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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시인,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또는 Fryderyk Franciszek Chopin)

想像 2020. 10. 19.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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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édéric François Chopin (Fryderyk Franciszek Chopin)
1810년 ~ 1849년


평생 피아노곡 밖에는 쓰지 않았다고 해도 좋을 쇼팽은, 그 분야에 있어서는 영원한 왕관을 쓰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교향곡에 있어서의 베토벤, 실내악곡에 있어서의 하이든, 가곡에 있어서의 슈베르트처럼, 피아노에서의 쇼팽은 분명히 왕자이며 유일자이기도 했다. 그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가을의 달빛을 느낀다. 그것은 창백한 은빛이 교교하게 만물을 비추는 아름다움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의 음악에 몸을 맡기는 모든 사람은, 달빛에 정화되어 고요히 빛나는 마음 속에서 꿈꾸는 듯한 기분이 된다. 그러나 그 환상적인 시인 쇼팽도, 한편으로는 고국 폴란드를 생각할 때 열렬한 애국의 정으로 건반을 피로 물들이는 정열의 시인이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어 교사를 아버지로, 폴란드의 천재적인 피아니스트를 어머니로 하여, 네 아이 중의 하나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와 가까운 젤라조바 볼라에서 태어났다(1810년 3월 1일). 6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여 8세 때 이미 신동으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12세 무렵부터 바르샤바 음악원의 원장에게 이론과 작곡을 배웠고, 아달베르트 지부니에게 피아노 교습을 받았다. 이후 쇼팽은 아무에게서도 정식 피아노 레슨을 받지 않고 작곡에 전념했으며, 1824년에 들어섬과 동시에 갑자기 음악에 몰두하여 그 이듬해에 최초의 작품 「론도」를 출판했다. 1828년 아버지의 친구 야로츠키 박사와 함께 베를린으로 갔는데, 거기서 받은 자극으로 귀국 후 그의 음악 활동은 한층 활발해졌다.

 

20세 때 빈에 나갔는데, 그는 그 곳에서 모국의 슬픈 소식을 받아 들었다. 함께 빈에 나간 친구들이 모국의 위급에 앞을 다투어 귀국할 때 귀국하여 군대에 입대할 수 없었던 그는, 피아노에 의지해서 애국의 열정을 작곡에 기울이는 수 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는 파리로 나갔다. 동경하던 파리는 무명의 천재를 당장 받아들여 주지는 않았다. 그러나 폴란드에 호의를 보였던 프랑스의 사교계는, 얼마 후 섬세하고 고상한 쇼팽의 피아노 연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 다행히도 리스트가 재빨리 이 천재를 인정하여 파리 악단에 소개했기 때문에, 파리는 안심하고 그를 피아노의 명연주가로서 환영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작곡 면에서도 새로 자신의 앞길을 개척해 나가게 되었다.

 

쇼팽이 피아노의 세계에 혁신적인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공로는 참으로 지대하다. 기교와 표현에서 쇼팽의 피아노는 찬연하게 그 진기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름난 칼이 명공의 손으로 다듬어지면 더욱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것과도 같았다. 꿈과 환상에다, 정교하고 치밀함, 풍부한 시의 정신에서 솟아나는 예술의 삼매경, 그리고도 악상이 대담하고 독창적인 쇼팽은 완전히 독자의 세계를 열고 음악의 세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처럼 화려한 존재로서 귀족사회의 살롱에 드나든 쇼팽에게 여성의 접근이 없을 수가 없었다.

 

특히 여류 작가 조르즈 상드와의 교제는 너무도 유명하다. 상드와 쇼팽은 마요르카 섬에서 사랑의 기쁨을 누렸는데, 때마침 결핵을 앓던 쇼팽의 병세는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래도 섬의 한 때를 아끼기라도 하듯이 그는 여기서 많은 주옥같은 명곡을 썼다. 하지만, 화려한 사교 생활을 좋아하는 상드와, 내성적이고 고독에 침잠하는 쇼팽이 언제까지나 이러한 생활을 견딜 수 없었다. 이윽고 파리로 돌아간 두 사람은 마침내 헤어지는 운명이 되었다.

 

한결 같은 예술에의 정진과는 반대로, 결핵은 차츰 쇼팽의 육신을 쇠약하게 하였다. 한때 병세가 조금 회복되어 그는 영국으로 연주여행을 떠났는데, 그것이 그를 과로에 빠뜨려 생명의 등불을 예상 외로 일찍 꺼지게 했다. 1849년 10월 17일, 그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시체는 해부했으며, 2주일 뒤에 마드레느 사원에서 모차르트의 레퀴임이 연주되는 속에서 장례를 치루었다. 유해에는, 1830년에 폴란드를 떠날 때 친구들이 병에 담아 준 조국의 흙에 덮여 페르 라세즈의 묘지에 묻혔다. 또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聖) 십자가 교회에 보내졌다.

 

페르 라세즈에 있는 그의 묘지에는 지금도 향과 꽃이 끊이지 않고,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로 붐비고 있다. 처음에도 말했듯이 쇼팽은 생애를 통해 거의 피아노곡 작곡에 전념했다. 그러나 예외로서, 6개의 관현악곡 · 3개의 소나타 · 3개의 실내악곡 · 17개의 가곡도 있다. 또 즉흥곡 · 뱃노래 · 녹턴 · 마주르카 · 스케르초 · 왈츠 · 폴로네이즈 · 연습곡 · 전주곡 · 발라드 등은 어느 것이나 쇼팽이 개척한 피아노곡 형식이었고, 그 형식 위에 시정이 담겨 정열의 꽃이 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쇼팽 [Fryderyk Franciszek Chopin] (최신명곡해설 & 클래식명곡해설 - 작곡가편, 2012. 5. 31., 삼호ETM 편집부)

 

쇼팽 작품 전체 감상(Chopin Complete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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