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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가난해서 죽기 1년전에야 자기 피아노를 장만했던 슈베르트

想像 2020. 10. 11.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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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베르트(1797~1828)는 31살 짧은 생애에 엄청나게 많은 곡을 썼다. 650곡의 노래를 남겨 ‘가곡의 왕’으로 불리며 오페라, 종교음악, 교향곡, 실내악, 소나타 등 모든 장르에서 숱한 걸작을 남겼다. 음악사에서 모차르트를 제외하면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은 곡을 작곡한 사람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슈베르트의 마음은 언제나 선율로 넘쳐났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너무도 가난해서 죽기 1년전에야 자기 피아노를 장만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토록 뛰어났던 슈베르트가 가난 때문에 평생 피아노조차 없었다고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피아노의 도움 없이 작곡을 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통념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까?

 

슈베르트는 10대 시절 임시 교사 생활을 하며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슈베르트는 1815년 한해에만 <마왕>, <들장미>, <달에게 부침>, <소녀의 탄식> 등 무려 144곡이나 되는 빼어난 가곡을 썼지만 이 많은 노래는 단 한 푼도 현금이 되어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음악가는 오페라로 성공해야 돈과 명예를 거머쥘 수 있었는데, 그가 작곡한 17편의 오페라는 모두 인기가 없었다. 그는 10대 시절부터 피아노 소나타를 썼지만, 위대한 베토벤이 살아 있는 빈 음악계에 자기 작품을 내밀지 못했다. <군대> 행진곡 등 네 손을 위한 작품을 40여 곡 썼지만, 친구들의 모임에서 연주하는데 그쳤을 뿐, 대중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없었다.   

 

슈베르트는 평생 경제적으로 불우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으로 작곡가들은 교회와 궁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모두 ‘자유 음악가’가 됐지만, 안정된 생계를 꾸리는 일은 오히려 과거보다 어려워졌다. 무한경쟁와 승자독식 시대가 시작됐고, 음악가도 예외가 아니었다. 출판업자들은 언제나 예술성보다 상업성이 우선이었다. 대중에게 낯선 슈베르트에게 작곡료를 치르는 것은 출판업자들에게는 모험이었다.

 

1822년, 병(병명은 티푸스, 매독, 식중독 등 설들이 다양한데 확실히 밝혀진 건 없다)에 걸린 해부터 슈베르트가 뛰어난 작곡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역설이다. 그는 여전히 무일푼이었다. 작곡료를 받기만 하면 친구들과 만찬을 벌여 모두 써 버리곤 했다. 낭만과 공상에 빠져 평생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로맨티스트’ 슈베르트는 31살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미완성> 교향곡과 <대교향곡> C장조는 그의 사후 발견됐다. 그가 남긴 20여 곡의 피아노 소나타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연주되기 시작했다. 슈베르트가 교향악과 피아노 음악의 대가로 인정받은 건 그가 사망하고 한 세기가 지난 뒤였다.

 

 

마지막 해, 목숨을 건 작곡은 계속됐다. 슈베르트는 소심한 성격때문에 대중 연주회를 기피했지만, 1828년 3월 처음 공개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뒀다. 슈베르트는 이 연주회로 꽤 큰 돈을 벌었고, 생전 처음 피아노를 살 수 있었다. 그가 죽던 해에 쓴 세 곡의 소나타(제19번 C단조 D.958, 제20번 A장조 D.959, 제21번 B플랫장조 D.960)는 슈베르트의 특징인 ‘방랑자 의식’을 담고 있지만, 깊은 영혼의 울림과 서정성을 들려주는 걸작으로 꼽힌다. 베토벤 이후 최고의 피아노 소나타로 꼽힌다.

 

31살 짧은 생애, 슈베르트는 그의 마지막을 장식한 이 세 소나타를 어렵게 장만한 자기 소유의 피아노를 쳐 가며 작곡했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가난하던 시절, 일기에 썼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나는 그저 작곡하기 위해서만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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