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eat Pianists of the 20th Century
1. Geza Anda (1921 ~ 1976)
헝가리 태생 스위스 피아니스트. 부다페스트 출생. 1942년 스위스로 망명하여 이후 취리히에 거주하면서 세계적으로 활동하였다. 부다페스트의 음악원에서 E. 도흐나니에게 사사하였으며, 졸업 후, J.W. 멩겔베르크·W. 푸르트벵글러 등의 대지휘자들과 협연하여 주목을 끌었다. 바르토크의 해석과 연주에 정평이 있고, 시원하고 명쾌한 스타일을 특기로 하였다.
2. Martha Argerich (1941 ~ )
1941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헤리치는 5살때 처음으로 빈센초 스카라무자로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1955년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 이곳에서 프리드리히 굴다의 지도를 받았으며 니키타 마갈로프, 스테판 아쉬케나제로부터도 배웠다.
1957년 볼자노와 제네바의국제 콩쿨에서 우승했고 1965년 바르샤바 쇼팽 콩쿨에서 우승함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어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갈 수 있었다. 아르헤리치는 19세기와 20세기의 비르투오조 피아노 작품 연주로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비르투오조’ 작품의 스페셜리스트라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레퍼토리는 바흐에서 베토벤, 슈만, 리스트, 드뷔시, 라벨을 거쳐 바르톡을 포괄하기 때문이다. 특히 80년대 초반 이후 그녀의 프로그램에서 보다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은 바로 베토벤의 음악들이다.
아르헤리치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기돈 크레머의 록켄하우스 페스티벌 그리고 뮌헨 피아노 섬머 등지에서 연주를 해왔다. 1992년 루체른 페스티벌에서는 샤를르 뒤트와가 지휘하는 파리 국립 관현악단과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 3번을 협연했으며 1992년 신년 이브 콘서트에서는 아바도, 베를린 필과 슈트라우스의 ‘부를레스케’를 연주했다. 1993년 8월에는 미샤마이스키와 함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리사이틀을 갖기도 했다.
아르헤리치와 도이치 그라모폰사와의 관계는 1967년부터 긴밀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동안 그녀는 수많은 음반들을 녹음했는데 바흐, 브람스, 쇼팽, 리스트, 프로코피에프, 라벨 그리고 슈만등의 독주곡, 아바도와의 쇼팽, 리스트, 라벨, 프로코피에프 협주곡, 뒤트와와의 차이코프스키 협주곡, 시노폴리와의 베토벤 협주곡, 로스트로포비치와의 슈만, 쇼팽 실내악곡, 미샤 마이스키와의 바흐 첼로 소나타 그리고 베토벤 첼로 소나타 등이 대표적인 음반들이다.
특히, 기돈 크레머와 함께 한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집은 그녀의 주요 프로젝트중 하나다. 또한 그녀는 크레머와 더불어 슈만의 소나타, 바르톡, 야나첵, 메시앙 등의 작품과 함께 오르페우스 챔버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녹음하기도 했다. 조인트 앨범인 프로코피에프의 소나타와 멜로디는 1992년 ‘동경 레코드 아카데미’, ‘디아파종’, 1993년 ‘에디슨 어워드’를 수상했다.
3. Claudio Arrau (1903 ~ 1991)
클라우디오 아라우는 남미 칠레(Chile)의 산티아고(Santiago) 남쪽에 위치한 치얀(Chillan) 출신으로 파오리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5세 때 산티아고에서 첫 무대를, 7세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데뷔하였다. 그 뒤 정부의 장학금을 받아 독일로 유학, 베를린의 슈테른음악학교에서 수학하고, 다시 M.크라우제에게 사사(1910∼1915)하여 기량을 닦았다. 1914년 11세의 나이로 베를린에서도 데뷔하고 2년 후에 이바하상을 받아 피아노 독주자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을 뿐 아니라 1924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활약하고, 1927년에는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피아노 1등상을 받아 더 한층 명성을 떨쳤다.
그는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레퍼토리를 가졌으며 뛰어난 기교와 지적이고 개성적인 이해를 특기로 연주하였다고 평가된다. 특히 베토벤과 쇼팽 음악의 세계적인 해석가로 정평이 나있는 그가 우리나라를 두 번씩이나 방문하여 주옥같은 음들을 들려준 바 있다. 그는 음악적 해석을 작곡자의 진정한 의도를 가능한 한 가장 가깝게 다가가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연주자의 상상력을 펴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음악의 해석에 있어서 작곡자의 뜻과 연주자의 개성이 밸런스 있게 조절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라고 보고, 악보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그러면서도 작곡자의 의도를 무책임하게 무시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그는 중남미의 전통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여 가장 먼저 중남미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확립한 선구자적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4. Vladimir Ashkenazy (1937 ~ )
풍부한 색채감과 서정적 표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쉬케나지는 이 시대가 낳은 독특한 연주 품격을 가진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이며, 역사적 격동기에 정치적 시련을 거치면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예술혼을 지켜온 금세기 최고의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1937년 구소련 고리키에서 태어나 6세때 부터 피아노 공부를 시작한 아쉬케나지는 8세 때인 1945년 모스크바에서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으로 데뷔, 그 천재성을 일찍부터 나타내기 시작했다. 1955년 쇼팽국제피아노콩쿠르 2위, 56년 벨기에의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 1위로 일약 세계음악계의 주목을 받게된 아쉬케나지는 이를 계기로 58년 미국과 캐나다에서 데뷔, 크게 성공한후 1962년 콩쿠르의 최고봉인 제2회 차이코프스키국제콩쿠르 우승으로 또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콩쿠르 우승 직후 영국으로 이주하면서 자유로운 예술활동을 위해 고국을 떠날 결심을 하게된 아쉬케나지는 1969년 아이슬랜드로 망명, 세계음악계의 화제를 모으며 새로운 음악인생을 시작한다. 1975년 부터는 지휘에도 흥미를 가져 그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비롯, 로열필하모닉, 보스톤심포니, 클리블랜드, 디트로이트, 런던심포니등 많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해 오고있으며, 1987년 런던의 로얄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그의 지휘자로서의 명성은 최고점에 다르게된다. 현재는 베를린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서 "어떤 격식에 사로잡히지않은 순수한 천재성의 해석력을 가진 지휘자"라는 평을 듣고있다.
아쉬케나지는 연 100회 이상 정열적인 연주활동과, DECCA 레이블을 통한 레코딩활동을 하고있으며, 이차크 펄만, 린 해럴과 파트너를 이루어 챔버뮤지션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1989년에는 조국을 등진지 26년 만에 귀국, 모스크바에서 로얄필과 콘서트를 가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현존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안정된 기교와 음악성을 갖춘 아쉬케나지의탁월한 리듬감각은 비견될 사람이 없으며 다양한 음색과 풍부한 울림, 거기에 성숙한 인간적인 면모까지 반영, 그의 연주회는 언제나 열성팬들로 매진행렬을 이루고 있다.
5. Wilhelm Backhaus (1884 ~ 1969)
독일 라이프치히 출신으로, 1891년부터 7년동안 라이프치히 음악원에서 알로이스 레켄도르프에게 사사한후 다시, 저명한 피아니스트로서 작곡과 연주에 전념하고자 제자를 두지 않았던 달베도르프에게 찾아갔고, 달베도르프는 그의 자질을 보고 단번에 제자로 삼았으니, 그는 달베도르프의 유일한 제자였던 셈이다. 달베도르프의 가르침을 받은후 16세 되던 해 박하우스는 런던에서 최초의 콘서트를 가졌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불과 19세의 나이로 맨체스터 음악원의 교수로 임명된다. 고향으로 돌아와서 니키쉬가 지휘하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호평을 받은 그는 1905년 루빈스타인 상을 받으면서 국제적인 스타로 발돋움하였다. 그는 솔딜스하우젠 음악원, 미국의 커티스 음악원의 교수로 일한적 있지만, 그의 시간의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이어진 콘서트를 통한 연주활동이었다.
'건반의 사자'라는 별명에 걸맞게 박하우스의 연주는 강인하면서도 완벽한 테크닉으로 큰 스케일의 연주를 특징으로 하는데, 그렇다고해서 극단적인 표현에 얽매이지 않고 예리한 분석력과 작품에 대한 공감, 완벽한 균형감으로서 작품을 해석하고 연주하였다. 그는 독일 음악에 강세를 보였는데 베토벤, 브람스, 슈만이 그의 장기였다. 특히 그는 베토벤연주의 권위자로 알려졌으며, 그의 베토벤 소나타는 일종의 교과서적인 음반으로 인정받고 있다.(그는 전 곡을 모노럴과 스테레오로 두 번 녹음했다.DECCA) 또한 한스 슈미트 이세르슈테트가 지휘한 빈필과의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 음반도 명반으로 꼽는다.
6. Daniel Barenboim (1942 ~ )
1942년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워 7살 때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처음 콘서트를 했고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활동하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ur Rubinstein)과 아돌프 부쉬(Adolf Busch)에게 영향을 받았다. 1952년 바렌보임 가족은 이스라엘로 이주했고 빈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1954년 여름부터는 잘츠부르크에서 이고르 마르케비치(Igor Markevich)에게 지휘를 배웠다. 그는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면서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Wilhelm Furtw ngler)의 지휘 리허설에 참석하고 그의 앞에서 지휘를 했다. 1955년에는 파리에서 나디아 불랑제(Nadia Boulanger)에게서 화음과 작곡을 배웠고 1956년에는 런던에서, 1957년에는 뉴욕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하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Leopold Stokowski)와 협연했면서 바렌보임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떠올랐다.
