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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리스트] 자클린 뒤 프레 (Jacqueline du Pré, 1945~1987)

想像 2021. 1. 12. 1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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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영국 음악계의 자존심을 높여준 장본인. 영화의 주인공 같은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자클린 뒤 프레는 1945년 옥스퍼드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뒤 프레라는 프랑스식 성은 그녀의 아버지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서 그녀의 가문은 대대로 영국에서 터전을 닦아온 집안이었다. 어머니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저명한 교사로 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키우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5세 생일 직전 뒤 프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첼로 소리를 듣고 첼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5세에 그녀는 허버트 워렌의 런던 첼로 스쿨에서 수학했고 이후 1955년부터 1961년에는 길드홀 음악학교에서 저명한 첼리스트인 윌리엄 플리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천재성을 보인 그녀는 이후 대가급 연주자들을 찾아다니며 배움의 길을 닦아나갔다. 1960년에는 스위스에서 파블로 카잘스의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여 실내악의 중요성과 더불어 거장으로서의 관점을 배우게 되었고, 1962년에는 파리에서 토르틀리에의 가르침을, 1966년에는 러시아에서 로스트로포비치의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로스트로포비치는 뒤 프레의 재능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내가 이룬 업적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을 해낼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유일한 첼리스트”라고 치켜세우기도 했다. 이렇듯 거장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그녀였지만, 뒤 프레는 항상 자신의 스승은 프리스라고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1956년 수지아 어워드(귀에미나 수지아는 포루투갈 태생의 저명한 여류 첼리스트로서 영국 첼로계의 대모로 존경받는다)를 수상한 그녀는 1961년 런던 위그모어 홀에서 167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들고 데뷔 리사이틀을 가졌다. 협주곡 데뷔는 1962년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루돌프 슈바르츠가 지휘하는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연주했고, 이후 1963년 말콤 서전트가 이끄는 프롬 연주회에서도 엘가 협주곡을 연주하여 청중들로부터 엘가 협주곡에 있어서 뒤 프레의 전설이 시작되었다는 평을 받았다. 1965년에는 EMI에서 지휘자 존 바비롤리와 함께 이 협주곡을 레코딩하여 일약 스타로 부상하게 되었는데, 그녀는 불과 20세의 나이로 클래식계에서 손꼽히는 결정반이라는 명예를 만들어냈다.

 

에드워드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제 1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작곡을 시작하여 1919년에 완성된 작품으로 뒤 프레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페르소나와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곡가의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와 삶에 대한 무상감을 반영하고 있는데, 특히 1920년 부인의 죽음으로 인해 더 이상 작곡을 할 수 없었던 만큼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대작으로 남게 되었다. 1919년 10월 초연된 이후 파블로 카잘스와 폴 토르틀리에, 앙드레 나바라를 비롯하여 베아트리체 해리슨, W.H. 스콰이어, 앤쏘니 피니와 같은 영국 출신의 연주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대중적으로 환호를 받기는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초연된 지 40여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이 [E단조 협주곡]은 자클린 뒤 프레라는 연주자에 의해 비로소 그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 작품을 그저 연주한 것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작품과 정신적인 일체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한편 그녀는 피아니스트 스테판 코바세비치와 베토벤 피아노 트리오를 비롯한 다양한 듀오 작품을 녹음했는데, 이 당시부터 1712년산 ‘다비도프’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사용하며 특유의 묵직한 음색과 강렬한 표현력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와 더불어 예후디 메뉴힌을 비롯하여 이자크 펄만, 주빈 메타, 핀커스 주커만 등과 같은 젊은 연주가들과도 교류하며 친구 이상의 음악적 활동을 이루며 당대 최고의 첼리스트이자 음악의 뮤즈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특히 1969년 뒤 프레가 자신의 친구들화 함께 촬영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송어’] 영상물은 오페라 [라 보엠]에 등장하는 젊은 보헤미안들에 비견할 만한 유쾌하고도 진지한 음악적 놀이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그녀에게도 사랑이 찾아왔다. 미국에서 데뷔 무대를 갖은 뒤 프레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과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 것이다. 1966년 12월 31일 처음 바렌보임을 만난 뒤 프레는 이내 사랑에 빠졌고, 이 두 명의 젊은 천재 음악가는 이듬해인 1967년 6월 15일 웨스턴 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이 세기의 결혼식을 위한 팡파레가 울려퍼진 뒤 두 명의 축복받은 음악가들은 뜨거운 사랑만큼이나 정력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바로크와 고전, 낭만, 현대에 이르는 많은 실내악 및 협주곡 레파토리를 섭렵한 뒤 프레는, 자신의 부군과 함께, 혹은 다른 거장들과 함께 레코딩 스튜디오 및 연주회장을 종횡무진 누볐다. 특히 1970년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바렌보임의 지휘로 이루어진 엘가의 [첼로 협주곡] 실황 레코딩은 뒤프레와 바렌보임의 음악적 교감이 최고도로 무르익은 모습을 들려준다. 뒤 프레는 이 때 바비롤리와의 연주 때보다 더 성숙해진 음악성과 신들린 듯한 명인기를 보여주었다.

