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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정리중/음악

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1876 ∼ 1962)

by 想像 2009.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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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1876 ∼ 1962)

브루노 발터는 1876년 9월 15일 베를린에서 태어나 여덟 살에 슈테른 음악원에서 배우기 시작했고 아홉 살에 피아노 연주로 첫 공연을 가졌다. 그는 1889년 한스 폰 뵐로프가 지휘하는 공연을 보고, 1891년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관람하면서 지휘자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1893년 쾰른 오페라의 보조 지휘자가 되었고, 그곳에서 로르칭의 <병기공장>으로 첫 공연을 치른다. 이듬해 그는 함부르크 오페라로 옮겨 그곳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조수로 일하게 된다. 브레슬라우, 프레스부르크, 리가에서 경력을 더 쌓은 뒤 그는 베를린으로 돌아온다. 여기서 그가 평생 좋아한 피츠너의 <불쌍한 하인리히>를 지휘한다. 

1901년 발터는 빈 국립 오페라에서 말러와 다시 조우한다. 이듬해부터 발터는 국제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한다. 그는 프라하와 런던(1910년 코벤트 가든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했다), 로마에 초청받았다 1911년 말러가 죽은 뒤 몇 달이 지나, 발터는 뮌헨에서 <대지의 노래>를 초연했고, 1912년에는 빈에서 <교향곡 9번>을 첫 선보였다. 또한 두 작품의 출판을 주선한 것도 그였다. 발터는 1911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얻었고, 그의 성을 슬레징거에서 발터로 바꾸었다.  1913년 빈을 떠나 뮌헨 오페라의 감독을 맡았고 그 자리를 1922년 말까지 유지했다. 1923년 뉴욕 필을 지휘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다음해까지 마물게 된다. 발터는 콘체르토헤보우 등 유럽의 여러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런던에서는 1924-31년 코벤트 가든이 주관한 독일 시즌의대부분을 지휘했다. 1925년 베를린으로 돌아와 샤를로텐부르크 국립 오페라의 감독이 되었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의 긴 관계를 시작한다. 1929년에는 베를린을 떠나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후임으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감독이 된다.

1933년 나치의 집권으로 정치적인 상황이 유대인인 그에게 위협이 되자 발터는 독일을 떠나 오스트리아로 간다. 이때부터 몇 년간이 그의 지휘 활동에 있어 가장 왕성한 결실의 시기이다. 그는 1934~39년에 콘체르트헤보우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1932~36년에는 매년 뉴욕 필하모닉을 방문했으며, 1936년에는 피렌체를 찾았다.

1935년부터 빈 국립 오페라를 객원 지휘한 그는 1936년에는 예술 고문이 된다. 1938년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이 다시 한번 그를 몰아낸다.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간 그는 1939년에 미국에 정착한다. 미국 체류 기간 동안  그는 시카고 심포니,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닉, NBC 심포니, 뉴욕 필하모닉(1947~49년 음악 고문을 지낸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을 지휘했고, 1941~59년에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무대에 섰다. 1947년부터는 여러 차례 유럽을 방문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의 초창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및 빈과 뮌헨의 무대에 다시 돌아왔다.
 
발터의 말러 녹음은 이 작곡가를 널리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또한 그는 종종 건반에 앉아 연주하며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을 지휘했고, 캐슬린 페리어와 같은 가수의 리트 반주를 했다. 발터는 1962년 2월 17일 캘리포니아 비벌리 힐스에서 사망했다. 

발터의 말러 녹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1930년대 오스트리아에서 활동하던 당시 남긴 EMI 녹음과 전후 미국 체류 중에 로스엔젤스 필하모닉의 단원을 모아 만든 CBS 심포니와의 연주이다. 전자는 주로 SP 시대의 녹음으로 음질은 열악하지만 빈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정열이 살아있는 걸작이다. 모노 시대의 막바지에 이루어진 CBS 녹음은 만년의 고고한 힘이 살아 있는 절연으로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녹음된 몇 장의 음반이 발터 팬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있다. 바로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유럽을 찾았을 때 녹음한 빈 필과의 실황이다. 1948년 녹음한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 (당시 발터는 빈에서 이 곡과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지휘했다),  각각 1952년과 1956년 녹음된 모차르트의 <교향곡 40번>, <25번>, 역시 1956년 실황인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그것이다.

<레퀴엠>은 같은 해에 뉴욕 필을 지휘한 음반이 오랜 사랑을 받아왔지만 이것 역시 절절한 비애감이 끓어오르는 명연주이다. 두 편의 교향곡 역시 LP 시절부터 CBS 음반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모차르트의 정형이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빈의 말러야말로 발터의 최대 업적이라고 일컬을 만하다. 1932년 <교향곡 9번>(EMI)과 1952년의 <대지의 노래>(Decca)가 그랬듯이 이 빈 필의 <2번>도 그 반열에 들 만하다, 몇 가지 실수가 뒤따르고 실황이고 음질도 간혹 찌그러지지만 소프라노 마리아 체보타리(Maria Cebotari)와 알토 로제테 안다이(Rosette Anday)의 절창이 가슴을 파고들고, 빈 국립 오페라 합창단과 빈 필의 치열한 화답이 돌아온 마에스트로를 ‘부활’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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