1965년부터는 지휘자로 첫 인연을 가진 잉글리시 챔버 오케스트라(English Chamber Orchestra)와 약 10년간 함께 세계 순회 연주를 했다. 실내악에도 관심을 갖고 자클린 뒤 프레(Jacqueline du Pre), 이차크 펄만(Itzhak Perlman), 핑카스 주커만(Pinchas Zukerman) 등과 함께 자주 연주했으며 1968년에는 자클린 뒤 프레와 결혼하였다. 1973년에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모차르트의 '돈 죠바니'(Don Giovanni)로 오페라 지휘에 데뷔했고 1981년에는 독일 바이로이트에 처음 서기 시작하면서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니벨룽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 '파르지팔'(Parsifal),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 rnberg) 등을 지휘했다. 1977년에는 빈 필하모닉과도 미국, 파리, 런던에서 연주했다. 1991년에는 게오르그 솔티 경(Sir Georg Solti)의 뒤를 이어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이 됐고 1992년에는 도이치 슈타츠오퍼 베를린(Deutsche Staatsoper Berlin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음악 총감독이 됐다. 베를린 필하모닉과도 오랫동안 가깝게 지내며 자주 지휘을 하였다.
7. Jorge Bolet (1914 ~ 1990)
호르헤 볼레트는 1914년 11월 15일, 큐바의 아바나에서 출생했다. 9살 때, 공개연주회를 햇고, 다음 해엔 아바나 필과 협연하는 등 피아노에 대단한 재능을 일직부터 보였다. 12세 때 장학금을 받고 미국의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서 피아노와 지휘법을 공부했다. 학교 레슨과는 별도로 개인적으로는 레오폴드 고도프스키(Leopold Godowsky)와 모리츠 로젠탈(Moritz Rosenthal)의 문하에 들어가 사사하기도 했다.
1935년,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서 데뷔하고, 1937년엔 유진 올만디가 지휘하는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협연하면서 미국에 데뷔하였다. 도한 이때부터 루돌프 제르킨에게 사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무렵에 '나움버그 상'과 '요제프 호프만 상'을 받았다.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제르킨의 조교로 커티스 음악원에서 일했고, 제2차대전 때는 미육군에 들어갔다가 전후엔 일본에 체류하기도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46년에 주일미육군 음악감독으로 있던 설리반의 오페레타 '미카도(Mikado)'의 일본초연을 지휘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 다시 피아니스트로 일하기 시작했고, 1968년엔 인디애나 대학교 음악학부의 교수로 취임했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호의적이지 않았을 때, 구스타브 말러는 "나의 때가 올 것이다"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볼레트 역시 바로 그러한 신조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볼레트의 경우는 운이 좋았다. 비록 때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생존시에 인정받는 피아니스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볼레트는 19세기의 큰물결이었던 소위 '위대한 비루투오조(great virtuosos)'의 마지막 계승자였다. 그의 스승 고도프스키와 로젠탈이 리스트의 직계 제자이기 때문이다.
8. Alfred Brendel (1931 ~ )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음반과 연주회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확고하게 다졌다. 소피아 데젤리크, 루도비카 폰 칸, 에두아르트 슈토이어만, 에트빈 피셔에게 사사했다. 1948년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서 데뷔했으며 1949년 볼자노의 부조니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그후 오스트리아 전역을 다니며 연주했으며 1962년 런던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했고 1963년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연주여행을 가졌다. 주로 베토벤의 해석으로 정평이 나 있지만 리스트 연주가로도 뛰어난 실력을 과시하고 있으며 슈베르트·하이든·모차르트 등에 이르는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고 있다. 또한 슈베르트가 1822~28년에 작곡한 거의 잊혀져 있던 피아노 소품들을 대부분 혼자 힘으로 되찾아냈다. 음악에 대한 지적인 접근으로도 잘 알려져 있지만 음과 음색에 대한 감각적 처리에도 능숙하다. 브렌델은 저서 〈음악적 사고와 재고 Musical Thoughts and Afterthoughts〉(1976)에서 베토벤, 슈베르트, 리스트, 페루초 부조니, 에트빈 피셔에 대해 언급했다.
9. Robert Casadesus (1899 ~ 1972)
로베르는 파리 태생이다. 삼촌 앙리는 부시 4중주단과 함께 20세기 초 최고의 앙상블로 불리는 카페 4중주단(Quatour Capet)의 비올라 주자였으며, 고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주로 가족들과 함께 연주 여행을 다니며 고악기 연주의 재현을 위해 노력했던 뛰어난 음악가였다. 파리 음악원에서는 리스트의 제자며 프랑스 피아노 악파의 대가인 루이 디에메(Louis Diémer)에게 사사했는데, 그는 코르토의 스승이기도 하다. 이 때(1921년) 두 살 아래며 역시 디에메에게 배우던 가브리엘 로트(Gabrielle L'Hôte)와 결혼했다. 부인과는 이 후 50년 이상 앙상블을 이루며 해로한다.
그는 파리 근교 퐁텐블로(Fontainebleau)의 미국 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고(이 음악원은 삼촌 프랑시 Francis 가 설립했다), 후에는 원장이 된다. 그는 이미 1936년 토스카니니 지휘 뉴욕 필의 협연으로 브람스 2번을 연주하여 절찬을 받았는데, 미국을 주기적으로 방문하다가 2차 대전이 터지고 프랑스가 무너지자 미국 음악원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여기서 제르킨과 부시처럼 미국 Columbia(현 Sony Classical)와 인연을 맺고, 2차 대전 종료 후 프랑스로 돌아가서도 Columbia 전속으로 남아 있었다. 1960년대 말까지 녹음 및 콘서트 아티스트로 활발히 활동했는데, 1971년까지 개최한 연주회 수는 무려 3000 이상이라고 한다.
그의 죽음은 갑자기 다가왔다. 1972년 장남 쟝이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지 수 개월 후 파리에서 세상을 떴다. 추측이지만, 아들의 때이른 죽음 때문이라고 해도 반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고 사이 좋은 아들이 40대 중반에 자기보다 먼저 죽었다면, 거의 절망하지 않을 부모가 도대체 있을까.
그의 예술은 명쾌와 세련 그 자체로 볼 수 있다. 무엇을 들어 봐도 부분적인 과장이나 잡다한 군더더기와는 거리가 멀고, 코르토처럼 가끔 지나치다는 느낌을 받는 일은 전혀 없다. 명쾌하고 밝으며 잘 공명되는 음향, 그리고 고전적이며 안정된 해석까지 갖췄으니 소위 '깔끔하게' 들릴 요소는 완벽하게 다 구비했다. 시원한 샘물이 찰찰 흐르는 느낌, 그것이 바로 그의 음악이다.
그의 레파토리는 라모 등 프랑스 바로크에서 바흐를 포함하여 브람스까지 독일 고전/낭만, 프랑크나 생상 등의 프랑스 낭만파인 스탠다드 목록과 함께 드뷔시와 라벨까지 프랑스 근대 음악들이 중심이다. 특히 좋은 평을 받는 것은 세련미와 맑음이 잘 어울리는 모차르트, 고전적이며 그의 완벽한 테크닉을 보여 주는 라벨이다.
10. Shura Cherkassky (1909 ~ 1995)
러시아 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로맨틱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듣는 분이다.
1911년 10월 7일 러시아의 오뎃사 출생. 아버지는 치과의사,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는데,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피했다. 소년시절의 체르카스키는 비범한 천재였다. 커티스 음악원에 입학해서 요제프 호프만(Josef Hofmann)에게 사사했다. 11세 때 볼티모어에서 데뷔했고, 5년 뒤 오스트리아와 남아프리카에 연주여행 했다. 이후 유럽 연주 계획은 2차대전으로 지연되고 있다가 1945년에야 이뤄져 독일 팬들을 열광시켰고 이로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떠올랐다. 이때부터 유명한 음악제에 초대되는가 하면 연주여행도 계속 됐다. 1991년엔 뉴욕 카네기 홀에서 그의 80회 생일을 기념하는 콘서트에 나와 변하지 않은 노익장을 들려주기도 했다.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은 그의 연주 가운데 최고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그의 레퍼토리는 특히 낭만파에서 많이 선택 됐는데 특히 러시아 작곡가들인 차이코프스키,라흐마니노프, 프로코피에프의 작품에서 다른 연주자들과 확연하게 차별되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명반으로는 쇼팽의 폴로네이즈 앨범, 리스트의 항가리 환상곡, 슈만과 브람스의 변주곡 앨범, 80회 생일 기념공연 실황 앨범 등이 있다.
미국 음악계에서 ‘피아노의 루지에로 리치’라고 불려질만큼 대단한 테크니시언이었다. 명료한 톤, 눈부신 기교의 소유자였지만, 그와 동시대의 피아니스트인 호로비츠에 비해서 체르카스키의 이름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까닭은 그가 마이너 레이블에서만 음반을 발표한데 있다고 여겨진다. 그의 음반들은 Nimbus, Pearl , Ivory 등 마이너 레이블에서 발표되었고, 그나마 그 수량도 얼마되지 않는다.
