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른 날 - 서정주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푸르른 날’은, 릴케의 ‘가을날’에 견줄 수 있는 명시다. 릴케가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가을날을 노래했다면 서정주는 우리민족 고유의 토속신앙으로 가을날을 노래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걱정은 잠시 사라지고 마음은 서글퍼진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 기쁘거나 달뜬 마음이 아니라 서글픈 마음이 앞서는 것은 민족적 한(恨)의 정서가 피에 흐르기 때문이라고 서정주는 진단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멀리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고,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밖에 모든 그리움을 그리워하자고 시인은 노래한다. 외로움을 탄다는 건 홀로 쓸쓸한 것이지만 그보다는 그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한 상태이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든’ 서럽도록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고 노래한다.
‘푸르른 날’은 송창식의 노래로 더 유명해졌다. 가수 송창식이 작곡하고 노래한 ‘푸르른 날’은 시인들의 시 가운데에서 가장 노래가사로 알맞은 시 1위로 뽑혔다. 이 시는 설움과 함께 후련함을 동시에 준다. “저기 저기 저, 가을 꽃 자리/ 초록이 지쳐서 단풍이 드는데”는 이 시의 절창이다.
《서정주에 대하여》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태어나 2000년 12월 24일 사망 때까지 10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14세에 서울로 상경해 중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학생 시절에는 사회주의 이념에 감화되어 빈민운동에 투신하였으나 실패하고 감옥에 투옥된 전력도 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라는 시로 등단, 1941년 ‘화사’, ‘자화상’, ‘문둥이’ 등의 시가 포함된 〈화사집〉을 출간했다. 이 시기에 미당은 오장환, 이용악과 함께 한국 시단의 3천재로 불리며 사람들의 기대를 받았다. 이후 그는 ‘다쓰시로 시즈오’ 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바꾸고 친일 활동을 시작했다. 물론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 논란은 당시 예술가 상당수가 그러했고, 이에 대한 옹호 여론도 있지만, 일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참여 시인’들의 활동과는 분명 대조되는 부분이다.
1942년 매일신보 ‘시의 이야기’라는 평론을 비롯해 ‘인보정신’, ‘마쓰이 오장 송가’, ‘항공일’ 등의 시, ‘스무살된 벗에게’라는 수필, ‘최제부의 군속지망’이라는 소설, ‘보도행’이라는 르포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친일매국행위를 하였다. 권력에 굴종하는 미당의 행적은 해방 후에도 지속되었다. 이승만 정권 초 그를 기리는 이승만 박사 전기를 완성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친군부적 색채를 확연히 드러냈는데 1986년에는 전두환의 56세 생일을 기념하는 축시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1987년 4.13 호헌조치 때는 ‘위대한 구국의 결단’이라는 발언을 남겼다. 서정주는 학생 운동을 비난하였고, 이는 운동권에서 큰 반발을 불러왔다.
그러나 미당은 동시에 ‘귀촉도’, ‘국화 옆에서’, ‘춘향의 말’, ‘질마재 신화’ 등 현대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시들을 발표했다. 서정주는 문학 작품을 쓸 때 현재도 따라갈 사람이 없는 수준의 단어 구사와 소재 선택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논란이 되는 시기 이외의 작품에서는 순수 문학적 색채를 지향했으며, 소재로 전통적 요소들을 많이 차용한 것으로도 높이 평가받는다.
노년의 미당은 과거의 행동에 대해 부끄럽게 여긴 것으로 보이지만, 안타깝게도 진심 어린 참회 대신 “일제 지배가 몇백 년은 더 갈 것 같아 체념하며 친일 시를 썼다.”는 상황론으로 자신의 친일을 변명했다. 1992년 <시와 시학>에서도 “쓰라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라며 끝끝내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하였다. 더구나 서정주는 현실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한 지식인이 아니라 20대 초보 시인 때 부터 자발적으로 친일에 나섰다. 카미가제를 대놓고 찬양한 그의 대표적인 친일 작품 ‘마쓰이 오장 송가’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반면 서정주의 친일 활동이 지나치게 주목받았다는 관점도 있다. 실제로 그는 처녀시집 <화사집>에 ‘바다’와 같은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띤 시를 남겨왔으며, 고등학교 시절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했다가 감옥까지 갔다 왔던 적이 있는 등 애국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나 그가 조선일보 폐간사에 실으려고 썼었던 작품 ‘행진곡’은 후에 민족주의적인 열망을 고취했다는 혐의를 받아 1944년 그가 친일파로 전향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때까지 감옥살이하게 하였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 미당의 작품엔 그의 재능과 그의 인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미당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에 따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