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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리중/음악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 (Jascha Heifetz, 1901 ~ 1981)

by 想像 2009.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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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샤 하이페츠 (Jascha Heifetz, 1901 ~ 1981)

세심한 음악 해석과 부드러운 음색, 숙련된 기교로 유명하다. 하이페츠하면 곧 '음악적 완벽성'을 떠올리게 된다.

1901년 제정 러시아의 빌나에서 태어난 야사 하이페츠는 3세때부터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아버지 루빔 하이페츠에게 바이올린 교육을 받았다. 7살때에는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가져 듣는 사람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1910년, 9살이 되던 해에는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예프렘 짐발리스트, 미샤 엘만, 나탄 밀스타인, 에디 브라운, 막스 로젠 등등 러시아 음악계의 중요 인물들을 배출한 레오폴드 아우어 교수의 문하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912년에는 입학한지 2년만에 아르투르 니키쉬가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다. 1913년에 하이페츠는 라이프찌히에서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였는데, 객석의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크라이슬러와 짐발리스트는 이 어린 바이올린 천재에게 찬사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917년 카네기 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는데, 이때 그가 보여준 초인적인 기교와 뛰어난 음악성으로 인해미국 음악계에 충격을 던져 주었으며첫 그해에 뉴욕에서만 30여회의 독주무대를 가져 큰 성공을 거두었다. 제정 러시아의 붕괴와 러시아의 공산화로 하이페츠 일가는 미국에 정착하고 야사 하이페츠는 1925년 미국 시민이 되어 미국을 본거지로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하였다.

하이페츠는 솔리스트로서의 활동외에 루빈스타인, 포이어만과 더불어 이른바 '백만불짜리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 연주활동도 하였다. 이 트리오는 1942년 포이어만이 사망한 후에도 피아티고르스키를 영입하여 수년간 지속되었다.

1962년부터는 남캘리포니아 대학에 교수로 취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점차 연주활동을 줄여나가 1972년 10월 23일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연주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후진양성에 힘쓰다가 1987년 12월 11일 자택에서 8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바이올린의 기교적 측면은 두말할 필요없는 그를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로꼽는 이유는 아름다운 음색과 감정의 깊이를 음악안에 담을줄 아는 능력과 예리한 보잉과 흠잡을데 없는 심미안 등이다.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음악에 대해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려는 하이페츠의 본능과 같은 분석력은 오히려 극도의 서정적인 표현으로 연주회의사람들을 감동시켜 그들을 눈물 흘리게만드는 경우가 잦았다고 한다.

Sarasate: Zigeunerweisen, O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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