11. Van Cliburn (1934 ~ 2013)
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음악적 연륜이 짧은 미국은 자신들의 음악적 자존심을 추켜세워 줄 사람을 절실히 원했다. 조지 거쉰의 재즈 풍 협주곡과 아론 코폴랜드의 서부 개척기를 떠올려주는 관현악곡에 그들은 열광하였다. 그리고 젊은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Van Cliburn)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1등을 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환호는 거의 광란에 가까왔다.
냉전 시대의 에피소드이겠으나 반 클라이번이 ‘동토의 제국’ 소련에서 차이코프스키 콩쿨의 1등을 차지했다는 것은 단지 한 명의 명민한 피아니스트의 탄생이 아니라 모스크바에 대한 문화적 침공을 성공시킨 사건이 되었던 것이다. 반 클라이번은 귀국 후, 지극히 미국적인 축제 형식인 화려한 퍼레이드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딴 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역시 그의 이름을 딴 거리를 고향에 만들기도 하였다.
12. Alfred Cortot (1877 ~ 1962)
1877년 스위스 태생으로 파리 국립음악원 교수를 지냄. 저서 '프랑스 피아노 음악' 등 피아노 음악을 연구한 학구적인 연주자. 첼로의 카잘스, 바이올린의 티보와 함께 카잘스 3중주단으로도 활동했으며,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지휘도 했던 연주자. 뛰어난 연주들이 많지만 특히 쇼팽 연주는 최고로 꼽는다. 어떤 곡이든 물 흐르듯 편안한, 그러면서도 개성이 드러나는 아름다운 연주는 진정 대가의 경지다.
13. Clifford Curzon (1907 ~ 1982)
클리포드 커즌(Clifford Curzon)은 1907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페르시아의 시장에서'로 유명한, 작곡가 케텔비의 조카로 13세 때 런던 왕립 음악원에 입학하여 찰스 레디(Charles Reddie)와 캐서린 굿슨(Catherine Goodson)에게 배웠다. 16세 때부터 헨리 우드에게 발탁되어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바흐의 3대의 쳄발로를 위한 협주곡으로 데뷔했다. 아르투르 슈나벨을 듣고 감명받아 베를린에서 1928~30년 동안 그에게 배웠으며 파리에서는 란도프스카와 나디아 불랑제에게 사사했다. 1926년 모교의 교수로 취임했으며, 1932년 영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생활을 시작했고 1939년에는 뉴욕에 데뷔했다. 젊었을 때는 현대 작곡가들의 작품도 연주했으나, 나이가 들면서는 거의 모차르트에서 브람스까지의 독일 고전-낭만 작품의 연주에 주력했으며 국민주의 작곡가들의 것은 다소 부차적이었다.
1937년부터 Decca에서 녹음을 시작했으며, CBS에서 녹음한 몇 예외를 빼면 1970년대 초반까지 거의 Decca에서만 녹음했다. 이 시기에 그는 박하우스, 아슈케나지, 굴다, 카첸 등과 함께 명실공히 Decca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다. 주로 유럽에서 활약했으며, 녹음도 거의 유럽 오케스트라 및 앙상블과 한 것이 대부분이다. 스튜디오 레코딩은 1972년까지 거의 끝났으며, 그 후는 주로 방송용 녹음만 남아 있다. 1977년 작위를 받아 Sir 칭호를 얻었으며, 1982년 9월 1일 런던에서 사망했다. 커즌은 결코 화려한 연주 생활을 보낸 연주자는 아니었지만, 평론가들 중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좋았던 시절의 Decca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음에 틀림없다.
14. Gyorgy Cziffra (1921 ~ 1994)
조르주 치프라는 헝가리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피아니스트로 아버지로부터 피아노를 지도받았고, 1930년 리스트 음악원에 입학했습니다. 그곳에서 리스트 이후 헝가리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떨치던 도흐나니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치프라는 국내 및 해외 연주 콘서트에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었고, 1955년 헝가리 예술가의 최고의 영예인 리스트상을 받았으며, 이는 작곡자 이외의 연주자에게 주어진 최초의 상이기도 했다. 50년대의 국내외의 정치적 혼란과 억압을 견디지 못하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연주 활동을 계속했으며, 말년에는 이렇다 할 만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쓸쓸하게 타계했습니다.
치프라는 리스트의 후예라고 찬사를 받을 만큼 스케일이 웅대하고, 경이적인 테크닉의 소유자로 평가된다. 슈만, 쇼팽 등 19세기 낭만파의 레퍼토리를 전문으로 했으며 특히 리스트 연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역량을 과시했다. 그는 강인한 팔의 스프링과 잘 단련된 손가락힘으로 예리하고 깨끗한 윤관, 힘찬 에너지를 응집하면서 거장풍의 연주를 들려주었으나, 때때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다혈질적인 성격과 지적인 성숙도가 떨어져 깊이가 요구되는 작품을 해석하는데 아쉬움도 있었다.
치프라의 대표적인 앨범은 리스트의 헝가리 광시곡집, 치프라 에디션을 꼽을 수 있다. 마자르족 특유의 토속적인 리듬감을 절묘한 루바토와 육중한 페달링을 동반한 힘찬 다이내믹으로 표출시킨 헝가리 광시곡은 집시의 후계자로 알려진 치프라의 진면목을 여실히 드러낸 열연이며, 이 음반은 디아파종지 선정 황금상을 받은 명연이다. 에디션은 낭만적 작품의 한계 밖에서 치프라의 진지하고 일관된 접근을 느끼게 하지만, 개성이 너무 강한 연주가 많아 기호에 따라 옥석이 뚜렷히 구별되기도 한다고 한다.
15. Christoph Eschenbach (1940 ~ )
독일 피아니스트·지휘자. 브레슬라우(지금의 폴란드령 브로츨라프) 출생. 본명은 Christoph Ringmann이다. 쾰른·함부르크에서 공부하고, 1962년 뮌헨국제콩쿠르에서 제2위로 주목받았다. 빈 고전파와 낭만파의 제한된 레퍼토리에만 익숙하지만, 부족한 제2차세계대전 뒤의 독일 피아노계에서는 중요한 존재이다. 1973년부터 시작한 지휘의 재능을 인정받아 1980년 취리히 돈바레관현악단 상임지휘자가 되어 1980년대 이후는 지휘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16. Edwin Fischer (1886 ~ 1960)
에드빈 피셔는 스테레오 녹음의 혜택을 받지 못한 모노랄 시대의 연주자다. 스위스 바젤 출생으로, 아버지가 오보이스트인 가정에서 태어나, 4세 때 피아노로 가 한 음을 치고 'G음이에요'라고 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10세 때 바젤 음악원에서 교육받고,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슈테른 음악원(Stern Conservatory, 현 베를린 음악원)에서 리스트의 저명한 제자였던 마르틴 크라우제(Martin Krause)에게 사사했다. 그는 1905년 음악원을 졸업하자마자 모교의 교수로 취임했다. 교육자로 일생 봉사했으며, 다양한 작품의 원전에 의거한 편집 작업 외에 작곡가로 가곡, 피아노 소품 등을 남겼으며, 모차르트나 베토벤 협주곡의 카덴차를 쓰는 외에 편곡도 많다. 지휘자로서는 1926년에 뤼벡 음악협회, 1928년 뮌헨 바흐 협회의 지휘자로서 바흐 작품의 지휘에 노력했고, 피셔 실내 관현악단을 창설하여 연주여행했다.
2차 대전 때는 독일에 거주했지만, 나치 협력의 혐의는 없으며, 인간적으로도 주위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었다고 한다(리파티가 루마니아에서 스위스로 탈출할 때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카라얀이 대전 종료 직후 이탈리아에서 곤경에 빠져 있을 때 익명으로 식량을 보내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1942년, 그는 연합군의 폭격으로 독일의 집이 폭격받자 스위스 뤼체른 호반으로 이사하고 스위스에 귀화했으며 뤼체른 음악제의 지휘자로서도 활동했다. 최만년까지 거장으로 존경받았으나, 말년엔 고혈압과 관절염으로 고통받았고, 55년 이후는 무대에서 은퇴해 뤼체른 음악원에서 가끔 가르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으며(이래서 그의 스테레오 녹음이 없다), 생애의 마지막 몇 달은 거의 불구가 되다시피 했다. 1960년 1월 24일 취리히의 병원에서 타계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뛰어나서 데무스, 바두라-스코다, 바렌보임, 브렌델 등이 그의 제자이다. 그의 피아노 연주는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바흐에서 독일 낭만파까지의 레파토리가 약간 있을 뿐이지만(내가 조사한 한에서는 푸르트뱅글러까지 넣더라도 단지 11명 뿐이다), 그의 레파토리는 실제로는 훨씬 넓어 쇼팽은 물론이고 부조니나 쇤베르크 등의 현대 음악까지 포괄하고 있다. 레코드로 판단하는 한 그의 음악은 조금 기교가 부족한 면은 있으나, 음색은 실로 풍부하여 현대의 기교파 피아니스트들에서는 도저히 찾아보기 힘든 매력이 있다.
17. Samson Francois (1924 ~ 1970)
6살 때,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마스카니(Mascagni)에게 인정받고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그의 지휘로 처음 무대에 선 이래 스위스, 오스트리아, 독일, 유고슬라비아를 순회하면서 연주회를 열어 [피아노의 신동(神童)] 이라는 찬사를 받아 20세기에 출현한 피아니스트로서는 보기 드문 천재형의 연주가로 분류되는 인물, 이름은 상송 프랑소와이다.
