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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자코모 푸치니는 조상 때부터 음악을 직업으로 했던 이탈리아의 유서 있는 집안에서 1858년 12월 22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미켈레는 나폴리에서 도니제티를 사사한 오페라 작가이며, 조부 도메니코도 파이젤로 문하에서 오페라를 배운 음악가였다. 그리고 증조부 안토니오와 또 그 아버지가 되는 사람도 교회 음악가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대대로 중앙 이탈리아의 상업 도시 루카 주변에서 탄생했으며 그 곳을 기점으로 음악활동을 개시했다.
자코모는 어려서 부친을 잃었기 때문에 외삼촌 등에게 음악의 초보를 배우고, 루카 교회 합창단원이나 부근 도시의 오르간 주자로서 일찍부터 현장 음악가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16세 무렵부터 작곡에 흥미를 나타내고 오르간곡 등을 시험적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1876년 피사에서 본 <아이다>의 충격으로 일전하여 오페라를 강하게 지망하게 되었다.
당시의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로 입신하려면 밀라노에서의 공부가 아무래도 필요했다. 루카의 파치니 음악학교 졸업 수년 후 그는 장학금을 획득, 밀라노에 나가 그곳 음악원에서 바지니와 폰키엘리를 사사하게 되었다. 당시의 편지 등으로 추측하면 이 시대 그의 생활은 훗날의 명작 <라 보엠>의 무대처럼 자유 분방해서 작곡 학생 동료였던 마스카니와의 마음 내키는 대로의 동거 생활로 지새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졸업 작품 <교향적 카프리치오>는 선율의 유려함, 악기법의 교묘함 때문에 호의적인 비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졸업 이전부터 이미 오페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스승 폰키엘리가 푸치니에게 밀라노의 출판사 손쵸노가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콩쿠르에 작품을 제출하도록 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태어난 1막 오페라 <빌리>(1884년)는 동 콩쿠르에서는 무시당하고 말았지만 어떤 예술 애호가의 파티에서 그 1절을 푸치니가 피로했던 바, 마침 동석하고 있었던 아리고 보이토와 저명 출판사의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1884년 5월 밀라노의 테아트로 달 베르메에서 상연케 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적이어서 리코르디는 제2작을 푸치니에게 위촉했다.
바로 이 무렵 푸치니는 엘비라 본투리라는 기혼 여성과 동거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그와 루카의 가족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함과 동시에 그를 경제적 궁지로 몰아 넣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진행된 오페라 <에드가>의 진척상은 여의치 않았다. 5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1889년에 겨우 초연으로 끌고 가기는 했지만 3회로 공연이 중단되는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선경지명이 있었던 리코르디는 사내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에게 계속 도움을 주었다.
푸치니의 제3작인 프레보의 원작에 의한 <마농 레스코>도 출산의 고통을 맛보면서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890년 초연)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1892년 초연) 그리고 베르디의 최후의 대작 <팔스타프>(1893년 초연) 등의 걸작이 잇따라 등장했으므로 웬만한 명작을 갖고 이에 대항하지 않는 한 푸치니의 장래는 위태로워질 수 있는 시기였음에도 대본이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아서 토리노에서의 초연(1893년)은 푸치니 생애의 유일무이한 대성공이라고 할 만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내외에 울려 퍼졌다. 그 결과 수입도 안정되고, 리코르디에게 빚을 갚는가 하면 틸레니아 해 연안에 별장을 사고 밀라노에서 아파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작품 <라 보엠>(1896년 토리노 초연)의 성립에 대해서는 한층 복잡한 경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앙리 뮈르제의 원작에 의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오페라를 작곡할 계획을 공표한 것과 전후해서 레온카발로도 유사한 계획을 발표하고, 그 결과 두 작곡가간에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또 대본 제작에 대해서도 작곡자와 두 집필가간의 의견이 엇갈리기 일쑤여서 어쨌든 난행하는 수가 많았다. 대체로 푸치니는 대본 작자에 대해 요구가 엄격했는데, 일리카와 자코사를 협력자로 해서 작곡된 다른 두 작품인 <토스카>와 <나비 부인>도 성공작임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행한 <라 보엠>의 초연에는 혹평도 많아서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발자취를 남길 만한 작품은 아니다"라는 의견조차 표명된 바 있다. 한편 로마에서 1900년에 초연된 <토스카>는 관중으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으나, 푸치니의 음악에서 서정적인 표현을 기대하고 있었던 비평가들은 그 줄거리의 생생함, 음산함에 반발을 느끼고 이 작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래 여행을 좋아했던 푸치니는 자기 작품이 상연되는 도시를 종종 방문했는데 1900년 여름 런던에서 본 다비드 벨라스코의 극 <나비 부인>에 감명을 받고 이것의 오페라화를 계획, 동명의 2막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곡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1904년)된 작품이었으나 결과는 비참해서 휘파람과 야유에 의한 연주 방해마저 생겼다. 그러나 이는 아무래도 반푸치니파가 꾸민 음모였던 듯해서 개작 후 브레시아에서의 공연으로 비로소 진가를 인정받았다.
