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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정유재란때 전사한 군관민 합장 무덤《만인의총》

想像 2011. 6. 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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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총(萬人義塚)은 정유재란 때 남원성을 지키다 전사한 군관민을 합장한 무덤이다. 사적 제272호로 전라북도 남원시 향교동에 위치하고 있다.

《만인의총》소개

1597년(선조 30) 화의의 결렬로 재침한 일본군은 호남·호서 지역을 점령한 뒤 북상할 계획을 세웠다. 같은 해 7월 28일부터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대장으로 한 1대(隊) 5만 병력은 사천으로부터 하동을 거쳐 구례로 들어오고, 그 일부는 함양을 거쳐 운봉으로 들어와 남원을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당시 조선·명 연합군도 남원을 경상도·전라도·충청도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 여겨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 방어사 오응정(吳應井),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별장 신호(申浩), 남원부사 임현(任鉉)의 군사 1,000여 명과 명나라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의 군사 3,000여 명이 함께 방어하고 있었다. 8월 13일 일본의 주력군이 남원성을 포위하자, 동문은 양원, 서문은 모승선(毛承先), 남문은 장표(莊表), 북문은 이복남이 지켰다. 14~15일 군관민이 합심하여 싸웠으나, 16일에 중과부적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 양원은 50기(騎)를 이끌고 탈출했으나, 접반사 정기원(鄭期遠)·이복남·오응정·김경로·신호·임현, 통판 이덕회(李德懷), 광양현감 이원춘(李元春)·진안현감 마응방(馬應房)과 명군 이신방(李新芳)·장표·모승선 등은 모두 전사했다. 또한 성을 방어하던 병사와 주민들 1만여 명이 전사했다. 난이 끝난 뒤 시신을 합장했고, 1612년(광해군 4)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8충신을 제향했다. 1964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1971년에 정화작업을 시작하여 1979년 완공했다.

만인의총 입구의 모습이다.


만인의총 입구에 들어서면 탁트인 넓은 광장이 탐방객을 반긴다.


광장 왼편에는 만인의사의 순국을 기리는 순의탑이 서 있다.


사당으로 올라가는 입구


사당으로 올라가는 계단 왼편에는 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안에는 각종 유물과 무기, 당시 항쟁 모습을 담은 기록화가 전시되어 있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성인문 모습이다


만인의사의 위패를 모신 사당 모습이다. 잠시  경건한 마음으로 분향을 하고 순국선열의 얼을 기린다


사당 뒷편에는 만인의사 합장한 봉분 즉 만인의총이 자리잡고 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다시 내려 오는 길에 내려다 본 남원시내 모습이다


남원관광시 자녀들에게 역사교육 차원에서 한번쯤 들러볼 만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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