7살에 베오그라드 음악원에 입학한 이래 니스 음악원, 파리의 고등음악사범학교(에꼴 노르말 드 무지크), 파리 음악원을 차례로 다녔고, 모든 음악원에서 예외 없이 1등상을 휩쓸었다. 1943년에 열린 제 1회 롱 티보 국제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획득함으로서 그의 천재적 능력을 확인 받은 이후 프랑소와는 명실상부한 제 1급의 피아니스트로서 눈부신 경력을 쌓아 갔다. 게다가 그 즈음의 프랑스 피아노界는 코르도가 세상을 떠난 뒤여서 상대적으로 프랑소와의 존재는 돋보였던 것도 사실이다.그러나, 불행하게도 46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버려 당시 프랑스 음악계는 물론 전세계의 음악계를 놀라고 슬프게 했던 것은 지금도 음악사의 큰 사건의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들이 거의 쇼팽 전문가이긴 하지만 프랑소와는 그 중에서도 가장 우뚝 선 쇼팽 스페셜리스트로 평가하고 있다. 그는 생전에 쇼팽의 모든 피아노 작품을 레코드에 수록하는 위업(偉業)을 달성 했을 뿐 아니라 그의 레코드 하나하나가 오늘날에 와서도 중요한 연주해석의 잣대가 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프랑소와의 쇼팽은 자유분방한 즉흥성과 환상의 아름다움으로 연주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러한 개성을 다른 말로 하면 '시적(詩的) 감성의 연주'라는 표현이 된다.
18. Nelson Freire (1944 ~ )
1960년대 말경 겔버, 아르헤리치, 바렌보임 등 남미 출신의 같은 세대의 피아니스트들이 급속히 대두하여 국제적인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프레이레 역시 그 중 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누나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뒤에 오비노와 브랑코를 사사했다. 56년 12세 때 리우데자네이루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이듬해 영국으로 유학하여 자이들호퍼 아래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했다. 64년에 비아나 다 모타 국제 콩쿠르에 우승하고 유럽에 데뷔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앞서 말한 아르헤리치, 겔버, 바렌보임 등에 비교하면 어느 정도 순수한 느낌도 들지만 강렬한 개성 면에서는 그들만큼 현저하지 않다. 그러나 그것을 충분히 보충하고도 남을 만한 고도의 기교, 정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내적인 충실, 그리고 작품에 파고드는 깊이가 라틴적인 다혈질과 자연스럽게 융합하여 그의 독자적인 풍부한 음악세계를 구성하고 있다
19. Andrei Gavrilov (1955 ~ )
1955년 모스코바 출생.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하고(당시 2위는 한국의 정명훈), 그 해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초대됨으로써 화려하게 국제무대에 데뷔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 가브릴로프가 초대된 것은 당초 출연예정이었던 리히터(S. Richter)의 갑작스러운 유고 때문에 대타로 불려간 것이었는데 그 연주가 너무도 성공적인 것이어서 문자 그대로 ‘신데렐라 스토리’가 만들어진 셈이다. 이후 가브릴로프는 그야말로 가장 눈부신 스타의 길을 걸었다.
1976년엔 런던에 데뷔했고, 1978년엔 베를린 필하모니커와 유럽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이듬해 겨울, 베를린 필과 함께 하기로 했던 공연이 갑자기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무려 5년간이나 그는 국제무대에서 사라진다. 소련정부에 의한 5년간의 감금생활. 외국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소련정부를 공공연히 비판한 게 화근이었다.
1985년, 고르바쵸프에 의해 해금된 가브릴로프는 미국 카네기홀에 데뷔하면서 성공적으로 재기한다. 뉴욕 연주 때 뉴욕 타임스가 그에게 보낸 격찬이 화제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가브릴로프는 미국의 주요 도시들과 유럽에서 활발환 연주활동을 펼쳤다. 1989년, 가브릴로프는 독일로 망명한다. 그동안의 `자유와 저항'의 종착점이자 좀 더 높은 비상을 위한 출발점이었다.
음반은 EMI 레이블로 발표하고 있다. ‘그라모폰 상’을 비롯한 유수한 음반상들을 받았고, 1998년엔 필립스(Philips)가 선정한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0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음반계약을 하면서 EMI를 떠났고, 쇼팽, 프로코피에프 , 슈베르트, 바흐, 그리그의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음표들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느낌을 주는 가브릴로프의 탄력있는 연주법은 특히 리스트와 러시아 작품 연주에서 눈부신 빛을 발해 “시프라 이후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평을 받고 있다.
20. Walter Gieseking (1895 ~ 1956)
발터 기제킹은 프랑스 리용(Lyon)에서 태어났지만, 부모는 모두 독일인이며 국적도 독일이다. 어릴 때는 주로 부모에게 피아노의 기초만 배웠고, 정식 음악 교육은 1911년 어머니의 고향인 하노버(Hannover)로 이주하면서 시립 음악원에 입학하여 카를 라이머(Karl Leimer)에게 사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어릴 때 벌써 슈만 '환상곡' 등을 공개 연주했다니 재능은 타고난 모양인데, 음악원 입학은 16세 때니 출발이 결코 빨랐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과 5년 후에 하노버에서 리스트 협주곡 1번으로 데뷔를 하면서 프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1차 세계 대전 후에는 유럽 연주여행을 시작할 정도로 인정받았다. 1922년에는 roll 녹음을 시작했고, 26년 2월 22일에 시작한 미국 연주여행으로 절찬받았다. 파리 데뷔는 1928년이었다. 이 시기부터 특히 프랑스 인상파 음악의 연주로 주목받았는데, 그의 연주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드뷔시와 라벨의 연주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왜 나치 치하에 남아 있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비록 그가 두드러진 나치 찬양 행위는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때문에 1948년 초반까지는 연주 활동 자체를 금지당했으며, 1949년 전후 미국 첫 방문으로 카네기 홀 연주가 계획되어 있었으나 미국 재향 군인회의 항의 시위 때문에 연주를 취소해야만 했다. 1953년에는 카네기 홀(4월 22일)을 시작으로 미국에 다시 등장했으며, 1956년 봄 약 2개월 동안 연주 여행하여 절찬을 받았다.
그는 그의 두드러진 암보 능력을 이용하여 매우 바쁘게 연주 여행을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두 번이나 교통사고를 당했다. 첫 사고는 그리 크지 않았던 모양이나, 1955년의 둘째 사고는 동행했던 부인을 현장에서 잃었고 독일 신문에 부고기사가 났을 정도로 매우 큰 사고였다. 그 자신도 재기 불능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으나, 운좋게 다음 해 봄에 완전히 회복하여 연주를 재개했다. 그러나 이런 바쁜 스케줄의 후유증 때문인지, EMI의 런던 애비 로드 3번 스튜디오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녹음하던 중 갑자기 격렬한 복통을 호소했다. 바로 근처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으나 예후가 좋지 못해 10월 26일 타계하고 말았다. 사인은 급성 췌장염이었다. 마지막 녹음 세션은 10월 17~22일에 있었는데, 맨 마지막 녹음은 베토벤 소나타 10곡 외에 쇼팽의 '뱃노래'와 '자장가'였다고 한다.
그의 음악은 '순수함, 간소하고 정확한 스타일, 예리한 통찰력, 다채롭기 이를 데 없는 뉘앙스'로 요약할 수 있다. 악보의 정확한 재현이 중요한 목적 중 하나인 만큼 결코 악보를 벗어나는 과장된 표현은 없는데, 그의 연주를 개성 있게 들리게 해 주는 가장 큰 요인인 그의 음색은 정말 훌륭하다.
21. Emil Gilels (1916 ~ 1985)
1916년, 에밀 길렐스는 우크라이나 지방 오데사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모두 음악가였으며 음악적 분위기의 가정에서 6살부터 야콥 트카흐(yakob Tkach)에게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3세가 되던 1929년에는 최초의 공개 리사이틀을 가졌다.
1930년, 길렐스는 오데사 음악원에 입학하여 베르타 라인크발트(Berta Reingbald)교수에게 사사하였다. 라인크발트 교수와의 수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길렐스는 우크라이나의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게되는데 특히, 17세가 되던 1933년에는 전 소련 음악콩쿠르에서 우승을 하였다.
1935년, 오데사 음악원 졸업과 함께 모스크바로 거처를 옮겨 전설적인 피아노 교사인 하인리히 노이하우스(Heinrich Neuhaus)의 문하에서 1937년까지 피아노 공부를 하였다. 그 이듬해, 1936년에는 브뤼셀에서 이자이 국제 콩쿠르에서 아르투로 베네디티 미켈란젤리(Arturo Benedetti Michelangeli)와 모라 림파니(Moura Lympany)같은 피아니스트들과 경쟁하여 우승을 하였으며 같은해, 빈 콩쿠르에서 야포크 플리어(Yakov Flier)에 이어 2등을 차지하였다.
1944년 12월, 2차대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무렵 길렐스는 모스크바 콘서버토리 그레이트 홀에서 프로코피에프(Prokofiev)의 "피아노 소나타 8번"을 초연하는 영광도 안았다. 1945년에는 바인베르트의 피아노 오중주의 초연에 참여했고 1946년에는 유명한 스탈린상의 수상자가 되기도 하였다.