 

하늘이 그녀에게 너무 과도한 재능을 준 탓일까. 뒤 프레의 음악적 역량이 폭발적으로 터져나올 당시인 1971년 7월 뒤 프레는 조금씩 아픈 증세를 호소하며 연주에 집중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리허설에서 피로감에 쓰러지거나, 활을 놓치는 일이 많아졌다. 심지어는 시력조차 떨어졌다. 그럴수록 완벽주의자였던 바렌보임은 정신력 문제를 거론하며 그녀를 더욱 혹독하게 몰아 붙였다. 바렌보임으로서는 그녀의 연주력이 쇠락해 간다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최악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나를 미치게 한다”던 호의적인 비평가들조차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하고, 그녀의 일관성 없고 조리없는 연주는 “정말 우리를 미치게 한다”는 악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시 피아니스트인 라두 루푸의 부인인 라이자 윌슨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녀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잦았어요. 쇼핑을 하거나 들판을 거닐거나 했죠. 그러다가 넘어지면 지나가는 사람이 도와줄 때까지 움직이지 못했답니다. 그러나 늦게 돌아온 데 대해 남편이 화를 내면 ‘쇼핑하다 보니 입고 싶은 옷이 많았어요’라고 거짓말로 둘러대곤 했어요...” 결국 그녀는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에야 병원에서 제대로 된 검사를 받고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병명을 진단을 받았다. 그녀는 이제 투병이라는 가혹한 터널을 걸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자신의 육체에 대한 고통보다 음악에 대한 열정에 훨씬 더 컸던 그녀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연주회와 레코딩을 계속 강행했다. 그러나 연주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근육과 신경이 피로해짐에 따라 그녀의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결국 1973년 2월 주빈 메타가 이끄는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끝으로 영국에서의 공식적인 연주회를 마감했다. 이후 그녀의 최후의 연주회는 몇 일 뒤 뉴욕에서 열렸다. 레너드 번스타인이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주커만의 연주로 브람스의 [2중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 그것이다. 당시 뒤 프레는 활을 잡는 것과 운지를 하는 것 모두 대단히 힘들어했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엘가의 [첼로 협주곡]은 그녀의 데뷔와 마지막 연주회를 함께 한 작품으로서, 일종의 뒤 프레에게 있어서는 페르소나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미국 연주회 직후 은퇴를 한 뒤 프레는 후학을 양성하면서까지 첼로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1975년 이후로는 척수신경에 손상을 입으면서 몸을 가누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안면신경 손상으로 얼굴을 움직이거나 눈물을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졌다. 이렇게 그녀는 서서히 살아있는 박제(剝製)가 되어갔지만 간신히 수프를 목으로 흘려 넘기며 자신이 녹음했던 음악들을 들었다. 그것만이 그녀가 유일하게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뒤 프레의 건강은 점진적으로 악화되었고 결국 1987년 10월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그녀는 많은 양의 음반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몇몇 녹음을 통해서 음악이라는 바다를 향한 뒤 프레의 열정이 아직까지도 뜨겁게 불타오르고 있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자클린 뒤 프레 - 첼리스트 (명연주자 열전)


 

Jacqueline du Pré : The Heart of the Cello

01. Edward Elgar: Cello Concerto in E Minor, Op. 85: I. Adagio - Moderato
02. Edward Elgar: Cello Concerto in E Minor, Op. 85: II. Lento - Allegro molto
03. Frederick Delius: Cello Concerto, RT VII/7: Allegramente
04. Antonin Dvorak: Cello Concerto in B Minor, Op. 104, B. 191: III. Finale (Allegro moderato)
05. Camille Saint-Saens: Cello Concerto No. 1 in A Minor, Op. 33: I. Allegro non troppo
06. Robert Schumann: Cello Concerto in A Minor, Op. 129: II. Langsam - Etwas lebhafter - Schneller
07. Robert Schumann: Cello Concerto in A Minor, Op. 129: III. Sehr lebhaft
08. Joseph Haydn: Cello Concerto No. 1 in C Major, Hob. VIIb, 1: III. Allegro molto
09. Joseph Haydn: Cello Concerto No. 2 in D Major, Hob. VIIb, 2, Op. 101: II. Adagio
10. Luigi Boccherini: Cello Concerto No 9 in B-Flat Major, G 482: II Adagio non troppo (Arr Grutzmacher)
11. Johann Sebastian Bach: Cello Suite No 1 in G Major, BWV 1007: I Prelude
12. Ludwig van Beethoven: Piano Trio No. 5 in D Major, Op. 70 No. 1, "Ghost": I. Allegro vivace e con brio
13. Ludwig van Beethoven: Piano Trio No. 7 in B-Flat Major, Op. 97, "Archduke": IV. Allegro moderato
14. Johannes Brahms: Cello Sonata No. 1 in E Minor, Op. 38: I. Allegro non troppo
15. Johannes Brahms: Cello Sonata No. 2 in F Major, Op. 99: II. Adagio affettuoso
16. Ludwig van Beethoven: Cello Sonata No. 3 in A Major, Op. 69: I. Allegro ma non tanto
17. Ludwig van Beethoven: Cello Sonata No. 5 in D Major, Op. 102 No. 2: I. Allegro con brio
18. Robert Schumann: Fantasiestucke, Op 73: II Lebhaft, leicht - Coda - Nach und nach ruhiger
19. Cesar Franck: Violin Sonata in A Major, FWV 8: I. Allegretto ben moderato (Arr. Delsart for Cello and Piano)
20. Gabriel Faure: Elegie in C Minor, Op 24
21. Maria Theresia von Paradis: Sicilienne in E-Flat Major (Arr. Dushkin for Cello and Piano)
22. Camille Saint-Saens: Le Carnaval des animaux, R. 125: XIII. Le cyg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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