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e Frideric Handel, 1685∼1759
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HWV 351
헨델이 64세 때인 1749년에 작곡했으며「수상음악 Water Music」과 함께 그의 만년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관현악곡이다. 1749년 4월 27일, 런던의 그린 파크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체결된 평화조약을 축하하기 위해 대규모의 불꽃놀이 축제가 열렸다. 헨델은 이때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어「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작곡 연주했다.
이야기는 8년 전인 1740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칼 6세의 서거(逝去) 무렵으로 돌아간다. 칼 6세에게는 아들이 없어 국본칙령(國本勅令=기본법을 이루는 조칙, pragmatic sanction)으로 가헌(家憲)을 정해 공주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중부 유럽, 벨기에, 이탈리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을 전부 상속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칼 6세가 죽자 상속권 싸움이 일어났다.
바바리아의 선제후(選帝侯)였던 칼알브레히트가 프랑스, 스페인, 프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오스트리아로 침공하여 빈의 마리아 테리지아를 내쫓고 1742년에 황제 자리에 올랐다. 오스트리아 계승전쟁의 시작이었다. 쫓겨난 마리아 테레지아는 친척인 헝가리의 도움을 얻어 바바리아, 프랑스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고국을 돌아왔다. 프러시아 왕 후페데리크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한편 영국을 자기 편으로 끌어 들여 우위를 되찾았다. 그러한 영국과의 관계에 불만을 품은 프러시아가 얼마후 평화조약을 깨뜨리고 보헤미아로 쳐들어왔다. 마침 바바리아의 칼 알브레히트가 죽어서 오스트리아와 다시 협상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을 황제로 선임하여 모든 일을 일단락된 듯 했다.
그렇지만 마리아 테리지아 편을 들은 영국과 오스트리아에 적대했던 프랑스의 갈등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상속을 구실 삼아 또 전쟁으로 표출되었다 전쟁은 8년이나 계속된 뒤에 간신히 끝났다. 비로소 두 나라는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748년 7월 7일 에스 라 샤펠(아헨)에서 평화조약을 맺고 관계국은 모두 점령한 땅을 돌려 주었다.
이듬해 봄, 영국은 긴 전쟁에서 해방된 기쁨을 축하하기 위해 불꽃놀이를 계획했다. 불꽃은 카발리에레 세르반도니가, 음악은 헨델이 각기 담당했다. 헨델은 군악용 악기를 쓰라는 영국 황제 죠지 2세의 요구에 맞추어 트럼페트 9개, 호른 9개, 오보에 24개, 화고트 12개, 콘트라화고트 1개, 팀파니 3상, 작은 북 2개, 여기에 세르팡 sepent이라는 아직 영국에서는 낯선 저음악기까지 덧붙여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57인의 대합주 편성으로 「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을 만들었다. 더구나 초연에는 관악기를 늘려 100개 이상이나 사용했다고 한다. 불꽃놀이를 열기 1주일 전인 4월 21일 보크스 홀 가든에서 공개 연습을 할 때 1만 2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어 법석을 떨었다.
축제 당일은「왕국의 불꽃놀이 음악」의 서곡을 연주하고 101발의 캐논포가 울려퍼진 뒤, 불꽃이 올라가야 할 차례가 되었으나 모처럼 아름다운 거대한 성당 모양을 하늘에 그리려던 시도는 무산(霧散)되고 오히려 불꽃이 딴 곳으로 튀어 근처 건물을 태우는 소동만 일으켰다. 그리고 불꽃을 담당한 세르반도니는 울확 치민 나머지 칼을 뽑아들고 축제 집행관에게 덤벼들어 상처를 입히기까지 했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으로 몰려 예기한 대로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미 64세였던 헨델은 3년 뒤인 1752년에는 장님이 되어 더 이상 작곡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있다가 1759년에 죽었으므로,「왕궁의 불꽃놀이 음악」은 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화려한 무대였다. 축제를 치룬 후 헨델은 현악기를 보강하여 연주회용 관현악곡으로 고쳐 썼다. 그해 5월에 런던의 자선 음악회 때 이 개정판을 처음 공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