1947년부터는 유럽 콘서트 투어를 시작하였는데, 길렐스는 구소련의 음악을 서방 세계에 알린 최초의 아티스였다. 1954년 파리 데뷔에 이어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서 유럽 콘서트 투어를 가졌고 1955년에는 구소련 아티스트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시카코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며 데뷔 무대를 가졌다. 그의 말년에는 해외 콘서트 투어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그의 고국 러시아에서 1952년부터 재직한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후진 양성에 정성을 쏟았고. 1961년, 1962년 그리고 1966년에는 레닌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1985년 10월 14일에 에밀 길렐스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녹음을 눈앞에 두고 안타갑게 타계하였는데, 1980년대에 녹음한 이 베토벤의 소나타들의 녹음과 1970년대에 오이겐 요훔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2번 등은 음악계의 귀중한 유산으로 남았있다.
강인한 손가락 힘에서 뿜어나오는 강인한 터치는 "강철 타건"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의 힘있는 연주를 설명하고 있으며 여기에 그의 예민한 감각에서 나오는 뛰어난 섬세한 기교와 정연한 질서는 그의 힘있는 연주에 더욱더 완성도를 높혔다. 특히, 에밀 길렐스는 바흐, 스카를라티 등의 바로크 음악에서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의 고전파 음악, 쇼팽, 슈만, 리스트 등 낭만파 음악, 생상스, 드뷔시 등 프랑스 음악, 차이코프스키,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등의 러시아 음악과 프로코피에프의 현대음악 까지 광범위한 레퍼토리로 규범이 될만한 많은 명연을 남기기도 하였다.
22. Leopold Godowsky (1870 ~ 1938)
폴란드 출생의 미국 피아니스트·작곡가. 9세 때 고향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 13세부터 2년 동안 베를린고등음악학교에서 공부했다. 1884년 미국 순회공연을 하고, 2년 뒤 유럽으로 돌아와 87∼90년에 생상스에게 사사했다. 90년 두번째 미국 순회공연 뒤 필라델피아음악원, 이어서 시카고음악원의 피아노과 교수를 지냈다. 1900∼09년 베를린에 살면서 연주 활동을 하였고, 1909∼12년 부조니의 후임으로 빈음악원 피아노과 주임이 되었다.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연주 및 교육면에서 활약했다. 연주회용 연습곡과 교향적 메타모르포제 등 많은 피아노 음악작품이 있고, 특히 쇼팽연주자로서 정평이 나 있다.
23. Glenn Gould(1932 ~1982)
글렌 굴드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난 피아노 연주자이다. 12세에 토론토 왕립음악원 졸업 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지휘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함으로써 유럽 악단에도 데뷔하였다.
그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건반악기 음악에 대한 걸출한 해석자로서 유명하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놀라운 기술적 능숙함과 함께 바흐 음악의 대위법적 텍스쳐를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는 능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굴드는 대부분의 낭만주의 피아노를 거부했으며 사춘기 이후 리스트, 슈만, 쇼팽을 피했다. 그의 녹음 음반은 대부분 바흐로 채워져 있기는 했었지만, 베토벤, 모차르트, 하이든, 브람스, 전 바로크 시대 작곡가인 얀 피에테르존 스벨링크, 20세기 작곡가인 파울 힌데미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을 포함하여 가지각색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었다. 굴드는 갖가지 기행으로도 유명했다. 비정통적인 음악 해석법, 악기를 연주할 때의 버릇에서부터 삶의 양상, 개인적 행동거지에 이르기까지 기인적인 면모를 보였다.
1964년, 그의 나이 31세 때 라이브 공연을 중단하고 스튜디오에서의 녹음과 다른 프로젝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는 작가, 작곡자, 지휘자, 방송인이기도 했다. 그는 음악 잡지에 음악 이론을 논하며 그의 음악 철학을 나타내는 수많은 기고를 했다. 작곡자로서의 면모는 눈에 덜 띄는 편인데, 수는 적었고 많은 작품들이 미완성인 채 남겨졌다. 그의 나이 50이 넘었을 때 그는 피아노를 그만두고 지휘와 다른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방송인으로서 굴드는 스튜디오 연주에 대한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에서부터 라디오 다큐멘터리에 이르기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24. Friedrich Gulda (1930 ~ 2000)
굴다는 1930년 빈에서 아마추어 연주가인 교육자 집안에 태어났다. 7세 때부터 롤크스 음악원의 펠릭스 파초프스키(Felix Pazofsky)에게 사사하고, 12세에 빈 음악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여기서는 명교수 브루노 자이들호퍼(Bruno Seidlhofer)에게 피아노를, 루돌프 제르킨의 스승이기도 한 요제프 마르크스(Joseph Marx)에게 음악 이론을 배웠으며, 1946년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 우승하여 전후 빈의 무대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비슷한 때 데뷔한 외르크 데무스(Jörg Demus), 파울 바두라-스코다(Paul Badura-Skoda)와 함께 빈의 삼총사라는 이름을 얻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굴다는 셋 중에 가장 젊었다). 우승 다음 해인 1947년부터 본격적인 연주 활동을 시작했으며, tape 녹음이 본격화한 1949년에 Decca와 계약했다.
그는 1950년 카네기 홀 데뷔에서 성공하여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으며, 그 즈음부터 장기인 베토벤의 레코드로 음반 시장에서도 알려졌다. 젊었을 때부터 베토벤 연주로 유명했으며, 박하우스나 켐프의 뒤를 잇는 정통 독일-오스트리아계의 베토벤의 명수로 불렸다. 매우 탁월한 기교에 뒷받침된 빠르고 활기가 넘치는 베토벤의 연주는 지금까지도 한 번은 들어 볼 가치가 있다. 그 외에는 바흐와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연주가 유명한데, 스케일이 큰 모차르트는 특히 정평이 있었다. 그는 젊었을 때는 의외로 쇼팽, 드뷔시와 라벨 같은 프랑스계 음악도 잘 연주했으며, 독일-오스트리아 음악에 자신의 레파토리를 한정시킨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만년까지 권위에 도전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빈 음악 아카데미에서 받은 베토벤 링(Beethoven Ring)을 아카데미의 경직성에 항의하여 반납해 버렸으며, 콘서트 연미복 대신 캐주얼 차림으로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런 그의 태도는 '테러리스트-피아니스트'라는 별명을 붙게 했으며, 그의 녹음을 인기 있게 하는 데는 불행히도 선입견과 장벽으로 작용할 때가 많았다. 특기할 점은 50년대 후반부터 재즈에 관심을 쏟아서 자작의 재즈곡 연주를 리사이틀에 넣기 시작했는데, 찬반 양론을 불러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는 만년에 장난으로 자신의 부고 기사를 내고 모인 문상객들 사이에 천연덕스럽게 나타나 사람들을 황당하게 만들었다고 하는데, 70세 생일을 약 5개월 남긴 2000년 1월 27일 심장 마비로 '진짜로' 사망했다.
이미 그는 죽었으며, 80년대 이후에는 클래식 레파토리의 녹음이 그다지 많지 않다. 만년에 녹음한 실황들은 재즈 레파토리나 자작곡 및 편곡 등이 많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그의 고전음악 레파토리의 연주력을 알려면 주로 50~70년대의 '약간 오랜' 녹음들로 접할 수밖에 없는 점이 다소 아쉽다.
25. Ingrid Haebler (1929 ~ )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 빈 출생. 어려서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8세 때 연주회를 열었다. 그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이어서 빈음악원을 졸업하고 다시 제네바음악원에서 배운 후 파리에서 M.롱에게 사사하였다. 1954년 뮌헨 국제콩쿠르에서 1위를 획득,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해졌으며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및 소나타 전곡을 레코드에 취입, 모차르트 연주자로 알려져 있다.
26. Clara Haskil (1895 ~ 1960)
하스킬을 소개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에피소드는 그녀의 천재성에 관한 것들이다. 가령 그녀의 나이 여섯 살 때 하스킬은 모차르트 소나타의 한 악장을 단 한 번 듣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따라 쳤다고 한다. 물론 악보를 전혀 알지 못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뿐이 아니라 그녀는 그 악장 전체를 다른 조로 바꾸어서 연주했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그녀의 천재성에 대해 뭐라고 더이상 말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그 자신도 천재 중 하나라고 분류되곤 하는 찰리 채플린은 하스킬을 만나고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살면서 진정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한 사람은 처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누구보다도 현격히 차이나는 두뇌의 소유자는,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하스킬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스킬이 만약 20세기 초엽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연주자로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그녀의 음반은 플래티넘은 우습게 넘기지 않았을까? 그러나 신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하도록 하지 않는다.
하스킬은 18세(1913년)에 발병하여 숨지던 그날(1960년)까지 일생동안 병마와 전쟁, 고독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하루아침에 빼앗아간 병은‘세포경화증’(Sclerosis)이라는, 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 버리는 불치의 병이었다. 그녀는 이후 4년간 몸에 깁스를 댄 채 살아야 했으며 당연히 연주도 할 수 없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해야 할 시기에 그녀는 온몸에 깁스를 댄 채 누워있어야 했다. 불행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 병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아름다움을 잃어 버렸다. 마치 저주에 걸린 공주처럼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고, 그녀는 꼽추가 되어 버렸다. 20대의 나이에 그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병마와 싸워 일어난 그녀는 다시 연주활동을 시작했고, 다시 예전의 인기와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복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녀는 유태인이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그녀는 남프랑스의 마르세유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극도의 공포와 피곤으로 인한 뇌졸증을 일으켰다. 실명의 위기에 부닥쳤으며 각종 신경계에도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유태계 의사가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달려왔고, 어려운 수술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스킬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한 번 돌아섰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그녀는 전쟁 기간 동안 마르세유 근교에 숨어 지내야 했다. 당시 그녀에게는 바이올린 한 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다.
