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버스에 유채. 63 x 48 cm
Musée Marmottan Monet, 파리
미술사는 모네를 빛의 시대를 연 인상주의의 선구자로 기록하고 있다. ‘빛이 곧 색채’라는 인상주의 운동은 사물을 보는 시각·지각의 근본적 변화를 불러온 19세기 미술의 큰 혁명이었다. 그 전까지 빛은 명암 대비를 위한 것이지 빛 그 자체로 주목받지 못했다. 자연 풍경이나 사물을 보되 머릿속에 고정된 것이었고, 화가의 재능은 대상을 얼마나 정확하게 되살려놓는가에 있었다. 그러나 인상주의는 빛을 통해 끊임없이 변하는 순간의 인상을 표현함으로써, 공간의 예술로 통했던 회화에 시간성을 도입했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1874년 제1회 인상파 전시에 나온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에서 유래했다. 해가 막 솟아오르는 순간, 불그스름한 해의 기운이 쓰며들어 강물이며, 사람이며, 건물 모두를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모네는 해가 막 솟아오르는 순간의 인상을 순식간에 그려 나타내었다. 희뿌연 아침 안개와 빛으로 물드는 일출의 바다는 마치 세포 분열처럼 빠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사물(풍경)의 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창조보다 빛에 의해 시시각각 달라지는 사물의 아름다움을 찾고 잡아낸 것이다.
클로드 모네
1840년 11월 14일 파리 9번구 라피트가 45번지, 아돌프와 루이스 쥐스틴 모네 부부 사이에 둘째 아들, 클로드 오스카 모네(Claude Oscar Monet 1840~1926)가 태어났다. 사업가인 아버지와 가수였던 어머니와 함께 유년 시절을 보낸 모네는 특히 어머니에게 깊은 음악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모네가 다섯 살 때 가족은 프랑스 서북 해안 노르망디의 항구도시 ‘르 아브르’로 이사했다. 그에게 교육과 규율은 천성적으로 몸에 맞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감옥 같은 곳이었다고 고백할 정도로 반항아였다.
캐리커처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모네는 풍자화를 전시하곤 했었는데, 덕분에 르 아브르에서 서서히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즈음 운명적인 화가 외젠느 부댕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의 나이 당시 서른 살이었다. 부댕과 함께 야외로 나가 작업을 하면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피부로 경험할 수 있었다. 부댕은 모네에게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쳤고 모네는 이내 ‘빛이란 곧 채색’이란 것을 깨달았다.
1883년 모네는 가족과 함께 파리에서 서북쪽으로 64km 가량 떨어진 센 강의 합류점에 위치한 지베르니에 정착하게 된다. 지베르니를 사랑한 모네는 “수면 여기저기 떠다니는 딸기처럼 수줍고, 하얀 꽃잎들로 둘러싸인 한 송이 백합의 마음과 같은 곳”이라고 지베르니를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전원이나 가옥은 어디에서도 다시 찾아볼 수 없다고 확신한다며 이곳에서 무려 250여 점이라는 엄청난 작품의 「수련」연작을 완성했다.
지베르니는 그가 영감을 얻는 모든 것의 원천이 되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지베르니에서 무려 43년을 머물며 인상주의의 시작과 끝을 함께 하는 인상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인상, 해돋이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1872년 11월 어느 날 프랑스 북부 영국해협과 센 강이 만나는 당시에는 무역의 중심지 항구로 번창하던 르 아브르(Le Havre) 항구를 찾았다. 이 곳은 특별한 장소, 그가 유년 시절부터 고등학교시절까지 지냈던 고향이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간 전쟁이 프랑스의 패전으로 끝나 프랑스는 정치적으로 암울한 분위기가 엄습한 반면에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의 기운으로 항구가 약동하는 시대였다. 모네 자신에게도 역경과 희망이 교차하던 시기였다.
그는 1870년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결혼하는 바람에 아버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다. 전쟁의 여파로 영국으로 피신해 그곳에서 피사로와 만나 그림을 그리면서 여행을 다녔다.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이미 1년전에 돌아가셨고, 여러 도시들은 폐허상태나 다름없었다. 그가 고향인 르 아브르를 찾았을 당시의 심정은, 아버지의 죽음과 전쟁의 상처로 인한 비참함, 미래에 작가로서 불안감이 깊었을 것이다. 여러모로 인생의 중요한 전환기가 되는 힘든 시기였다.
