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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리중/음악

바슬라프 니진스키(Vatslav Nizhinskii,1890 ~ 1950)와 현대 발레음악

by 想像 2009.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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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슬라프 니진스키(Vatslav Nizhinskii,1890 ~ 1950)와 현대 발레음악

바슬라프 니진스키(러시아어: Вацлав Фомич Нижинский; 폴란드어: Wacław Niżyński, 1890년 3월 12일 –1950년 4월 8일)는 폴란드계 러시아 발레 무용수이자 안무가이다. 니진스키는 역사상 가장 재능있는 남성 무용가로 손꼽히며, 그의 맡은 역활의 재현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다. 특히 중력을 거부한 듯, 높이 도약하며 춤추는 것도 니진스키의 전설이 되었다. 특히 니진스키는 안무가로서 드뷔시의《목신(牧神)의 오후》, 《유희》, 스트라빈스키의《봄의 제전》등을 창작하여 현대 발레음악의 발전에도 숨은 공로자라 할 수 있다.

바슬라프 니진스키는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러시아인으로 귀화한 폴란드계 무용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0년 그는 황실 발레 학교에 들어가, 엔리코 체케티(Enrico Cecchetti), 니콜라스 레가트(Nicholas Legat), 파벨 게르트(Pavel Gerdt) 에게서 공부하였다. 니진스키는 18살때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에서 주역을 맡았다.

니진스키는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를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을 겪게 된다. 디아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식인이자, 러시아 시각예술과 음악을 해외로 소개시키는 부유한 후원자였다. 이 두 사람은 연인이 되면서,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의 경력 관리에 강력히 개입하게 되었다. 1909년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를 주역으로 내세워, 파리에서 발레 공연을 가졌다. 그 공연은 폭팔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의 예술 집단을 통해서 디아길레프의 두 주역의 명성이 커지게 하었다. 디아길레프는 그 움직임에 발레 루스를 창립하였고, 미하일 포킨의 안무와 함께 그 시대 가장 유명한 발레단 중 하나가 되었다.

니진스키는 포킨이 안무를 맡고 니콜라이 체레프닌이 작곡한《아르미드의 집》과, 안톤 아렌스키와 다른 러시아 작곡가들이 작곡한《클레오파트라》와 막간극《축제》등의 작품에서 그의 재능을 선보였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니진스키의 파 드 뒤(pas de deux) 연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10년 니진스키는《지젤》과 포킨의 발레인 《사육제》, 그리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 모음곡인 《세헤라자데 (발레)|세헤라자데》의 공연에서 빛을 발휘했다. 니진스키와 타마라 카르사비나와의 마린스키 극장에서의 협연은 전설로 남았다.

니진스키는 마린스키 극장으로 돌아갔으나, 무대 위에서 타이즈 차림으로 나타나자 퇴장되었다. 그 당시 남자 무용수들은 반바지 착용이 의무적으로 요구되었다. 한 왕족의 일원은 그 모습이 외설적이라 비난하였고, 이에 니진스키는 해고되었다. 이 스캔달은 니진스키를 자신의 발레단에 자유롭게 출연하시키 위해, 디아길레프가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 서유럽에서의 많은 프로젝트가 니진스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니진스키는 포킨의 새 프로덕션으로 베버의 음악이 사용된《장미의 정령》에서 주역을 맡았고(사실 그의 이른 은퇴로, 니진스키는 그 역활을 만족할 만큼 충분히 추지 못했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시카》에서, 생명이 없는 춤추는 인형의 역활 재현으로 청중들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니진스키는 3개의 발레 작품의 안무를 맡았다. 1912년 드뷔시의 음악이 사용된 《목신의 오후》와 1913년 《희롱》(Jeux), 1916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의 《틸 오일렌슈피겔》(Eulenspiegel),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등이다. 니진스키는 전통적인 발레의 것과는 거리가 먼 안무를 창조하였다.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Le Sacre du Printemps》의 공연은, 스트라빈스키의 근대 총보과 더불어, 니진스키의 급진적인 춤 동작은 소동을 야기하였다.

니진스키는 타이틀 역활을 맡은《목신의 오후》의 마지막 장면에서, 님프의 스카프를 이용한 자위행위의 마임은 스캔달을 일으켰다. 파리 절반은 그를 외설죄로 비난하였고, 로댕, 오딜롱 르동, 프로스트같은 예술가들은 이에 맞섰다. 한편 니진스키가 지도한 몇 작품의 리바이벌은, 정확한 안무 기록에 기초하였고, 그를 사려깊고, 성공적이며, 혁신적인 안무가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니진스키가 여성 무용수와 만족스러울 만한 협연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지젤》처럼 무대 위에서 여성 무용수와의 호흡이 중요하지만, 니진스키는 그에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푸른 신(神)》에서 신의 역활, 《장미의 정령》에서 장미, 《세헤라자데》에서 사랑받는 노예같은 양성적인 역활에서, 니진스키를 뛰어넘을 이가 없었다. 여러면을 종합해볼 때, 니진스키는 의심할 여지없이 눈부시고 영향력있는 예술가였다.

(주요 자료 출처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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