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퍼셀 [Henry Purcell, 1659년경 ~ 1695]

想像 2014. 8. 13.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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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nry Purcell, 1659? ~ 1695



바로크 초기 영국의 작곡가. 100여 곡 이상의 노래와 소규모 오페라 〈디도와 아이네아스 Dido and Aeneas〉, 셰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밤의 꿈 Midsummer Night's Dream〉의 부수음악인 〈요정 여왕 The Fairy Queen〉 등으로 유명하다.


생애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왕실 부속 예배당의 시종(gentleman)계급으로 국왕을 위해 봉사하는 음악가들을 훈련하는 일을 맡았으며, 아들 헨리 퍼셀을 그곳 소년 성가대 일원으로 있게 하면서 음악교육을 시켰다. 1673년 변성기가 되자 국왕의 악기 관리관이었던 존 힝스턴의 조수 일을 했고 1683년에는 그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1674~78년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오르간 조율을 맡았고 1675~76년 같은 곳에서 앤섬의 오르간 성부 필사를 맡았다. 1677년 매슈 로크의 후임으로 찰스 2세의 현악 합주단 상임 작곡가로 일하게 되었고, 1679년에는 작곡가 존 블로의 후임으로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1682년 왕실 부속예배당에 소속된 3명의 오르간 연주자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이 모든 직위들은 제임스 2세, 윌리엄 3세, 메리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에도 계속되었다. 1680(또는 1681)년에 결혼해 6명 이상의 아이를 낳았고(그중 3명은 어려서 죽었음), 아들 에드워드와 손자 에드워드 헨리(1765 죽음) 역시 음악가가 되었다. 퍼셀은 전생애를 웨스트민스터에서 보냈다. 존 드라이든과 로버트 하워드 경의 운문 비극 〈인도의 여왕 The Indian Queen〉(1664)을 오페라로 만드는 작업을 했으나 곡을 완성하지 못한 채 병으로 쓰러져 죽었고, 이 작품은 사후에 형제인 다니엘(1717 죽음)에 의해 완성되었다. 다니엘 퍼셀도 왕실 부속예배당의 소년 성가대 단원으로 자랐고, 1688~95년 옥스퍼드의 모들린 칼리지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다니엘 퍼셀은 헨리 퍼셀이 죽기 전까지는 작곡가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다가 헨리 퍼셀이 죽은 1695년부터 런던에서 연극 부수음악 작곡가로 상당한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작곡가로서 다니엘 퍼셀의 인기는 1707년 이탈리아 오페라의 쇄도로 끝났다.


후대에 헨리 퍼셀이 주로 노래 작곡가로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의 노래가 평생에 걸쳐 많이 출판되었고 사후에도 계속 그의 노래 악보가 재출판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처음으로 과시하게 된 장르는 기악곡인데 그는 3~7성부로 된 비올 환상곡들을 연이어 작곡했다. 4성부로 된 9곡의 환상곡들은 모두 1680년 여름에 작곡한 것이고 나머지 판타지아들도 거의 대부분 그 이전에 작곡했다. 퍼셀은 이 곡들의 작곡을 통해 이미 구식이 되어버린 음악형식(환상곡)을 뛰어난 솜씨로 재생시켰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는 당시 새로운 인기를 얻었던 기악곡 유형인 2개의 바이올린과 베네치아 비올, 오르간(또는 하프시코드)을 위한 소나타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이 소나타 중 12곡은 1683년 찰스 2세에게 헌정·출판되었고, 또다른 9곡은 같은 악기 편성에 의한 샤콘 1곡과 함께 그가 죽은 뒤 아내에 의해 1697년 출판되었다. 1683년판의 서문에서 그는 저명한 이탈리아 대가들을 충실히 모방하는 한편, 상당한 정도로 영국 실내악의 전통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다. 찰스 2세를 위해 작곡한 축하음악들(1680년 이후에 작곡하기 시작한 일련의 경축 송가들) 중 초기 작품들에서도 기악곡이 가장 중요하다. 그무렵까지만 해도 그는 성악곡 유형에 대한 경험이 적어서, 무미건조한 가사에 최상의 음악을 붙이는 것과 같은 후기의 기법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나 1683년경이 되면서 가사에 음악을 붙이는 감각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고, 궁정을 위해 빈약한 가사에 활력이 넘치는 음악을 붙이는 실력을 발휘했다. 그때부터 메리 여왕을 위한 마지막 생일 축하 송가를 작곡한 1694년까지도 음악의 활력으로 빈약한 가사를 극복했다. 이와 비슷한 특성들이 성 카이킬리아 축일을 위한 송가들 중 마지막 곡(1692)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다.