1872년 모네는 호텔 창가에서 에트르타 바다와 르 아브르 항구의 풍경을 화폭에 담은「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란 제목을 붙인 불멸의 명작을 그리게 된다. 모네는 재빠른 터치로 일출 장면을 포착해 여러 색깔의 물감을 사용할 시간도 없이 짙푸른 회색과 떠오른 태양을 주홍빛으로 표현하며 그림을 완성했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의 도날드 올슨 천문학 교수는, 이 그림과 천문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당시 모네가 현지 시각으로 1872년 11월 13일 오전 7시 35분의 순간을 화폭에 옮겼을 것이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림의 좌측 하단에 모네의 서명과 함께 72라는 숫자가 눈길을 사로잡는데 그림을 그린 연도다. 일부에서는 이 그림이 그려진 연도가 1873년으로 알려져 있지만, 72라는 서명을 보면 1872년임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모네의 눈에 비친 르아브르 항구의 일출은 안개 낀 푸른 진회색의 바다 빛깔이었다. 그리고 왼쪽에 미끄러져 가는 세 척의 노 젖는 배 사이에서 묘한 조화를 이루며 아침 해는 느리게 떠오르고 있다. 오른쪽 항구 부두에서는 크레인으로 화물을 선체에서 하역하고 있다. 산업혁명으로 분주한 증기선 너머의 공장 연기는 당시의 시대상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증기선과 공장의 연기 그리고 노젓는 배의 느린 흐름, 과거를 상징하는 노젓는 배와 현재를 상징하는 증기선과 공장의 굴뚝 연기는 각각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한 공간에 녹아 있다.
그림의 구도는 의도적으로 균형이 맞지 않아 중심이 있고 대칭적인 구도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거부한다. 이 그림은 캔버스 중앙보다 약간 위에 수평선이 있어 구성을 두 개의 뚜렷한 섹션으로 나눈다. 그림의 윗부분은 떠오르는 태양이 중앙 무대를 차지하는 하늘을 묘사한다. 태양은 하늘 전체에 퍼지고 물 표면에 반사되는 따뜻한 빛을 발산하는 빛나는 주황색 구로 표현된다. 하늘 자체는 부드러운 붓놀림과 섬세한 블렌딩이 혼합되어 일출의 변화하는 색조를 만든다. 그림의 아래 부분은 다양한 범선과 증기선이 묘사된 물이 지배하고 있다.
「인상, 해돋이」의 전체적인 구성은 세부 표현보다 빛, 색상 및 분위기의 유희를 우선시한다. 아침 항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사실 사진 그 자체는 아니다. 모네가 그림을 그렸던 호텔 창가에서 보면, 원래 왼쪽에는 눈에 거슬리는 집이 있었다고 한다. 모네는 그 집을 일부러 그리지 않았다. 인상파의 그림은 있는 그대로는 표현하는 사진은 아니기 때문이다.
모네의 의도는 문자 그대로의 묘사를 제공하기보다는 정서적, 감각적 경험을 강조하여 장면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전달하는 것이었다. 「인상, 해돋이」라는 제목 자체가 그 장면을 문자 그대로 묘사하기보다 그 장면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전달하려는 모네의 의도를 반영한다. "인상"이라는 용어는 작가가 포착한 순간의 덧없는 속성을 의미하며,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감각과 감정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둔다.
흔히 모네를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한다. 그런 평가의 배경에는 그가 인상주의를 이끈 중요한 구성원 중 한 명이었을 뿐 아니라, 아마도 「인상, 해돋이」작품을 통해 인상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폭제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상, 해돋이」는 그림이 완성된 후 2년이 지난 1874년 공식 살롱전과 독립적으로 주최한 제1회 전시회에서 처음으로 전시된다. 당시 프랑스 사진작가로 유명한 나다르의 스튜디오를 배경으로 한 전시회에는 르느와르, 드가, 피사로 등 이후 인상파로 불리는 작가들 뿐 아니라 조각가 등도 참여했다. 30명의 작가가 모두 165점의 작품을 출품했고, 입장료가 있는 유료 전시였다.
전시는 1874년 4월 15일~5월 15일까지 당시 파리 카푸신(capucines) 대로의 나다르 스튜디오에서 열렸다. 전시장 내부도 여느 전시장과는 배치가 달랐다. 당시의 파리 기성 화단을 벗어난 전위 예술가들의 전시인 만큼 작품의 배치가 민주적이었다. 심지어 작품들이 공정하게 배치될 수 있도록 규약을 정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젊고 덜 알려진 신진작가들의 작품을 맨 위에 두었다. 작품을 여러 층으로 걸지 않고, 두 줄로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작은 그림은 아래에, 큰 그림은 위에 배치해 관람객들의 편의를 배려했다.
「인상, 해돋이」작품은 이 전시회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랄한 혹평을 받았다.
미숙한 벽지조차도 이 해안 그림보다는 더 완성적일 것이다.
날로 먹는 장인정신의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것이 그림인가?
