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심덕 - 사(死)의 찬미(讚美)
1927년 8월 4일 오전 4시, 부산행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는 쓰시마섬 앞을 지나고 있었다. 갑판을 순찰하던 급사가 일등객실문 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손전등으로 안을 비춰보았고 그러나 내부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행가방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었고 메모지 한장 그리고 팁 5원이 순서대로 놓여 있었다.
실종된 두 사람은 극작가 김우진(당시 30세)과 배우 출신 소프라노 윤심덕(당시 30세)이었다. 조선안에서의 모든 신문은 두 사람의 선상 실종을 ‘조선 최초의 선상(船上) 정사(情死)’로 단정했다. 윤심덕은 평양의 숭의여학교를 졸업후 처음에 의사와 교사가 되기 위해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와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에 다녔다가, 음악 공부에 뜻을 두었다.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건너간 뒤, 아오야마가쿠인을 거쳐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윤심덕은 도쿄 음악 학교 최초의 조선인 학생이었다. 윤심덕은 활달한 성격이었고 도쿄의 남자 유학생들과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 키가 큰 서구형 외모에 자신감이 넘치는 성격이었다.
1921년, 유학생들이 계획한 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극작가이며 와세다 대학 학생인 김우진을 만나게 되었다. 김우진은 이미 부인과 자녀가 있는 유부남이었다. 1924년에 도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였고,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교사로 임용되지 않아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혼담이 깨지는 등 개인적인 문제가 잘 풀리지 않았다. 부호의 첩이 되었다는 스캔들로 도피까지 했으며 김우진의 권유로 토월회에 들어가 배우로 일하게 되었다.
1926년 레코드 취입을 위하여 오사카에 있는 닛토[日東] 레코드 회사에 갔다가 사의 찬미를 녹음한 윤심덕은 그해 8월 3일에 김우진과 함께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 도쿠주마루[德壽丸]에 탑승했으며, 4일 새벽 4시 쓰시마섬을 지나던 중 자살한 것으로 추측된다 .
《사의 찬미》(死의 讚美)는 일제 강점기인 1926년 8월에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발표한 음반이며 이 음반의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타이틀곡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다뉴브강의 잔물결〉을 번안한 것이다. 한국어 가사는 윤심덕이 붙인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어 음반으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매되었다. 흔히 〈사의 찬미〉를 한국 대중가요의 효시로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죽음을 찬미하는 내용의 가사처럼 이 노래를 부른 윤심덕이 곧 귀국길의 현해탄에서 연인 김우진과 함께 자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다.
1절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광막한 황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다음 절의 가사 역시 "삶에 열중한" 인생을 가련히 여기며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라고 선언하고,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에 모두 다 없도다"라고 말하는 등 허무한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죽음을 찬미하는 내용의 가사처럼 이 노래를 부른 윤심덕이 곧 귀국길의 현해탄에서 연인 김우진과 함께 자결하면서 더욱 화제가 되었었다.이 노래는 윤심덕의 비극적인 동반 자살 이후 많은 인기를 끌었고, 자유연애 사조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잡았다.
1991년에 영화감독 김호선이 윤심덕과 김우진을 주인공으로 한 멜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이 노래의 제목에서 따온 《사의 찬미》라는 제목을 붙였다.
曠寞한 曠野에 달니는 人生아
너의 가는곳 그어대냐
쓸슬한 世上-險惡한 苦海에
너는 무엇을 차즈러 가느냐
눈물로된 어世上아
나죽으면 고만잀가
幸福찻는 人生들아
너찻는것 서름
웃는저꽃과 우는저새들이
그運命이 모도다 갓흐니
生에 熱中한 可憐한 人生아
너는 칼우에 춤추는者로다
눈물로된 어世上아
나죽으면 고만잀가
幸福찻는 人生들아
너찻는것 서름
虛榮에 바져 날뛰는 人生아
너 속혓음을 네가아느냐
世上의것은 너의게 虛無니
너죽은후에 모도다업도다
눈물로된 어世上아
나죽으면 고만잀가
幸福찻는 人生들아
너찻는것 서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