1904년 마침내 엘비라 본투리와 정식으로 결혼한 푸치니는 그녀와 함께 1907년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푸치니제'에 입회하기 위해서였다. 이 여행중 그는 베르스코의 극 <황금의 서부 아가씨>를 보고 이것의 오페라화에 착수, <서부의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1910년 뉴욕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푸치니로서는 어법이 진취적이며, 그 특유의 감상적인 멜로디가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인지 앞의 3작품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또 희가극풍 작품 <라 론디네>는 빈의 카를 극장의 위촉으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대전 발발 때문에 몬테카를로에서 초연(1917년)되는 사태를 거쳐 성공작으로 간주되고 있지는 않다. 이 작품과 병행하여 푸치니는 3부작으로 알려진 3개의 1막 중 제 1편 <외투>에 착수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욕을 리얼하게 그린 이 작품과 종교적 감상 비극인 제2편 <수녀 안젤리카> 그리고 인간의 금전욕에 대한 풍자 희극인 제 3편 <잔니 스키키>는 1918년 뉴욕에서 초연되었는데, 제3편의 경묘함이 특히 인기를 끌게 되었다.
마지막 작품으로 미완성인 오페라 <투란도트>(1926년 초연)를 작곡 중이던 푸치니는 자신의 노성을 입증시키는 대신 자기 의념에 사로잡히는 작곡가가 되어 갔다. 많은 걸작을 남긴 대가도 어지럽게 변하는 음악 정세의 와중에서는 한가로이 지낼 수 없어서 '고원한' 음악을 써야 하는 필연성에 쫓기고 있었는데, 그는 이 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병에 굴복하고 1924년 11월 29일 인후암으로 브뤼셀에서 숨을 거둔다.
남은 작품은 과연 중량감, 진실미 풍부한 푸치니 필생의 작품이 되었다. 초연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가 작곡자의 검필 부분에서 지휘봉을 놓고 '마에스트로가 쓴 것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자코모는 어려서 부친을 잃었기 때문에 외삼촌 등에게 음악의 초보를 배우고, 루카 교회 합창단원이나 부근 도시의 오르간 주자로서 일찍부터 현장 음악가로서의 경험을 쌓았다. 16세 무렵부터 작곡에 흥미를 나타내고 오르간곡 등을 시험적으로 만들고 있었는데, 1876년 피사에서 본 <아이다>의 충격으로 일전하여 오페라를 강하게 지망하게 되었다.
당시의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로 입신하려면 밀라노에서의 공부가 아무래도 필요했다. 루카의 파치니 음악학교 졸업 수년 후 그는 장학금을 획득, 밀라노에 나가 그곳 음악원에서 바지니와 폰키엘리를 사사하게 되었다. 당시의 편지 등으로 추측하면 이 시대 그의 생활은 훗날의 명작 <라 보엠>의 무대처럼 자유 분방해서 작곡 학생 동료였던 마스카니와의 마음 내키는 대로의 동거 생활로 지새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졸업 작품 <교향적 카프리치오>는 선율의 유려함, 악기법의 교묘함 때문에 호의적인 비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졸업 이전부터 이미 오페라에 손을 대고 있었다. 스승 폰키엘리가 푸치니에게 밀라노의 출판사 손쵸노가 정기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콩쿠르에 작품을 제출하도록 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태어난 1막 오페라 <빌리>(1884년)는 동 콩쿠르에서는 무시당하고 말았지만 어떤 예술 애호가의 파티에서 그 1절을 푸치니가 피로했던 바, 마침 동석하고 있었던 아리고 보이토와 저명 출판사의 사장 줄리오 리코르디의 주의를 끌게 되었고, 1884년 5월 밀라노의 테아트로 달 베르메에서 상연케 되었다. 결과는 대성공적이어서 리코르디는 제2작을 푸치니에게 위촉했다.
바로 이 무렵 푸치니는 엘비라 본투리라는 기혼 여성과 동거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은 그와 루카의 가족과의 관계에 금이 가게 함과 동시에 그를 경제적 궁지로 몰아 넣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진행된 오페라 <에드가>의 진척상은 여의치 않았다. 5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1889년에 겨우 초연으로 끌고 가기는 했지만 3회로 공연이 중단되는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그러나 선경지명이 있었던 리코르디는 사내에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에게 계속 도움을 주었다.