하스킬은 평생을 고독과 싸워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고집세고 편협한 사람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당대의 연주자들이 그녀에 대해서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본 데에는 그녀의 한없는 겸손함과 인격에서 비롯된 바가 크기 때문이다. 하스킬은 일찍부터 일류 음악가들과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코드 녹음은 1947년 그의 나이 52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하스킬의 음악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였고, 그녀의 연주는 명징했으며 아름다웠다. 어떤 꾸밈이나 과장없이 다만 마음을 다해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27. Dame Myra Hess (1890 ~ 1965)
영국의 피아니스트. 바흐·모차르트·베토벤·슈만의 해석으로 유명하다. 길드홀 음악원과 왕립 음악원에서 저명한 선생 토비아스 마테이에게 배웠다. 팔의 무게와 근육 이완과 관련된 마테이의 터치 이론은 그녀의 연주 양식 확립에 도움을 주었다. 1907년 런던에서 데뷔했으며, 잠시동안 사촌 아이렌 샤러와 듀엣 리사이틀 활동을 했다. 1939~46년 독일의 공습이 있었던 동안에도 런던 사람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내셔널 갤러리에서 매일 연주회를 개최했다. 젊은시절에는 친숙한 실내악 연주를 많이 선보였으며, 특히 슈만의 작품을 잘 소화해냈다. 나이가 들면서 보다 강력한 연주 양식을 추구하여 베토벤과 브람스의 협주곡 연주에서 그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1941년 대영제국의 데임 작위를 받았다.
28. Josef Hofmann (1876 ~ 1957)
호프만을 가리켜 스승인 모조코프스키는 '그는 아무 것도 배울 게 없다'고 했고, 라흐마니노프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차 대전때 미국으로 이주한 그는 완벽한 테크닉과 풍부한 감수성, 넘치는 에너지로 미국 전역을 흥분시켰다. 라흐마니노프 3번 협주곡을 그에게 헌정했으나 손이 작아 연주하지 못한 이야기와 스타인웨이사가 그의 작은 손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그에게 선물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29. Vladimir Horowitz (1903 ~ 1989)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는 1904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엔지니어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로비츠는 1907년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에게 처음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912년 키예프 음악원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음악수업을 받게 되는데 이때 호로비츠는 피아노보다는 작곡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1917년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부유했던 가정환경이 몰락하면서 그는 생계를 위해 급히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키예프를 중심으로 작은 리사이틀을 열던 그는 1922년 카르코프에서의 연주회로 큰 성공을 거두게 되고, 계속해서 키예프와 모스크바로 이어지는 수많은 리사이틀을가지게 된다.
이어 1925년, 혁명의 혼란에 빠져있던 베를린에서 공연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서방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된다. 유럽흥행에 이어 1928년에는 토머스 비첨과 함께 뉴욕 데뷔무대를 가지게 되는데 이 또한 당시 미국의 청중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각인되었다. 후에 호로비츠는 토스카니니와도 협연하였으며 그 인연으로 인해 그는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하여 평생을 함께하게 된다.
그 무렵부터 호로비츠는 은퇴와 복귀를 반복하게 되는데 건강상의 이유로 네 번의 공백기를 가지게 된다. 1986년 여든의 나이를 훌쩍 넘긴 호로비츠는 DG와 전속계약을 맺으며 이전까지의 녹음에서 들려주던 음악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음악을 만들어 들려주었으며, 꿈에도 그리던 모스크바에서 연주를 가지게 된다. 이때의 연주는 DG에서 라는 제목의 영상물로 출판되었는데 단순히 뛰어난 연주를 넘어선 그 이상의 감동을 주는 연주로 기록된다. 1989년 호로비츠는 병석에서가 아닌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녹음을 편집하던 중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고 유언에 따라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묻히게 된다.
30. Byron Janis (1928 ~ )
미국 피아니스트인 바이런 야니스(Byron Janis)는 그가 병때문에 연주활동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28년에 태어나 7살때 뉴욕으로 와 조셉 & 로지나 레빈을 사사하고 43년에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으로 정식 데뷔하게 됩니다. 44년에는 같은 협주곡으로 로젤마린과 협연했는데, 그때 청중속에 있던 호로비츠가 야니스의 연주를 듣고는 초대하여 같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후 야니스는 성공적으로 아메리카와 유럽등지에서 데뷔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1960년에는 미국인 피아니스트로서 처음으로 소련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테크닉적 에너지와 감각, 그리고 꿈틀대는 분노의 힘, 낭만성 등이 야니스를 설명해 주는 단어들입니다.
31. Julius Katchen (1926 ~ 1969)
미국 피아니스트인 바이런 야니스(Byron Janis)는 그가 병때문에 연주활동이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피아니스트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1928년에 태어나 7살때 뉴욕으로 와 조셉 & 로지나 레빈을 사사하고 43년에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2번으로 정식 데뷔하게 됩니다. 44년에는 같은 협주곡으로 로젤마린과 협연했는데, 그때 청중속에 있던 호로비츠가 야니스의 연주를 듣고는 초대하여 같이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후 야니스는 성공적으로 아메리카와 유럽등지에서 데뷔하여 명성을 떨치게 되었고, 1960년에는 미국인 피아니스트로서 처음으로 소련에서 연주회를 갖기도 했습니다. 엄청난 테크닉적 에너지와 감각, 그리고 꿈틀대는 분노의 힘, 낭만성 등이 야니스를 설명해 주는 단어들입니다.
32. Wilhelm Kempff (1895 ~ 1991)
독일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특히 베토벤 및 슈만 등의 곡, 즉 정통적 낭만주의의 흐름을 채용하는 피아노음악의 해석에 뛰어났다. 위터보크 태생이며 음악학교의 교장이자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오르간의 연주에서도 소질을 보였고, 피아노 연주에서도 오르간적 색채를 보였다. 피아노는 베를린 고등음악학교에서 카를 발트에게서 배우고, 졸업할 무렵에는 피아노 및 작곡 두 과목에서 멘델스존상을 받았다. 20세 안팎부터 독주가로서 활약, 1924년에는 슈투트가르트 음악학교 교장에 취임하였다. 그는 결코 처음부터 명연주가적인 소질을 나타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음악에의 추구에 끊임없는 의욕을 보였고, 특히 베토벤 등 독일 고전음악에의 추구가 그의 음악적 테크닉을 개선케 하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되었다. 1951년, 파리에서 베토벤의 모든 소나타의 연속 연주회를 개최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 32곡, 그 중에서도 후기 작품의 연주에 뛰어나며,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슈만의 <환상곡 다장조>, 바흐의 여러 작품 등의 연주에도 뛰어났다.
33. Evgeny Kissin (1971 ~ )
키신은 1971년 모스크바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1개월 부터는 누나인 알라의 피아노에 맞춰 바흐의 음악에 허밍을 넣을 수 있었다 한다. 6세부터는 신동으로 불리며 그네신 음악원(Gnessin School of Music)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그의 유일한 피아노 선생인 피아니스트 안나 칸토르(Anna Kantor)의 제자가 됐다.
10세 때 키신은 울랴노브스크 교향악단과 함께 연주하며 데뷔했다. 이듬해에는 모스크바에서 첫 리사이틀을 가졌다. 13세인 1984년부터는 모스크바 콩세르바퇴르 대강당에서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쇼팽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연주, 녹음하여 자신의 재능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1987년 그는 영국에서의 데뷔 무대를 가졌다. 데뷔 무대였던 리치필드 축제(Lichfield Festival)에서 그는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에프(Valery Gergiev), 파이올리니스트 바딤 레핀(Vadim Repin), 막심 벤게로프(Maxim Vengerov)와 함께 연주했다.
1988년에는 베를리너 필하모니커의 신년 연주회에서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차이콥스키 피아노 콘체르토 1번을 연주했다. 1990년 9월에는 주빈 메타,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쇼팽의 두 개의 피아노 콘체르토를 연주하여 북미 지역에 데뷔했다. 또한 카네기 홀에서 첫 번째 리사이틀을 가졌다. 1997년에는 런던의 더 프롬스(The Proms)에서 최초의 피아노 독주회를 가졌으며, 2002년에는 영국 시민이 됐다. 1997년의 프롬 연주회를 바탕으로 그의 일대기를 담은 DVD '음악이라는 재능'(The Gift Of Music)이 발매되기도 했다.
그동안 키신은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각지에서 다양한 리사이틀 투어를 가졌다. 그는 유명 지휘자들이 지휘하는 수많은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다니엘 바렌보임, 콜린 데이비스, 발레리 게르기에프, 카를로 마리아 지울리니 등 유수 지휘자들이 그와 연주했다.
