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 김광섭 -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하나 나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집「겨울날」(창작과비평사 1975년) |
3연 11행의 그리 길지 않은 시이지만, 별과 나와의 관계를 통해 친밀한 관계 회복의 소망을 드러내는 이 시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 관한 깨달음을 다룬 시로도 해석할 수 있다.
1연에서 시인은 별과 나와의 특별한 만남을 이야기한다. 많은 중에 별하나가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그 별을 쳐다 보는 것이다. 이렇듯 별과 나는 특별한 만남을 가지게 된다.
2연에서 밤이 깊어갈때까지 지상과 하늘에서 서로 쳐다보고 내려다보는 연인과 같은 둘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서히 사라져가게 된다. 저 하늘의 '시인만의 별'은 새벽이 가까울수록 빛을 잃어가고, 지상의 '별만의 시인'은 이제 신새벽의 아직 어두컴컴한 가운데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3연의 마지막 구절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이보다 더 의미심장한 구절은 없는것 같다. 지난 밤에 지상과 천상에서 운명적으로 맺어진 '나'와 '너'의 관계는 이제 끝난 것이 아니다. 비록 짧은 하룻밤의 만남이었지만, 서로 간에 정을 쌓은 '너 하나'(별)과 '나 하나'(시인)는 영겁의 시간 속에서 다시 만나는 관계로까지 이어진다. 무한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이어가는 숙명적 존재가 바로 우리들이다.
이 시는 대구와 대조를 사용하여 시적 상황을 드러낸다. 대구법은 서로 유사한 구절을 병치하여 짝을 이루어 강조하는 기법으로 이 시에서는 1연과 2연에서 별과 나에 대해 대구법을 이용해 표현함으로써 화자가 나타내려는 바를 강조하여 나타내고 있다. 또한 유사한 문장구조와 동일한 단어의 반복으로 의미를 강조하고 운율을 형성하고 있다.
이 시는 화가 김환기에 의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란 그림으로 재탄생한다. 시인 김광섭과 화가 김환기. 1960년대 서울 성북동에서 이웃사촌으로 살았다. 문학을 사랑했던 화가는 조병화 서정주 등 여러 시인들과 교유했다. 그중에서도 중동학교 선배이면서 8살 많은 김광섭 시인을 무척 존경하고 따랐다.
1964년 김환기 화백은 뉴욕으로 떠났고 이후 시인과 화가는 서신을 주고받으며 문학과 예술 담론을 이어 갔다. 그러던 1970년 어느 날 김환기 화백은 서울의 친구 김광섭 시인이 뇌졸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 슬픔에 빠진 화가는 서울의 시인 친구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붓을 들었다.
그림 제목은 김광섭의 시 마지막 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에서 따왔다. 김환기의 점화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또한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난 1980년 김광섭의 시 '저녁에'는 유시형과 유의형으로 구성된 형제 듀엣 '유심초'의 노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재탄생한다.
가수 유심초는 이 노래 덕에 1981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남자부문 신인가수상을 수상했다. 지금까지도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며 유명세를 타는 명곡이다. 이렇듯 잘 지어진 시 한 편은 화가의 붓과 캔버스에서 '명화'로, 가수의 목청과 음표를 빌어 '명곡'으로 재탄생하며 생성을 거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