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음악/올드가요

[가요명반] 시인과 촌장 [푸른 돛] (1986)

想像 2022. 8. 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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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돛(1986)
시인과 촌장


 

1. 푸른 돛
2. 비둘기에게
3. 고양이
4. 진달래
5. 얼음무지개
6. 사랑일기
7. 떠나가지마 비둘기
8. 매
9. 풍경
10. 비둘기 안녕

 


“너무 많은 바람이 불었나 봐.” 시인과 촌장의 두 번째 앨범 [푸른 돛]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들을 저 망망대해로 밀어냈던 바람은 몇 년 동안의 응축을 한방에 토해낸 언더그라운드의 파도, 그리고 그 누구도 내일을 그릴 수 없게 만들었던 1980년대라는 엄혹한 배경이었다. 그래서 음반의 탄생은 필연적으로 모순적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의 부조리를 한껏 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이들은 천진난만한 희망도 아닌, 깊이를 모를 어둑한 심연도 아닌, 그 사이의 어떤 곳으로 향한다. 도착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쓸쓸한 항해. 그러나 두 예술가는 끊임없이 주변을 돌아보았고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어쩌면 [푸른 돛]의 구상은 소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물과 대지를 가르며 반짝였던 음악은 찬란했다. 그 음악은 이 세상이 숨쉴 공간 없는 부조리의 왕국만은 아님을 알려주었다. 섬세하게 마음을 어루만지는 하덕규의 노랫말과 그 공간을 굳건히 지키는 함춘호의 기타는 아름다움의 극한을 선사했다. 그 속에 붙박인 알레고리와 상징, 은유는 [푸른 돛]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관념이 낙엽처럼 짓밟히던 시대에 하덕규는 자연에, 새들에, 지나가는 행인에 숨을 불어넣었다. 정작 그가 해야 할 이야기는 멀리 있지 않았다. 표면으로 드러난 것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행간에 담겼다.

이에 대해 여러 해석이 나왔지만 [푸른 돛]의 핵심은 ‘살아감’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성찰이다. 필연적으로 고독하고 괴로워하지만 어떻게든 존재의 이유를 탐사하고 타자와 어울리고(‘사랑일기’), 생명을 물으며(‘진달래’), 서로를 위무하는(‘얼음무지개’) 우리네 존재들. 발신된 메시지는 대답이 없고 실패로 귀결되지만(‘떠나가지마 비둘기’), 화자는 대상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풍경’)을 감추지 않는다. 끝내 희망을 버려야 하는 시점에서도 그는 “이제 너는 슬프지 않을 거야”(비둘기 안녕)이라고 말한다. 더 나은 삶을 찾겠다는 절박한 의지였다. 박제된 채 죽지 않겠다는 신념이었다. 공동체의 재건을 향한 믿음이었다.

요컨대 [푸른 돛]은 혁명가였다. 정치적인 혁명가라기보다는 차라리 삶의 방식을 묻는 혁명가였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겠어? 인류가 살아온 이래 끝없이 반복되어 왔던 거대한 물음. 그 질문은 때로는 유약하게(‘사랑일기’), 때로는 강렬하게(‘비둘기 안녕’) 전달된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푸른 돛]은 포크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것은 포크를 토대로 포크 록, 사이키델릭, 발라드, 팝까지 외연을 확장했다.

“비둘기 안녕.” [푸른 돛]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그들이 안녕을 고했던 대상은 사회 현실이거나, 멀리 떠나간 친구, 혹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렇듯 예술은 덧없고, 음반이 끝나는 순간, 잠시나마 만들어졌던 판타지는 막을 내리게 된다. 하지만 [푸른 돛]은 상투적이고 지리멸렬하게 마무리되는 여타의 작품들보다 조금 더 오래 빛날 수 있었다. 보편성에 대한 굳건한 신뢰 덕분이었다. [푸른 돛]은 어두웠던 시절을 살아나가야 했던 모든 사람들에 대한 노래였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송가였다. 그러면서도 교설을 피했고 프로파간다에 묶이지 않았다. 그것이 [푸른 돛]이 오랜 시간 살아남아 더 많은 사람들과 공명할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출처 : https://www.melon.com/masterpiece/inform.htm?rank=14&albumId=3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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