34. Kocsis Zoltán (1952 ~ 2016)
헝가리 태생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3세에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하였다. 1956년 케르테스 스트리트 초등학교에서 심레차니 마그다에게 솔페지오 교육을 받고, 1963년 버르토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퓔레프 터마시와 배웠다. 1966년 수거르 레죄와 쇼프로니 요제프의 작곡 수업도 받았다. 1968년 리스트 음악원으로 진학하여 러도시 페렌츠에게 피아노를, 커도셔 팔, 쿠르타그 죄르지에게 작곡을 사사하고 19세에 학위를 취득하였다. 18세에 헝가리 방송 주관 베토벤 경연대회에서 우승하고, 1971년 레헬 죄르지의 지휘로 헝가리 방송 교향악단과 미국 순회공연을 하였다. 1975년 일본에서 도야마 유조의 지휘로 NHK 교향악단과 협연하였다. 잘츠부르크, 에든버러, 프라하 등 세계 곳곳의 여름 음악제에 참여하였다. 25세에 헝가리 정부로부터 코슈트 상을 수상하였다. 1976년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에서 강사가 되었다. 1970년대 시몬 얼베르트가 창설한 신음악 스튜디오에 소속되어 자작품이 공연되었다.
훙가로톤과 아르모니아 문디, 데논에서 산발적으로 시작한 녹음 경력은 1980년 필립스 클래식스와 독점 계약을 맺어 바르토크 피아노 전곡 음반이 출시되고 추후 데카로 편입되었다. 1983년 피셰르 이반과 함께 부다페스트 축제 관현악단을 창단하였다. 그들과 함께 녹음한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집 음반은 에디손 상을 수상하였다.
1987년부터 창작 활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버르토크의 관현악용 피아노 총보 몇 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였고, 케이지풍의 교향시 《체르노빌 '86》은 세계적인 찬사를 받았다. 2010년 쇤베르크의 오페라 《모세와 아론》 3막의 연주용 판을 완성하였다. 1997년 헝가리 국립 필하모니 관현악단 음악감독이 되어 2003년 18년 만에 미국 각지로 순회공연을 재개하였다. 1990년 드뷔시 녹음 《영상》은 그라모폰 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1월 칸 음반 및 음악 출판 국제 시장에서 평생업적 상이 수여되었다. 2002년 프랑스 문화장관이 수여하는 예술문예훈장 기사 작위를 받았다. 2005년에 다시 코슈트 상을 수상하였다.
35. Dinu Lipatti (1917~ 1950)
루마니아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부쿠레슈티에서 태어나 그곳의 음악원에 입학, 1934년 빈의 콩쿠르에서 2위를 획득했으나, 이때 그의 1위를 주장하고 심사원의 직책을 사임한 코르토에게 초빙되어 파리로 나갔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루마니아로 귀국하였다가 나치의 손을 피해 스위스에 숨어 있었다. 2차대전 후 유럽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백혈병에 걸려, 1950년 브장송에서의 리사이틀을 마지막으로 33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의 연주는 굉장한 테크닉이 정확히 컨트롤되고, 시적 표현과 지적 표현이 훌륭한 균형을 형성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레퍼토리는 스카를라티나 바흐에서 시작되어 고전, 낭만, 근대에 걸쳐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쇼팽, 모차르트, 슈베르트 등의 작품이 깊은 조성 등으로 훌륭하다는 평을 들었다.
36. Radu Lupu (1945 ~ )
6세 때부터 피아노 교습받았는데 재능이 뛰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이미 작곡하여 작곡상을 수상했다. 12세 되던 1957년에는 고국에서 첫 피아노 연주회를 가지면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다. 그후 6년간 플로리아 무지체스쿠(Floria Musicescu) 밑에서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1963년 장학금으로 모스크바음악원에 들어가 음악을 공부하면서 1966년 반 클라이번(Van Cliburn) 국제피아노콩쿠르에 참가하여 우승했고, 이듬해에는 에네스코국제콩쿠르에 다시 1위로 입상했다.
1969년 권위 있는 리드국제피아노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본격적으로 연주활동을 시작, 런던 무대에서 첫번째 연주회를 가져 격찬을 받았다. 그후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여러 차례 연주회를 가져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긴 호흡과 안정된 건반 터치를 사용하여 재기 넘치는 연주솜씨를 보여주며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의 피아노 작품 분야의 뛰어난 해석자이며, 음반 녹음으로도 크게 성공한 피아니스트이다.
37. Arturo Benedetti Michelangeli (1920 ~ 1995)
바이올린 제작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브레시아 태생으로, 4살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였다. 브레시아의 벤투리 음악학교에서 밀라노 음악원으로 진학하여 주세페안포시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939년 제1회 제네바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그의 활동은 한때 중단되었으나, 2차대전 후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 최초로 연주여행을 하였고, 이 연주의 성공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는 좀 완벽주의 기질이 있었는데, 연주회도 거의 열지 않았으며, 또 연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내키지 않을 때는 바로 앞에서 삭제·취소하는 일도 있었으며, 레코드도 매우 적다. 끊임없이 자기의 음빛깔과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하여 국외의 연주회에서도 반드시 자기의 피아노와 조율사(調律師)를 대동했다. 레퍼토리 범위는 넓으나, 특히 라벨 등 근대적 작곡가의 연주에 뛰어났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스승이기도 했다.
38. Murray Perahia (1947 ~ )
뉴욕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미국인. 5세에 피아노를 시작하고 매네스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이후는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17세 때 말보로 음악제 여름강좌에서 호르소프스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급속히 꽃을 피워 1967년 말보로 음악제에 출연하고서 주목 받았다. 72년에는 뉴욕 P와 협연하고 다시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국제적으로 명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고전파에서 낭만파까지의 작품을 장기로 하며, 풍부한 감수성이 특징이다.
39. Maria João Pires (1944 ~ )
포르투갈의 피아니스트. 뉴욕에서 태어난 스페인계 미국인. 5세에 피아노를 시작하고 매네스 음악학교에서 공부했지만 이후는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다. 17세 때 말보로 음악제 여름강좌에서 호르소프스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급속히 꽃을 피워 1967년 말보로 음악제에 출연하고서 주목 받았다. 72년에는 뉴욕 P와 협연하고 다시 리즈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국제적으로 명성을 인정받게 되었다. 고전파에서 낭만파까지의 작품을 장기로 하며, 풍부한 감수성이 특징이다.
40. Mikhail Pletnev (1957 ~ )
음악가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7세부터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1973년 16세 때 파리의 쥬네스 뮤지컬 콩쿠르에서 제1위, 77년에는 전(全) 소련 피아노 콩쿠르에서 제1위, 또 78년 21세 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제1위가 되어 세계 무대에 첫 발을 내딛었다. 피아니스트로서 고도의 기술에 덧붙여 작곡가로서의 소양도 있어 차이콥스키 콩쿠르의 갈라 콘서트에서는 스스로 편곡한 차이콥스키의 발레 음악을 연주하여 화제가 되었다. 작곡가로서의 이러한 측면은 그의 연주에서 두드러져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읽기, 구성감의 확실함은 다른 신예 피아니스트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41. Maurizio Pollini (1942 ~ )
아버지는 저명한 건축가, 지노 폴리니이다. 5 살에 피아노를 시작하여 1960년에 18 살의 나이로 출전한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심사 위원 만장일치로 우승하였다. 심사 위원장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기교적으로는 우리의 누구보다 능숙하다"라고 격찬한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그 후 연주 활동을 멀리하고 아르투로 베네데티 미켈란젤리 밑에서 연찬을 쌓는다.
1968년 다시 데뷔 후 가장 친한 친구인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협연하고 탁월한 기술과 곡마다 음색이 변하는 분석력, 무엇보다 아름다운 음색이 세계에 반향을 일으켰다. 젊은 날의 영리한 연주에서 원숙한 피아니즘이 되고 있는 현재에도 "어떻게 작곡가가 원하는 음악에 접근할까"를 의식하고 악보에 충실히 접근한다. "건축과 회화 등과 달리 현대 음악은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지 않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고 문제를 인지하여 루이지 노노와 피에르 불레즈 등 20 세기 이후의 음악도 연주한다.
1993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와 1995년에 스스로 기획한 '폴리니 프로젝트'에는 고전 작품과 현대 음악을 구성한 개성적인 공연이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2012년부터 베토벤 소나타와 4 개의 현대 곡을 조합한 새로운 기획을 시작하였다. 녹음도 쇼팽의 야상곡집 (2007 년 그래미상 기악 부문 등 수상 다수)과 최초의 바흐 녹음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1 권(2009) 등 의욕적으로 피아노를 추구하고 있다. 2014년에는 베토벤 소나타 op. 31, 49 (도이체 그라모폰)를 발매하여, 1975년부터 시작한 베토벤 소나타 전집을 완성하였다.
42. André Previn (1929 ~ 2019)
미국의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작곡가. 독일의 유대인 집안에서 안드레아스 루트비히 프리빈(Andreas Ludwig Priwin)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1938년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하였다. 그는 1943년 미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1946년 할리우드 MGM의 스튜디오 녹음실에서 경력을 시작했으며 피아노 · 지휘 · 작곡을 전공한 이후 1948년 할리우드에서 앙드레 프레빈이라는 이름으로 영화음악을 작곡하며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고전 음악 및 영화 음악 작곡과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며, 1967년 휴스턴 교향악단, 1968년 런던 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어 이름을 알렸다. 그 후 피츠버그 교향악단, 로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오슬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으로 옮겨 다니며 주요 관현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활동했다.