비평가 루이 르로이는 이렇게 모네를 힐난하며 조롱하고 비웃었다. 풍경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순간의 느낌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이유였다.
그럼에도 모네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빛’의 이미지를 그리는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 모네는 「인상, 해돋이」를 그린 후 그림에서 나온 아이디어와 기법을 계속해서 탐구하고 개발했다. 이 작업의 성공과 인정은 그가 후속 작업에서 빛과 분위기의 일시적인 효과를 포착하는 데 더 깊이 몰두하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루앙 대성당(1892-1894)에 대한 그의 시리즈는 대성당 파사드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빛과 대기 조건을 포착하는 데 대한 그의 매력을 보여준다. 말년에 모네는 지베르니에 있는 자신의 정원에 관심을 돌렸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수생 정원을 일구었습니다. 그는 상징적인 일본 다리, 수련 및 주변 초목을 광범위하게 그렸다.
"인상주의"라는 용어 자체는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돋이」에 대한 비평가의 냉소적인 논평에서 파생되었으며 결국 전체 운동의 이름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인상주의는 학문적 예술의 엄격한 규칙과 기법을 거부했다. 그들은 장면을 꼼꼼하게 복제하기보다는 장면의 "인상"을 포착하는 데 집중했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및 피사로를 포함한 인상파 예술가들은 느슨한 붓놀림, 생생한 색상, 빛과 움직임의 순간적인 특성을 포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순간의 감각적 경험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일상 생활, 풍경 및 도시 환경의 장면을 자주 그렸다.
인상파는 처음에는 예술계의 상당한 저항에 직면했지만 점차 인정과 수용을 얻었다. 회화에 대한 그들의 혁신적인 접근 방식은 이후의 예술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미술의 발전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전시회를 통해 「인상, 해돋이」는 조롱 대상이 되어 유명해졌지만, 전시 기간 주목받은 모네의 작품은 따로 있었다고 한다. 바로 모네의 카푸신대로(Boulevard des Capucines) 그림이다.
모네의 작품 「카푸신대로」는 인상파의 첫 전시가 열렸던 나다르의 스튜디오가 있는 파리의 번화가대로 풍경을 담은 그림이다. 많은 거리의 사람들과 생기 넘치는 카푸신대로는 인상파 화가들에게는 인기 있는 소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모네는 이 그림의 판매가를 1000프랑으로 책정했지만 팔리기는 800프랑에 팔렸다고 한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는 1874년 인상파의 첫 전시회가 끝난 후, 열렬한 후원자이며 당시의 파리 백화점을 경영하던 에른스트 호세데(Ernest hoschede)에게 800프랑에 판매됐다. 당시 파리의 의사나 변호사 연간수입이 9천 프랑 내외였다고 하니, 이 작품의 판매가는 변호사나 의사의 한 달 수입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러나 구매자였던 백화점 주인 호세데는 그림을 구매한지 몇 년 후 파산했다. 압류됐던 「인상, 해돋이」는 경매를 거쳐 1878년 고작 210프랑에 팔렸다.
이때 구매자는 조르주 벨리오 박사였다. 이 그림은 그가 사망한 1894년 그의 딸이 물려받아 1940년 파리의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Musée Marmottan Monet)'에 기증됐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Musée Marmottan Monet)'은 모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절대 놓칠 수 없는 장소이다. 바로 이곳에 서양미술사에서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인 「인상, 해돋이」, 빛의 변화를 잘 그려내며 천재성을 보였지만 모네로 하여금 수없이 악몽을 꾸게 했던 ⌈루앙 대성당⌋, 모네에게 유명세를 안겨준 ⌈수련⌋ 연작 시리즈 등 인상파 화가 모네의 많은 작품을 한 번에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상, 해돋이」는 지난 1985년 10월 27일 모네미술관에 침입한 권총강도 손에 도난당했으나, 1991년 12월 5일 코르시카에서 발견돼 다시 미술관에 돌아왔다. 그 화제성이 더해지면서 다른 인상파의 그림까지 가격이 치솟았다. 2019년 5월 소더비 경매에서는 모네의 「건초더미」그림이 1억1천여만 달러에 낙찰되었고,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이 2012년 2월 경매에 나와서 2억5천여만 달러에 거래돼 화제가 되었다.
전문가들은 모네의 <인상, 해돋이>에 대해 미술사적 중요성과 명성을 고려해 3억 달러(한화 3300억 원) 내외로 가격을 추정한다. 1874년 최초 전시 때 800 프랑에 팔렸고 경매후 210 프랑에 다시 팔린 그림의 현재 가격이 3300억 원 내외로 추정되고 있으니, 미술품 투자의 측면에서는 최고의 투자 미술품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