무대음악 작곡가로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당시 런던에는 대중 오페라가 없었기 때문에 그의 재능을 완전히 발휘하지 못했다. 그가 작곡한 대부분의 극음악들은 일상적인 대화체 연극의 중간중간에 노래와 기악곡을 삽입한 형태를 취했고, 음악이 있는 장면이 좀더 확대된 경우도 있었다. 그의 극음악은 1689년 첼시의 한 여학교에서 연주할 목적으로 〈디도와 아이네아스〉(네디험 테이트의 대본)를 작곡하면서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가 작곡한 유일한 본격 오페라로 작은 규모 안에서도 극적 묘미를 살렸다. 이 작품을 작곡한 다음부터 죽을 때까지 시종일관 대중적인 극음악에 전력을 기울였으며, 그중 〈디오클레티아누스 Diocletianus〉(1690, 토머스 베터턴 각색, 존 플레처와 필립 메신저의 비극 〈여자 예언자 The Prophetess〉를 기초로 함)·〈아서 왕 King Arthur〉(1691, 존 드라이든 원작, 처음에는 오락용 음악으로 작곡)·〈요정 여왕〉(1692,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바탕으로 무명작가가 각색) 등과 같은 작품들에서 모두 음악은 대본의 중간에 삽입되었다. 이 작품들에서 그는 생생한 희극적 감각뿐만 아니라 가사를 능가하는 정열적인 음악적 표현의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이탈리아 양식에 가깝게 일치시키려는 경향은 후기의 극적인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작품들은 종종 상당한 수준의 독창적 기교를 요구한다.


1680년대에 그는 4성부 환상곡들과 초기의 궁정용 송가, 최초의 극음악 〈테오도시우스 Theodosius〉(1680, 너새니얼 리의 희곡을 바탕으로 함) 등을 작곡했고, 이보다 다소 이른 시기에 교회음악도 일부 작곡했지만 정확한 작곡 시기는 알 수 없다. 대부분의 풀 앤섬과 버스 앤섬들은 1680년부터 찰스 2세가 죽은 해인 1685년까지 작곡되었다. 제임스 2세, 윌리엄 3세, 메리 여왕의 통치기간중에는 왕실 부속예배당의 활동이 뜸해졌는데 이것은 퍼셀이 이 기간중 상대적으로 작품을 적게 작곡했기 때문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가 극음악과 송가의 작곡에 열중한 나머지 교회음악을 작곡할 시간이나 흥미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풀 앤섬 양식은 환상곡들과 마찬가지로 옛 양식에 따른 복고풍이었던 반면, 버스 앤섬은 왕실 부속예배당에서 그가 모셨던 펠엄 험프리(그는 1660년 중반 유학 가서 대륙 양식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음)의 영향으로 진보적 성향을 분명히 보였다. 버스 앤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지나치게 감상적이지 않으면서도 애처로운 느낌을 자아내는 표현적·낭송적 성악 서법에 있었다. 이와 똑같은 특성이 그가 개인적 목적으로 작곡한 종교 노래들에서도 나타났다. 찰스 2세 통치기간중 왕실 부속예배당에서 활동한 작곡가들은 왕실 직속 관현악단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퍼셀도 이것을 충분히 활용해 고상하면서도 생생한 서곡과 리토르넬로를 작곡했다. 교회음악 작품들중 특히 정교한 것들은 앤섬 〈My Heart is inditing〉(1685, 제임스 2세 대관식 때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연주)과 흥겨운 분위기의 〈테 데움과 유빌라테 Te Deum and Jubilate〉(1694, 성 카이킬리아 축일을 위해 작곡) 등이다. 그중 〈My Heart is inditing〉가 더 인상적인 반면 〈테 데움과 유빌라테〉는 대체로 지나치게 현란함을 강조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인기를 잃게 되었다.