43. Sviatoslav Richter (1915 ~ 1997)
소련의 피아노 연주자로, 20세기 가장 뛰어난 연주자로 평가받고 있다. 해석의 깊이와 레파토리의 넓이, 탁월한 연주법으로 유명하다.우크라이나 지토미르 태생이며, 폴란드 태생의 독일인인 부친으로부터 피아노의 솜씨를 물려받고, 15세경부터 무용곡을 반주하였다. 23세 때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10년 동안은 겐리흐 네이가우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고, 1945년 소련 음악콩쿠르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60년 처음 미국을 방문하여 연주회를 가졌고, 이후 1962년 유럽을 돌며 연주회를 열어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연주자가 되었다. 연주에서는 중량감이 있으며, 따뜻하고 색채가 풍성하다. 손이 크고, 굵은 손가락으로 섬세한 뉘앙스를 내었다. 스케일도 크고 내용도 깊다.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드뷔시, 라흐마니노프,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의 작품 등 연주 범위가 넓다. 같은 곡이라도 때에 따라 치는 방식이 다르나, 어느 음반도 수준 이상이었다. 로스트로포비치와 함께 연주한 베토벤의 <첼로 소나타 전집>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44. Arthur Rubinstein (1887 ~ 1982)
폴란드에서 태어난 미국의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은 1887년 폴란드의 우치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유럽 국가 언어에 능통하는 등의 재능을 보였고, 특히 이미 2세 때부터 절대음감을 보였다고 하며 누나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피아노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이후 4세 경 루빈스타인의 아버지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요아힘을 소개해 주며 바이올린을 가르치려고 했는데, 루빈스타인은 바이올린을 배우기를 거부하고 화성과 다성 음악을 더 충실히 구현할 수 있는 피아노에 대한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제프 요아힘은 카를 하인리히 바르트에게 루빈스타인을 추천했고, 루빈스타인은 바르트에게 본격적으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레셰티츠키·브라이트하우트·파데레프스키에게도 사사하였다.
11세 때 시절이던 1898년 요제프 요아힘의 지휘로 모차르트의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일 제국 베를린 악단에 데뷔하였고, 이후 세계 각지에서의 연주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59세 시절이던 1946년 미국에 귀화했고,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힘있고 능숙한 기교와 깊은 음악성을 함께 지닌 그는 쇼팽 음악의 연주자로서 당대의 제1인자로 꼽혔다. 또한 고전 음악으로부터 근대 음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레퍼터리로 차이코프스키의 협주곡에도 능하다. 연주 스타일은 당당하며 열의에 차 있고 이해하기 쉽다고 평가됐으며, 쇼팽의 작품과 모차르트의 협주곡 뿐 아니라 비창, 월광, 열정 등 베토벤의 소나타도 훌륭하게 연주하였다.
45. Andras Schiff (1953 ~ )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생으로 5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아저씨를 따라 런던으로 건너가 조지 맬컴(George Malcolm)으로부터 쳄발로를 배웠으며, 다시 헝가리로 돌아와 1968년 부다페스트의 리스트음악원에 입학했다. 1973년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 4위(피아노), 1974년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 파이널리스트(피아노), 1975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 3위 등 수상경력이 다양하다. 1970년대 후반부터 많은 녹음을 남겼는데, 특히 1980년대의 바흐에 대한 성과는 주목할 만한 것으로 평가된다. J.S.바흐(Johann S.Bach)의 작품에 열의를 가지고 있지만, 너무 쉽게 연주했다는 비난과 개성이 없다는 비난도 받고 있다. 연주의 가장 큰 특징은 작품 전체를 조망하는 통찰력으로, 작품 전체의 구성을 중시하며 자신만의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특출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피아니스트라고 평가받는다.
46. Rudolf Serkin (1903 ~ 1991)
보헤미아 출생. 아버지는 러시아인 가수였다. 8세 때 가족과 함께 빈으로 이주, R.로베르트에게 피아노를, A.쇤베르크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0년부터 피아니스트로서 활약하고, 후에 장인이 된 A.부슈와는 이따금 조인트리사이틀을 가졌다. 그 뒤 장인의 아우 H.부슈도 참가한 제르킨 부슈트리오를 결성하고 33년에는 미국에서 데뷔, 39년 이후는 커티스음악원에서 교편을 잡았다.섬세하고 지적인 연주를 특징으로 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음악 연주에서는 당대 제1인자로 지목받았다.
47. Mitsuko Uchida (1948 ~ )
도호학원의 ‘어린이를 위한 음악교실’에서 마쓰오카 데이코(松岡貞子)에게 초보를 배운 후 1961년에 오스트리아 대사로 빈에서 근무하는 아버지와 동행하여 소녀 때부터 빈에서 자라며 빈 음악원에서 연찬을 쌓았다. 뮌헨, 베토벤 등의 국제 콩쿠르에 상위 입상 후 70년의 쇼팽 콩쿠르에서 일본인 최초로 제2위에 입상하여 주목을 모았다. 이것을 계기로 71년에 빈 톤퀸 스틀러 관현악단과 공연하며, 다시 잘츠부르크, 파리, 런던, 도쿄 등에서 리사이틀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72년에 런던으로 이주한 이래 그곳을 거점으로 연주활동을 전개하던 우치다의 이름을 다시 높인 것은 84년 영국 실내관현악단과의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다. 먼저 영국에서 열렸고, 도쿄, 파리, 암스테르담을 비롯하여 미국 등에서도 열린 이 시리즈로 국제적인 피아니스트가 됐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해석으로 유명하다.
48. André Watts (1946 ~ )
9세 때 필라델피아 관현악단과 공연하는 등 소년시절부터 활약했지만 16세 때인 1963년 갑자기 발병한 굴드의 대역으로 뉴욕 P의 정기연주회에서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면서 일약 각광을 받았다. 그 후 2년 정도 볼티모어의 피바디 음악원에서 배우며 미국 각지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64년에는 활동의 무대를 유럽으로도 넓혀 런던 교향악단과 베를린 필하모니아 관현악단 등 저명한 오케스트라와 공연하고 있다. 많은 레퍼토리 가운데서도 특히 리스트에 인기가 있으며, 혜택받은 체격을 살린 스케일 큰 연주가 많은 팬을 매료시키고 있다.
49. Alexis Weissenberg (1929 ~ )
불가리아 소피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어렸을 때부터 작곡가 판초 블라디게로프에게 작곡과 피아노를 배우고, 피아니스트로의 데뷔는 14세 때였다.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수용소에 보내져 고난의 나날을 보내지만, 이스라엘을 거쳐 미국으로 탈출한다. 그 후, 1946년 레오 케스텐베르크,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아르투르 슈나벨의 소개 편지를 지니고,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원에 입학한다. 현재에도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 올가 사마로프, 완다 란도프스카, 그리고 아르투르 슈나벨의 지도를 받았다. 졸업했을 때에, 바이센베르크는 각국에서 초대되었을 정도로 유명한 학생이 되어 있었다.
1947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권유로 참가한 레벤트리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여, 같은 해 조지 셀의 지휘로 뉴욕 필하모닉과 공연하며 화려하게 데뷔를 장식한다. 그리고, 1956년부터 약 10년간 자신의 음악을 재단련하기 위해 연주 활동을 접는다. 1966년 파리에서의 리사이틀로 기적적인 부활을 한다. 1965년에는 오케 팔크가 감독한 단편 영화에서 경이적인 기교로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를 연주한 영상에 충격을 받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에게 발탁되어, 1967년부터는, 베를린 필하모니 관현악단과 정기적으로 협연을 거듭한다. 이후 공연, 녹음을 적극적으로 하고 유명한 피아니스트로서의 지위를 얻는다.
초인적인 기교와 강력한 음향을 자랑하며, 산뜻한 연주 스타일로 청중에게 강한 인상을 준다. 초기 앨범에서는 초절적인 기교가 강조되었는데, 근래의 녹음에서는 가벼운 음색을 살린 입체적인 조형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50. Krystian Zimerman (1956 ~ )
폴란드 출신 피아니스트. 1956년에 폴란드에서 태어난 크리스티안 침머만은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우기 시작해 7살 때에는 야진스키(Andrzej Jasinski) 교수에게 정식으로 사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카토비체 (Katowice) 음악원에서 공부하여 장학생으로 졸업하고 여러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그리고 1975년 쇼팽 국제 콩쿠르에서 19살의 나이로 1위를 차지해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침머만은 도이치크라모폰과 녹음 계약을 맺고 서유럽과 미국, 일본 란틴아메리카를 무대로 활약하면서 그의 피아노를 직접 동반하며 전세계 연주여행을 다녔다. 그가 그의 피아노를 동반하게 된 것은 그가 음악을 배웠던 카토비체에서 얻은 피아노 건축 기술에 대한 나름대로의 지식과 함부르크에 있는 스타인웨이 피아노 사와의 영구적인 협력관계에 의한 것 때문이다. 현재 그는 부인과 두자녀와 함께 스위스에 거주하고 있으며, 연주와 실내악 활동, 그리고 학생 지도에 그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그는 세계적인 음반사인 도이치 그라모폰과 24년이 넘도록 계약을 유지하고 있으며 이 레이블을 통하여 그간 30여장의 음반을 출시하였고 세계적 권위의 음반상을 다수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