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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 [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 ~ 1787]

想像 2010. 3. 6.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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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룩 [Christoph Willibald Gluck ,1714 ~ 1787]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아버지는 산림감시관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상당히 높은 지위였다. 예를 들면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에 등장하는 아가테의 아버지 쿠노도 글룩의 아버지와 같은 지위였다. 당시로서는 농민 사회의 권력자인 셈이다. 글룩이 프라하, 빈, 밀라노 등 여러 도시에 차례로 체류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섬기는 로브코비츠 Lobkowitz공의 덕분이다. 몇 가지 성악곡을 제외하고 글룩은 주로 오페라의 작곡에 전념했다.

모두 이탈리아어로 씌어진 그의 최초의 오페라는 나폴리에서 런던, 코펜하겐에 이르는 유럽의 가장 유력한 극장에서 상연되었다. 1754년경부터 글룩은 빈의 부르크 극장 음악감독이 되었으며, 정기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한편으로는 프랑스어에 의한 오페라 코미크의 작곡도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작곡가 칼차비지와의 만남은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그에게 큰 전기가 되었다.

칼차비지와의 합작으로 글룩은 이때까지의 전통적인 틀을 넘어서게 된다. 즉,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Orfeo de Euridice(1762 빈)와 더불어 글룩 자신이 그의 오페라의 개혁이라고 불렀던 일이 시작된다. 이 개혁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열쇠는 18세기 오페라의 여러 가지 장르의 어법를 연구하는 일이다. 글룩은 그 다양한 요소를 극히 독창적인 통합이라는 형태로 만들 어갔다. 가령 오르페오가 오페라의 창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 즉 극장극 azione teatrale(극장 축제 festa teatrale라고도 불린다)의 전통 속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극장극은 왕후 귀족을 위한 기분전환이라는 특수한 기회를 위한 형식이었으나, 이것은 글룩에게 있어서 작곡상 큰 이점을 제공하게 된다.

무대화된 주제는 신화에서 따온 것인데, 음악극 dramma per musica보다도 훨씬 풍부한 여러 가지 표현수단, 즉 변화가 많은 관현악법과 많은 합창곡, 그리고 반주가 딸린 긴 레치타티보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글룩은 이러한 기본적 요소에 반대의 지평(地平)인 프랑스 오페라의 수법을 가미했다. 이리하여 오르페오의 제1장은 라모의 오페라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구성법에 따르면서 이탈리아 목가극의 시정을 한정시키게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외(<얼마나 즐거운 한때인가 Che fiero momento>)를 제외하고 다 카포 아리아는 그다지 쓰이지 않게 되었으며, 유절가곡(<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보고 있다 Chiamo il mio ben casi>)과 론도(<에우리디체 없이 나는 어찌해야 좋을까 Che faro>), 피날레의 보드빌 등 오페라 코미크에서 따온 진기하고 보다 유연한 형식이 대신 사용되고 있다.

형식에 관한 이러한 연구가 분명하게 증명해 주는 것은 글룩의 개혁이 대본에 비해서 음악의 역할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글룩은 획일적인 아리아를 배치하는 대신, 면밀하게 구성된 몇 가지 긴 장(場)을 설정했으며, 이런 구성법에 의해서 훨씬 큰 규모로 극적 긴장을 재고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또 오페라 세리아의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단호한 의지가 대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후에 바그너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 독자적인 악극을 확립시키기까지 글룩과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칼차비지는 메타스타지오의 오페라의 매맥락을 형성하는 궁정 내의 복잡한 줄거리는 없앴으며, 극의 전개에 방해가 되는 세부사항을 삭제 했다. 원보 그대로의 오르페오의 신화를 다루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드라마의 복잡성이라는 난제를 해결하였고, 그와 동시에 연주자는 그 표현 수단을 단 하나의 목적 즉, 전력을 기울여서 오르페오의 고뇌와 죽음의 세계로부터 아내인 에우리디체를 데리고 나온다는 오르페오의 결심을 표현하려는 목적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처럼 줄거리에서의 엄격성은 글룩의 오페라의 개혁의 출발점으로서 등장인물들에게 다양성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성격은 이후의 오페라에서도 유지된다. 오르페오에서 시작된 여러 가지 시도는 알세스트 Alceste(1767)에서도 실천된다. 같은 시기에 빈에서 작곡된 오페라 텔레마코스 또는 키르체 섬 Telemaco, ossia L'isola di Circe(1765)과 파리데와 엘레나 Paride ed Elena(1770)는 알세스트의 위대함에는 이르지 못하지만 역시 글룩의 뛰어난 창의력을 증명하고 있다.

