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전체이름은 '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이지만 본명보다는 출신지에서 따 온 카라바조(Caravaggio)라는 이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카라바조는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물로 르네상스 회화 양식을 마감하고 바로크 회화의 시대를 개척한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후술하는 것처럼 매우 막장스러웠던 인생사 때문에 오랫동안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묻혀 있었던 화가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과 화가의 길
카라바조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작은 마을 ‘카라바조(Caravaggio)’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전체 이름인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에서 사실 그의 이름 부분은 ‘미켈란젤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이름 유래와 같이, ‘카라바조의 미켈란젤로’라는 뜻을 가졌다.
우리가 ‘미켈란젤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명한 화가가 있는데, 그렇다. 카라바조는 르네상스 미술을 대표하는 조각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와 동명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유명한 사람의 이름을 따 자식의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았다.
카라바조는 미술을 공부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와 그의 가족은 얼마간 밀라노에서 살았으나 1576년 페스트가 밀라노를 덮치자 고향인 카라바조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 때 카라바조의 부친과 형제중 일부는 결국 페스트로 세상을 떠났다. 페스트가 가라앉은 후 밀라노로 돌아온 카라바조는 미술에 대한 재능을 인정받아 13살이었던 1584년에 밀라노의 화가 시모네 페테르차노의 공방에 견습생으로 들어간다. 그렇게 6년이 지난 1590년,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저 그림밖에 그릴 줄 모르는 카라바조는 생계를 위해 고향을 떠나 대형 종교 건축물과 미술 수요가 급증하던 로마로 이주하게 된다.
로마에서의 삶
밥벌이를 위한 그림으로 로마의 주세페 체사리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던 어느 날, 당시 메디치 가문의 정치적인 대변인이자 로마를 책임지고 있던 델 몬테 추기경의 눈에 들면서 그의 인생이 바뀐다. 카라바조는 초기 종교화를 주로 그렸다.
빛과 어둠을 기반으로 한 카라바조의 그림은 곧바로 로마 최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진다. 기존의 성화 양식인 이른바 ‘메너리즘(Mannerism)’은 이미 식상해진 상태였다. 빛과 어둠을 통한 순간 포착과, 보통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된 성화는 로마 시민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카라바조의 그림은 단순히 당대의 인기작 수준을 넘어 유럽 미술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바로크 회화의 개척자가 바로 카라바조이며 미술사적으로 전무후무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화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망 이후 오랫동안 묻혀 있어야 했던 이유는 그의 생애가 가히 한 편의 피카레스크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막장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는 미술 분야에서는 승승장구했으나 성격이 매우 불안정했던 탓에 사생활 측면에서는 진정한 사고뭉치였다. 1600년대 초 로마는 신도시 건축붐과 함께 ‘세기말적 현상’이 지배했다. 바티칸 주변을 제외하면 도시 전체가 거대한 ‘유곽(遊廓)지대’였다고 보면 된다. 성과 속이 공존하는 도시, 로마의 밤은 유럽 전역에서 몰려온 창녀들로 들끓었다. 카라바조는 성(聖)으로서의 그림을 그린 뒤, 속(俗)으로서의 창녀들과의 욕망을 ‘마음껏’ 발산했다. 카라바조는 남녀 불문하고 성적 관계를 즐기는 양성애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술버릇은 고약하기로 악명이 높았는데 이 때문에 가는 곳마다 물의를 일으키고 폭행사건을 일으켰다. 게다가 그는 호신용이라는 명분으로 칼과 같은 무기를 품고 다녔는데 기분이 좀 나빴다 하면 바로 이 흉기를 꺼내서 휘둘러댔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아꼈던 델 몬테 추기경과 고위 성직자들은 그가 사고를 칠 때마다 이를 수습하고 적당히 사면해주었는데, 이런 관대한 조처가 역설적으로 그의 막장행각을 더욱 부추겼던 측면이 있다. 사고를 쳐도 누군가가 알아서 처리해 주니까 더더욱 거리낌 없이 행동을 하게 된 것. 천재 예술가 중에 사생활이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 많긴 하지만 카라바지오는 이 중에서도 최상급의 막장이었다. 그의 작품이 보여준 엄청난 작품성과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무명 화가로 묻혀 있었던게 이상하지 않을 수준.
