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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1903-1989)
1903년 10월 1일, 우크라이나의 케이프 태생.
아버지는 저명한 전기 기술자였다. 어머니가 피아니스트였기에 6세부터 어머니에게서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얼마 뒤엔 세르게이 타르노프스키에게 공부했고 12세에 키에프 음악원에 입학하여 안톤 루빈스타인의 수제자 페릭스 브루멘펠트에게 사사했고 그로부터 기술적인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었다. 특히 그에게서 배우면서 작곡에 큰 관심을 가져 장차 작곡가가 되려는 꿈을 품기도 했었다. 호로비츠의 삼촌 또한 당시 상당한 명성을 가지고 있는 음악학자였는데, 스크리아빈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관계로 어린 호로비츠와 스크리아빈을 자주 만나게 하였고, 이 때의 인연으로 호로비츠는 평생에 걸쳐 스크리아빈의 음악을 즐겨 연주하게 된다. 결과론적 이야기가 되겠지만 실제로 당시 별다른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엇던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작품들의 상당수가 호로비츠 덕분에 유명해진 측면도 있다. 17세에 뛰어난 성적으로 음악원을 졸업했다.
호로비츠의 음악가로서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사건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었다. 부유했던 그의 집안은 혁명으로 인해 완전히 몰락하게 되고 호로비츠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급히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게 된다. 키에프를 중심으로 작은 리사이틀을 가지던 호로비츠는 1922년 카르코프에서 연주를 가졌고 이것이 큰 성공을 거두어 계속해서 15번의 리사이틀을 열게 되었다. 그의 리사이틀은 모스크바와 키에프로 이어지면서 명성을 얻게 되고 1924년에서 25년에 걸쳐 11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23번의 리사이틀을 여는 등 70여회의 콘서트를 가지면서 초인적인 기량을 과시한다.
1925년엔 러시아를 떠나 독일로 갔다. 첫 해엔 무명의 피아니스트로 세월을 보내다가 1926년 어느 여류 피아니스트 대신 연주회에 출연하여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여 하룻밤에 이름을 떨치는 계기를 잡았다. 그 결과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되었고 가는 곳마다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1927년, 당시 최고의 흥행사였던 아더 짓슨에게 발탁되어 미국에 데뷔하게 된다. 당시 미국의 청중들에게 호로비츠라는 존재는 단순히 음악적인 차원을 떠나 매우 신선하고 충격적인 존재일수 밖에 없었다. 러시아라는 먼 땅에서 건너온 핸섬한 청년 호로비츠, 압도적인 기교, 폭발하는 듯이 강렬한 터치, 애매함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이 명쾌한 연주, 평론가와 청중들은 새롭게 등장한 호로비츠에게 완전히 매료되기 시작했으며 다음 해인 1928년 토머스 비첨과 함께 한 뉴욕 데뷔연주는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굳히는 계기가 된다. 이 연주회는 동시에 비첨의 뉴욕 데뷔이기도 했으며 프로그램은 차이코프스키의 1번 협주곡이었다. 1932년엔 토스카니니가 지휘하는 뉴욕 필과 협연하게되는 행운을 만나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이듬해에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와 결혼했다.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중 1936년에 건강에 손상을 입어 일체의 연주활동을 중지하는 비운을 당한다. 이 당시 토스카니니의 영향으로 인해 그의 음악이 내면으로 깊어지는 변화를 이룩하게 됐고, 1939년 파리에서 재기하게 된다. 이 재기 공연을 통해서 그는 거장적 풍모를 보여 주었고, 그 후에도 그의 음악은 계속 성장하였다. 1940년, 미국에 정주하기로 결심했으며, 1944년에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다.
1950년대에 와서 호로비츠의 예술활동은 정점에 올라서게 됐고 1953년엔 미국 데뷔 25주년을 축하하는 모임이 있었다. 이 무렵 호로비츠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 거장의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다시 나빠져서 이후 12년간 연주계를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다. 1963년, 레코딩 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1965년 4월, 12년간의 공백 끝에 카네기홀에서 가진 복귀연주는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반 클라이번이 차이코프스키 콩쿨에서 우승했을 때 보여주었던 것과 비슷하게 호로비츠에게 열광했으며 연주 당일 카네기홀은 호로비츠의 모습을 보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날의 실황은 레코드로 제작되어 ('The Historical come back' CBS)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했고,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전설'이 되었다.
1978년 1월, 미국 데뷔 50주년 기념으로 카네기홀에서 올만디가 지휘하는 뉴욕 필과 라흐마니노프의 협주곡 3번을 협연했고 2월엔 카터 대통령의 초대로 백악관에서 연주했다. 1979년,1980년에도 미국 순회 연주를 가졌다.
1986년 호로비츠는 꿈에도 그리던 모스크바 연주를 가지게 된다. 'Horowitz in Moscow'라는 제목으로 DG에서 음반과 영상물로 출판되어 있는데, 단순히 뛰어난 연주라는 것 이상의 감동을 전해주는 귀중한 기록이다. 이 연주가 진행되는 도중에는 당시 세계를 양분했던 두 초강대국간의 갈등도, 대립되는 이념으로 서로를 왜곡하고 있던 시민들의 시각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호로비츠가 미국에서 가진 마지막 연주도 바로 이 해 가을에 링컨센터에서 이루어졌다. 다음 해에 호로비츠는 런던과 빈, 암스테르담, 함부르크를 순회하면서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순회연주회를 가졌다.
1989년 11월 5일 호로비츠는 병석에서가 아니라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녹음을 편집하던 중 갑작스런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건강상태는 나이에 비해 극히 양호한 편이었다고 한다. 평소 부인인 완다에게 남긴 유언에 따라 호로비츠는 이탈리아의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에 묻히게 되었다.
Schumann - Traumerei |
호로비츠의 피아노 소리는 보통 피아니스트의 톤과는 전혀 달라서 마치 종을 울리는 것 같은 것이 특징이다. 그만큼 그의 톤은 투명하다. 그의 다이내미즘은 폭이 넓을 뿐 아니라 매우 색채적인것도 큰 특징이다. 그의 연주 특성을 좀더 세분하면, 1. 초기 - 명인기적 기교와 정열의 결합. 감각적 세련미가 돋보였다. 2. 중기 - 토스카니니와의 협연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나타 났다. 형식감이 뛰어났다. 3. 후기 - 휴머니즘이 반영된 서정성. 피아노를 성악적으로 처리하는 경향이 짙다. 특히 흐르는 듯한 레가토를 사용하여 표현의 음영을 강조하고 있다. 호로비츠는 1986년에 들어와서 61년만의 고국 연주회를 비롯하여 50년만의 독일·영국 연주 등을 치르면서 <호로비츠 증후군> 현상을 일으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연주가인가를 실증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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