그가 만든 창작곡은 마지막 15년 동안 다소 줄어들었지만, 그동안에도 극음악은 말할 것도 없고 100여 곡의 세속 노래와 40곡 정도의 이중창을 작곡했다. 노래들 중 상당수가 중요한 곡인데 이탈리아 독창 칸타타풍에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들을 결합했다. 당시 퍼셀이 세속음악 작품에 즐겨 사용하던 기법은 고집저음 인데 이 기법을 사용하면 활기 찬 작품의 경우에는 곡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한편 '디도의 작별 장면'처럼 애가에서는 슬픔의 표현을 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2번째 소나타 모음 중 샤콘 악장들에도 동일한 기법을 사용하여 강한 인상을 나타냈다. 고집저음을 사용한 작품들은 전반적으로 작곡 능력의 정점에 달한 퍼셀을 대변하는 곡들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수많은 캐치 는 나름대로 세련된 모습을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노련한 작곡가가 만든 오락음악의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색인 : 캐치). 퍼셀은 초년 활동기간 이후 기악 실내악곡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건반음악들은 그의 전체 작품 중 아주 작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구체적으로는 모음곡들과 이보다 더 소수의 하프시코드 작품들, 오르간을 위한 몇 개의 작품뿐이다.


성악 모음집에 수록되어 있는 수많은 노래들 이외에 그의 생전에 출판된 악보는 3성부 소나타들(1683), 성 카이킬리아 축일을 위해 쓴 송가 〈기쁨이여 모두 오라 Welcome to all the pleasures〉(1683 작곡, 1684 출판), 〈디오클레티아누스〉(1690/91)를 비롯한 소수에 불과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미망인이 하프시코드 작품 모음집(1696), 극을 위한 기악음악 모음집(1697), 〈테 데움과 유빌라테〉(1697)를 출판했고, 출판업자인 헨리 프레이퍼드는 2권으로 된 노래 모음집 〈영국의 오르페우스 Orpheus Britannicus〉(1698, 1702)를 출판했다(18세기 중반까지 3판이 나옴). 18세기말과 19세기초에 그의 극음악, 송가, 앤섬 들 중 일부가 출판되었지만 1876년 이후 퍼셀 협회가 창설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단체는 1878년 첫 악보집을 내놓고, 1882년에 2번째 악보집을 출판했으며, 1889~1928년에도 비정기적으로 악보집을 출판했다. 이 단체의 퍼셀 악보 출판작업은 이후 오랫동안 중단되었다가 1957년 여러 가지 송가들과 칸타타들을 모은 모음집 1권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1965년까지 총 32권의 악보집이 출판되었다. 이 전집 출판작업은 새로운 악보 출판과 함께 기존 악보의 수정작업도 병행되었는데 최초의 수정 악보는 1961년 출판된 〈디오클레티아누스〉이다.


퍼셀은 당시 영국 최고의 작곡가로 교회음악, 극음악, 궁정음악, 개인 오락음악 등 방대한 영역을 포괄했으며, 이 모든 작곡 영역들에서 과거의 유산을 존중하면서도 당시 진보적인 양식들, 특히 동시대 이탈리아 양식들과의 결합을 보여주었다. 예리한 음악적 감각으로 독특한 개인 양식을 이룩한 그는 당대 유럽과 영국에서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가 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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