(1932)는 충동과 화려한 기교를 향한 새로운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 소련 시절

물질적인 풍요와 대중적인 성공을 누리면서 서구 문화의 대표적인 인물들과도 친분을 가졌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는 점점 더 커져갔다. 1927, 1929, 1932년에 소련을 방문하고 나서 외국생활을 끝내고 모스크바로 돌아올 결심을 하게 되었다. 1933~35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그는 소련 문화계의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1933~53년의 20년이 그의 소련 시절에 해당되는데 이때 그의 사실적이고 서사적인 경향이 보다 확실해졌다. 전통적인 조성·선율 기법과 20세기 음악의 양식적 개혁의 결합은 보다 완전한 결실을 맺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앞서 몇 년 동안 여러 편의 고전적인 대작을 내놓았는데 이 가운데는 바이올린 협주곡 2번 G단조 작품63(1935),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935~36),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Alexander Nevsky〉(1938)를 위한 음악이 포함된다. 그가 작곡한 극음악과 영화음악들 중에는 이밖에도 〈키제 중위 Lieutenant Kije〉(1934)·〈이집트의 밤 Egyptian Nights〉(1934) 같은 다수의 모음곡과 교향악에 동화가 합쳐진 〈피터와 늑대 Peter and the Wolf〉(1936) 등이 있다. 오페라로 관심을 돌려 내전기간에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묘사한 〈세묜 코트코 Semyon Kotko〉(1939)를 민중의 삶을 다룬 현대적 감각의 드라마 형태로 작곡했다. 현대적인 오페라 부파인 〈수도원에서의 약혼 Betrothal in a Monastery〉(1940, 초연 1946)의 원작은 18세기 영국의 극작가 리처드 브린즐리 셰리든이 쓴 〈가정교사 The Duenna〉였다. 그는 다른 장르에 대한 자신의 역량을 실험하면서 레닌의 가사에 의한 기념비적 작품인 〈10월혁명 20주년을 위한 칸타타 Cantata for the 20th Anniversary of the October Revolution〉(1937), 서사적 칸타타 〈축배 The Toast〉(1939)를 작곡했다. 마지막 외국 여행에서 그는 할리우드를 방문해 유성영화의 기술적인 문제를 공부했다. 이때 얻은 경험을 13세기 튜튼족 기사들에 대항한 러시아인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그린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를 위한 충격적인 민족음악에 사용했다. 칸타타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는 이 영화음악을 바탕으로 작곡되었다. 프로코피예프 예술의 극치 가운데 하나는 갈리나 울라노바가 주역을 맡은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이었다. 1930년대 내내 그는 작곡가 동맹의 조직 작업에 참여하여 지휘자와 피아니스트로 활약했으며 소련 전역을 여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그의 신상에도 변화가 있었다. 그는 가족을 떠나 시인인 미라 멘델스존과 결혼했고, 전쟁은 그의 민족 감정과 애국심을 자극했다. 전시의 난관에도 개의하지 않고 그는 부지런히 작품을 썼으며, 심지어는 1941년 모스크바가 소개되어 1944년까지 모스크바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옮겨다닐 때도 작곡을 했다. 전쟁이 시작된 첫날부터 그의 관심은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를 바탕으로 한 대작 오페라에 집중되었다. 그는 러시아가 나폴레옹의 침략을 물리쳤던 1812년의 상황과 당시의 상황이 비슷하게 전개되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이 오페라의 초판은 1942년 여름에 완성되었지만 그후 이 작품은 10년 이상의 집중적인 작업을 거쳐 개작이 이루어졌다. 이 오페라를 듣는 사람들은 먼저 거대한 규모와 다음으로는 서사적인 낭송과 주인공들의 개인적인 운명을 그린 서정적인 장면들 사이의 독특한 결합에 놀라게 된다. 그는 더욱 민족적이며 서사적인 상을 그리는 쪽으로 기울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교향곡 5번 B#장조 작품 100(1944)에 표현된 영웅적인 웅장함과 에이젠슈테인의 2부작 영화 〈폭군 이반 Ivan the Terrible〉(제1부 1944, 제2부 1948)을 위한 음악(1942~45)에 분명히 나타난다. 카프카스, 중앙 아시아, 우랄에 살면서 그곳 민속에 관심을 가졌으며 이러한 관심은 카바르디노발카리야의 주제에 의한 현악 4중주 2번 F장조 작품 92와 카자흐의 민담을 주제로 한 희가극 〈부자이 칸 Khan Buzai〉에서 찾을 수 있다. 어려웠던 당시의 흔적을 남긴 작품으로는 피아노 소나타 6번 작품 82(1940), 피아노 소나타 7번 작품 83(1942), 피아노 소나타 8번 작품 84(1944)가 있는데 이들 작품은 이미지의 극적인 갈등과 억제할 수 없는 역동성을 표출하고 있다.

무리한 작업은 프로코피예프의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말년의 몇 년 동안 그는 거의 모스크바 교외에 위치한 그의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혁신적인 경향은 수그러들지 않아 막 끝난 전쟁의 비극에 대한 회상을 담은 교향곡 6번 E#단조 작품 111(1945~47),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와의 협의하에 작곡된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신포니아 콘체르토 E단조 작품 125(1950~52), 러시아의 민속적 정취가 풍기고 있는 바이올린 소나타 F단조 작품 80(1938~46, 다비드 오이스트라흐에게 헌정)에 구현되어 있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프로코피예프는 대부분의 정력을 극음악에 쏟았으며 대표적인 예로는 오페라 〈진짜 남자의 이야기 The Story of a Real Man〉(1947~48), 발레 〈석화 The Stone Flower〉(1948~50), 오라토리오 〈평화의 수호 On Guard for Peace〉(1950)가 있다. 서정적인 교향곡 7번 C#단조 작품 131(1951~52)이 그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1953년 그는 갑자기 뇌출혈로 죽었다. 책상에 2대의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 6번, 피아노 소나타 10번과 11번, 카자흐의 희가극, 첼로 독주를 위한 소나타의 스케치를 포함한 미완성 작품들이 남겨져 있었다. 사후 소련 국내외에서 그의 인기는 급속도로 팽창했다. 1957년 교향곡 7번으로 소련 최고 영예인 레닌상을 받았다.

(출처 : 브리태니커 학습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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