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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국화에 관한 시 모음 (국화 사진과 함께)

국화가 피는 것은 (길상호)


바람 차가운 날 

국화가 피는 것은, 

한 잎 한 잎 꽃잎을 펼 때마다 

품고 있던 향기 날실로 뽑아 

바람의 가닥에 엮어 보내는 것은, 

생의 희망을 접고 떠도는 벌들 

불러모으기 위함이다 

그 여린 날갯짓에 

한 모금의 달콤한 기억을 

남겨 주려는 이유에서이다 

그리하여 마당 한편에 

햇빛처럼 밝은 꽃들이 피어 

지금은 윙윙거리는 저 소리들로 

다시 살아 오르는 오후, 

저마다 누런 잎을 접으면서도 

억척스럽게 국화가 피는 것은 

아직 접어서는 안 될 

작은 날개들이 저마다의 가슴에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국화 옆에서(서정주)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모두가 들국화 시인이 되게 하라 (김영남)


이번 가을은 농부들 마음 위에서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게 하라. 

그리하여 섬돌 아래에서 사발로 줍게 하라. 

튕겨낼 듯 댓가지 휘고 있는 가을 과일들도 

그 꽉 찬 결실만 생각하며 따게 하라. 

혹 깨물지 못할 쭈그린 얼굴이 있거든 

그것은 저 빈 들녘의 허수아비 몫으로만 남게 하라. 

더 이상 지는 잎에까지 상처받지 않고 

푸른 하늘과 손잡고 가고 있는 길 옆 들국화처럼 

모두가 시인이 되어서 돌아오게 하라.




가을꽃 국화 (안경원)


해는 저만큼 물러서고

들판에 떨어져 남은 낟알들 위에

서리 하얗게 내리고

굴참나무 숲은

그 많은 잎을 다 쏟아내고 있다.

하루하루 도토리 여물고

하루하루 강물 차가워질 때

살아있음의 절정에 닿는

가을꽃 국화

땅의 열기 식도록

향기 담고 있다가

사람들 무채색의 시간을 덮으며

한 뼘씩 점령한다

남아있는 날들을 물들인다.


들국화 (김용택)


나는 물기만 조금 있으면 된답니다

아니, 물기가 없어도 조금은 견딜 수 있지요

때때로 내 몸에 이슬이 맺히고

아침 안개라도 내 몸을 지나가면 됩니다

기다리면 하늘에서

아, 하늘에서 비가 오기도 한답니다

강가에 바람이 불고

해가 가고 달이 가고 별이 지며

나는 자란답니다

그렇게 세월이 가고

찬 바람이 불면

당신이 먼데서 날 보러 오고 있다는

그 기다림으로

나는 높은 언덕에 서서 하얗게 피어납니다

당신은 내게

나는 당신에게

단 한번 피는 꽃입니다


국화 (권영민·시인)

  

꽃이 필 무렵 

첫눈 내린다는 소식을 듣는다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하다가 

그리움이 이울기 전 

돌아누운 그림자 

한아름 모두어 향을 피운다 

코끝에 차오르는 너의 향기 

새하얀 무서리 밟고 

여윈 계절 아쉬워 눈물 흘린다. 




국화꽃 아래 눕다 (김영철)


어릴 적 가지고 놀던 

빨강 노랑 유리구슬 

이 가을에 하나하나 

꽃으로 꽃으로 피어난다 


노란 구슬 꽃이 되어 

가을 하루 열리고 

초록구슬 꽃잎 벌려 

추억 하나 생각 진다 


올망졸망 꽃 구슬 

하나, 둘 세어보다 

끙! 

그만 국화꽃 아래 눕다. 



국화잎 베개 (조용미)


국화잎 베개를 베고 누웠더니

몸에서 얼핏얼핏 산국 향내가 난다


지리산 자락 어느 유허지 바람과 햇빛의 기운으로 핀

노란 산국을 누가 뜯어주었다

그늘에 곱게 펴서 그걸 말리는 동안

아주 고운 잠을 자고 싶었다


하얀 속을 싸서 만든 베개에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아픈 머릴 누이고 국화잎 잠을 잔다


한 생각을 죽이면 다른 한 생각이 또 일어나

마른 산국 향을

그 생각 위에 또 얹는다


몸에서 자꾸 산국 향내가 난다

나는 한 생각을 끌어안는다



국화꽃을 따다 (김규리)


햇볕과 맑은 바람에 

잘 그을린 

국화를 고른다 

그리움이 꿈틀거리는 

향내를 최대한 숨기고 있는 

국화꽃을 딴다 

국화차로 거듭나기 위해 

누군가의 손에 간택되어 질 때까지 

다음 생을 침묵으로 마감하며 

태양과 호흡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가을의 뜨락에서  

청춘을 바치고 

비로소 빈 들녘처럼 떠나갈  

아름다움이여, 

꽃술을 흔들며 

그 흔한 고독을 느껴 볼 겨를도 없이 

나의 찻잔 속에서 

윤회의 고통을 우려내고 있다



국화차(菊花茶) 한 잔 (이인혁)


생명이 꿈틀대는 

엷은 초록 빛깔처럼 

곱고 깊은 맛, 뒤끝이 깨끗한 삶을 위해 


차 한 잔 앞에 놓고 

뜨거운 물 속에 차 잎을 띄운다. 


채 우려내지도 못한 

차 잎의 떫은맛 같던 날들은 

국화의 향기로 짙어지고 

진솔함으로 잘 우려낸다. 


국화차 한 잔, 

연노랑 빛 따스함이 스며 나온 

담백하면서도 향긋한 여운이 남는 

삶을 음미하며 


은근하면서 잔잔하게 

우려낸 국화차 한 잔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엷은 초록 빛깔처럼 

곱고 아름다운 얼굴을 보노라면 

오랜만에 가슴이 더워진다. 


노란 국화 한 송이 (용혜원)


가을에 사랑하는 이를 만날 때는

노란 국화 한 송이를

선물하세요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가

두 사람을 더 가까이

있고 싶어지게 만들어줄 거예요


깊어만 가는 가을밤

서로에게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불어오는 바람도 포근한

행복에 감싸게 해줄 거예요


밤하늘의 별들도

그대들을 위해 빛을 발하고

밤길을 밝혀주는 가로등도

헤어지기 싫어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알고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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