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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전주한옥마을 뚜벅이여행 6. 경기전

想像 2011. 9. 8. 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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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마을의 끝에는 경기전이 있다.'경사스러운 터에 지은 궁궐'이라는 뜻을 담은 경기전은 태종 10년(1410년)에 태조 이성계의 어진을 봉안하기 위해 창건됐다.

경기전 정전(慶基殿 政殿)

보물 제 1578호인 경기전 정전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태종 10년(1410년)에 세웠다.

태조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건물은 원래 개성. 영흥. 전주. 경주. 평양 등 다섯 곳에 있었는데, 경기전 정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임진왜란(1592년)때 모두 불에 타버렸다. 경기전 정전도 정유재란(1597년)때 불탔으나, 광해군 6년(1614년)에 다시 세웠으며 회랑을 두어 최고의 사당임을 나타내었다.


조선 태조 어진(朝鮮 太祖 御眞)

보물 제 931호인 이 어진(御眞)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를 그린 초상화이다. 경주. 평양 등지에 모셨던 이성계의 어진(御眞)은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 버리고, 전주 경기전의 어진(御眞)만 유일하게 남아 있다.

이 어진은 고종 9년(1872년)에 기존의 남은 어진을 태워 묻고, 서울 영희전(永禧殿)에 있던 태조 어진을 본떠 새로 그린 것이다.

임금이 국가의 일을 할 때 차려 입은 익선관(翼善冠)을 쓰고 곤룡포(袞龍袍)를 입은 채, 두 손을 가지런히 마주잡고 의자에 앉아있는 태조의 정면 모습이다. 얼굴과 옷 주름을 처리한 음영 기법, 의자와 자리의 화려한 색채, 어깨에 그린 용의 금박 효과 등에서 어진이지만 높은 품격이 보인다. 한 왕조를 세운 인물의 위엄이 시대를 넘어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전주사고(全州史庫)

조선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태종9년)부터 1413년(태종13년)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세종8년)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31년(세종13년) 태종실록 36권을 편찬한 후 태조.정종. 태종의 3조실록 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과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2부의 실록만으로는 그 보존이 매우 걱정되므로 1445년(세종27년)에 다시 2부를 더 등사하여 전주.성주에 사고를 신설하고 각 1부씩 분장했었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때 춘추관.충주.성주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오직 전주사고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손홍록,안의 등이 손경승과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은 소실되었는데, 1991년 이를 복원하였으며, 조선왕조실록(국보 제151호)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기전 경내 모습들


경기전 부속채

경기전을 지키는 수문장이 일을 맡아보는 곳 '경덕헌',  경기전의 제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낮은 직급의 벼슬아치들이 있던 곳 '수복청', 조정에서 참례하기 위해 내려온 관리의 말을 두는 곳 '마청', 제사를 지내기 위하여 지어진 집으로 제각을 맡은 관원들의 재계의식을 하기 위한 곳 '서재', 제향 때 사용하는 각종 기구 등을 보관하는 장소인 '제기고', 제사에 사용할 음식을 만드는 방앗간 '용실', 떡이나 유밀과, 다식 등의 제사 음식을 만들고 보관하는 장소인 '조병청', 제사에 쓸 제수 준비와 제사상 차리는 일을 담당하는 전사관이 사무를 행하면서 제사 준비를 하는 곳 '전사청' 등의 건물이 들어서 있다


전동성당

경기전 부속채에서 바라본 전동성당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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