1606년 결국 그는 살인사건을 저지르는데, 로마에서 소문난 양아치였던 라노치오 톰마소니라는 사람과 다투다가 그를 찔러 죽이고 말았다. 알고 지내던 여자에 대한 품평을 하다가 시비가 붙었다고도 하고 테니스와 비슷한 경기를 하다가 싸움이 벌어졌다고도 하는데, 여튼 별것도 아닌 사소한 시비였지만 둘 모두 성격이 개차반이었던 탓에 살인사건으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높으신 분들이 수습을 하려고 했으나 사안이 단순 폭행시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살인사건인데다 톰마소니의 집안이 로마에서 꽤 잘나가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이번 만큼은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결국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당시 최고형인 ‘Banda capitale’, 즉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곧바로 탈옥해 현상금이 걸린 채 로마를 떠나 도주자 신세가 되었다.
몰타와 나폴리로의 도주
다행히 안전하게 나폴리로 도주한 그는 위급한 상황에서도 다시 그림을 그렸고, 그때 완성한 작품이 1607년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이다. 그러나 나폴리에서도 또 한 번 시비가 붙어 폭행을 저지르고 만다. 그에 대한 현상금과 안 좋은 소문으로 이탈리아 대륙에서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지자, 그는 바다넘어 몰타 섬에 안착했다. 그곳은 아직 그에 대한 범죄이력 소식이 닿지 않은 곳이었으며, 오히려 작품 ‘메두사’의 명성만 존재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아무것도 몰랐던 몰타 사람들은 카라바조를 반겼고 그에게 그림을 의뢰했다. 카라바조의 계획은 그림으로 몰타기사단에게 인정을 받아 기사 작위를 받아 교황에게 살인범죄를 사면받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1608년 그의 대표작 ‘세례 요한의 참수’가 완성된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참수’을 본 몰타 기사단은 가로 길이 5m가 넘는 대형 작품으로 섬세한 그의 예술적 감각에 만족하며 기사 작위를 수여했다.
그러나 그는 그 못된 성질을 버리지 못하고 또 사고를 치고 만다. 몰타 기사단의 일원과 술을 마시던 도중 시비가 붙어서 그에게 중상을 입힌 것. 그는 감옥에 갇힐 위기에 처하지만 그간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줬던 콜로나 가문의 도움으로 이번에도 간신히 몰타섬에서 도주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는 톰마소니 가문 뿐만 아니라 몰타 기사단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도피생활은 더욱 힘들어졌다.
몰타섬을 떠난 카라바조는 일단 시칠리아의 도시 시라쿠사에 있는 옛 친구의 집으로 갔다. 하지만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기 때문에 다시 나폴리로 떠났다. 1609년 나폴리에서 자객에게 습격을 당했는데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거의 얼굴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때 부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죽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후 카라바조는 1610년 여름 피렌체로 가기 전 잠시 들렸던 포르토 에르콜레 해변에서 사망하고 만다. 사망원인은 확실하게 알려지지 않았는데, 풍토병에 걸려서 급사했다던가 암살을 당했다던가 하는 추정만 난무하고 있다.
그가 피렌체로 가는 도중에 로마에서 교황 바오로 5세가 그를 사면했지만 카라바조가 이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 당시에는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참 도피중이었던 카라바조가 이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던 것. 결과론이지만 만약 그가 피렌체가 아니라 바로 로마로 갔다면 객사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새 시대를 연 예술가
13세에 화가의 길로 들어선 카라바조는 테네브리즘(Tenebrism)이라는 명암표현법의 창시자로 그림 대부분을 암흑에 가깝도록 어둡게 처리하고 주인공과 그 주변에 빛이 떨어지도록 하는 기법을 처음 시도하였다. 이는 연극의 스포트라이트처럼 대상을 집중 조명함으로써 극적 효과를 노리는 방법이다. 이는 인물표현이 아닌 내면적 심리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기법이며 인간의 내면 표출에 대한 예술가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탄생하게 된 기법이다. 후에 렘브란트는 카라바조에게 크게 감명받아 그의 작업에 빛을 주제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한 그는 가톨릭교회가 사람들에게 이상적인 기독교적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추구하는 화풍을 버리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았다. 그는 심지어 16세기 뒷골목을 오가는 불량배, 거지, 매춘부 등을 그림 속에 끌어들여 그들을 예수로, 성자로, 막달라 마리아로 둔갑시켰다. 그가 그린 그림에는 그 어디에도 인간을 초월한 신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
카라바조의 걸작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