파리데와 엘레나를 작곡한 후 수년 동안은 파리 상연(1774)을 목표로 하여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Iphigenie en Aulide의 작곡에 몰두했다. 글룩은 프랑스 문단의 당파성이나 왕립 음악아카데미의 답답한 전통이 그의 일을 방해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고 이 작품에 의해 국제적으로 인정을 얻어 보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활동 무대를 파리로 옮기려는 데에는 서정 비극에 고유의 음악적, 극적 가능성을 더욱 개척하려는 글룩의 의도가 있었다. 서정 비극은 라모의 조로아스트르(1749) 이래 잊혀졌던 쟝르였다. 글룩이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프랑스 혁명이 있기 수년 전에 이를 생생하게 소생시켰다.

올리드의 이피제니(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는 어떤 점에서는 글룩이 작곡한 작품 중에서도 가장 혁명적인 오페라이다. 라신느의 비극의 대사에 포함되어 있는 풍부한 변증법에 필적할 수 있는 음악이, 이 오페라의 아가멤논과 클리템네스트라에게 맡겨진 4개의 대규모의 독백에 의해 실현된다. 템포의 다양성, 낭창법의 세련미, 오케스트라 반주의 높은 밀도에 의해, 이 4개의 독백은 작품의 절정을 이룬다. 알세스트에서는 대체로 구조에 있어 장식적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합창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서는 글룩의 교창적인 서법이 예언자 칼카스 일파와 이피제니의 후원자들의 대립을 표현한다는 사실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되었다. 그것과는 전혀 반대로 극적인 요소가 가장 적은 레치타티보 또는 몇 가지의 아리아는 상대적으로 평범함을 면하지 못했다. 또한 글룩은 독자적인 재능으로 줄거리의 몇 군데 중요한 점에 집중된 음악 구성에 힘을 쏟았다. 키노의 낡은 대본에 기초하여 작곡한 아르미드 Armide(1777)는 발레에 의한 디베르티스망을 마구 배치하여 조화가 잡히지 않은 대본 때문에 타격을 받았으며, 서정 비극의 구성을 지나치게 따름으로써 야기된 정체를 나타내고 있다.

사실 글룩의 최후의 드라마 오페라인 토리드의 이피제니(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Iphigenie en Tauride(1779)는 글룩과 대본 작가의 이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의식을 보여준다. 이 오페라에서 짧은 아리아가 모습을 감춘 것은 아니지만, 더욱 선율이 분명한 스타일은 아리아에 더욱 독자성과 힘을 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위대한 독창성은 무엇보다 몇몇 아리아의 장대함에 있다. 이 장대한 아리아는 그때까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밖에는 볼 수 없었던 서정적 감정의 호소를 시도한다.

오페라를 총괄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는 오르페오, 알세스트의 경우와 같지만 여기에서는 반대방향을 취하고 있다. <오 가련한 이피제니 O malheureuse Iphigenie>라고 노래되는 제2막의, 그리고 오페라 전체의 절정은 독창, 레치타티보, 그리고 프랑스 오페라 특유의 합창이 차례로 나오는 가운데 나타난다. 그래서 이피제니의 큰 슬픔은 서정 비극 특유의 역학에 뒷받침되면서 확실하게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규모와 도약하는 선율의 이탈리아적 풍요로움에 의해 서정 비극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버린다. 토리드의 이피제니의 제1곡 또한 서곡이라는 영역에서 최종적인 전진의 첫걸음을 기록하고 있다. 서곡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알세스트의 서문에 언급된다. <서곡이란 것은 지금부터 보여주는 극의 성격을 관객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그 주제를 나타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19세기를 향한 전환기에 오페라라는 장르가 받은 변혁은 복잡한 판단 기준에 의해 설명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글룩의 오페라에 이어지는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기란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베를리오즈나 바그너가 작곡한 작품에서 우리는 글룩의 음악의 정열적인 혁신성이 그들의 눈에 중요하게 비쳤었음을 알 수 있다. 글룩의 음악에는 변동의 한가운데에 있는 양식이 갖는 모든 특징을 볼 수 있다.

그의 주요 걸작이 모차르트에 비해 대중적 이해에 손해를 보고 있는 이유는 그가 모짜르트보다 42세나 연상이고 그의 화성서법이 모짜르트에 비해서 보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를 모짜르트와 동 시대의 작곡가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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