푸치니의 제3작인 프레보의 원작에 의한 <마농 레스코>도 출산의 고통을 맛보면서 세상에 나온 작품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1890년 초연)와 레온카발로의 <팔리아치>(1892년 초연) 그리고 베르디의 최후의 대작 <팔스타프>(1893년 초연) 등의 걸작이 잇따라 등장했으므로 웬만한 명작을 갖고 이에 대항하지 않는 한 푸치니의 장래는 위태로워질 수 있는 시기였음에도 대본이 좀처럼 마무리되지 않아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좋아서 토리노에서의 초연(1893년)은 푸치니 생애의 유일무이한 대성공이라고 할 만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고 그의 명성은 이탈리아 내외에 울려 퍼졌다. 그 결과 수입도 안정되고, 리코르디에게 빚을 갚는가 하면 틸레니아 해 연안에 별장을 사고 밀라노에서 아파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작품 <라 보엠>(1896년 토리노 초연)의 성립에 대해서는 한층 복잡한 경위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앙리 뮈르제의 원작에 의한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오페라를 작곡할 계획을 공표한 것과 전후해서 레온카발로도 유사한 계획을 발표하고, 그 결과 두 작곡가간에 불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또 대본 제작에 대해서도 작곡자와 두 집필가간의 의견이 엇갈리기 일쑤여서 어쨌든 난행하는 수가 많았다. 대체로 푸치니는 대본 작자에 대해 요구가 엄격했는데, 일리카와 자코사를 협력자로 해서 작곡된 다른 두 작품인 <토스카>와 <나비 부인>도 성공작임은 우연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행한 <라 보엠>의 초연에는 혹평도 많아서 "이탈리아 오페라사에 발자취를 남길 만한 작품은 아니다"라는 의견조차 표명된 바 있다. 한편 로마에서 1900년에 초연된 <토스카>는 관중으로부터는 환영을 받았으나, 푸치니의 음악에서 서정적인 표현을 기대하고 있었던 비평가들은 그 줄거리의 생생함, 음산함에 반발을 느끼고 이 작품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래 여행을 좋아했던 푸치니는 자기 작품이 상연되는 도시를 종종 방문했는데 1900년 여름 런던에서 본 다비드 벨라스코의 극 <나비 부인>에 감명을 받고 이것의 오페라화를 계획, 동명의 2막 오페라를 작곡했다. 이 곡은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1904년)된 작품이었으나 결과는 비참해서 휘파람과 야유에 의한 연주 방해마저 생겼다. 그러나 이는 아무래도 반푸치니파가 꾸민 음모였던 듯해서 개작 후 브레시아에서의 공연으로 비로소 진가를 인정받았다.
1904년 마침내 엘비라 본투리와 정식으로 결혼한 푸치니는 그녀와 함께 1907년 처음으로 미국에 건너갔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푸치니제'에 입회하기 위해서였다. 이 여행중 그는 베르스코의 극 <황금의 서부 아가씨>를 보고 이것의 오페라화에 착수, <서부의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1910년 뉴욕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푸치니로서는 어법이 진취적이며, 그 특유의 감상적인 멜로디가 자취를 감추고 있기 때문인지 앞의 3작품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또 희가극풍 작품 <라 론디네>는 빈의 카를 극장의 위촉으로 썼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대전 발발 때문에 몬테카를로에서 초연(1917년)되는 사태를 거쳐 성공작으로 간주되고 있지는 않다. 이 작품과 병행하여 푸치니는 3부작으로 알려진 3개의 1막 중 제 1편 <외투>에 착수하고 있었다. 인간의 정욕을 리얼하게 그린 이 작품과 종교적 감상 비극인 제2편 <수녀 안젤리카> 그리고 인간의 금전욕에 대한 풍자 희극인 제 3편 <잔니 스키키>는 1918년 뉴욕에서 초연되었는데, 제3편의 경묘함이 특히 인기를 끌게 되었다.
마지막 작품으로 미완성인 오페라 <투란도트>(1926년 초연)를 작곡 중이던 푸치니는 자신의 노성을 입증시키는 대신 자기 의념에 사로잡히는 작곡가가 되어 갔다. 많은 걸작을 남긴 대가도 어지럽게 변하는 음악 정세의 와중에서는 한가로이 지낼 수 없어서 '고원한' 음악을 써야 하는 필연성에 쫓기고 있었는데, 그는 이 작업을 완성하지 못한 채 병에 굴복하고 1924년 11월 29일 인후암으로 브뤼셀에서 숨을 거둔다.
남은 작품은 과연 중량감, 진실미 풍부한 푸치니 필생의 작품이 되었다. 초연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가 작곡자의 검필 부분에서 지휘봉을 놓고 '마에스트로가 쓴 것은 여기까지입니다."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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