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영화 내내 감동의 연속, 휴먼 다큐 《울지마 톤즈》

想像 2011. 1. 17. 0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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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태석 신부의 생애를 그린 휴먼 다큐영화 《울지마 톤즈》가 관객 30만 명을 돌파하며 흥행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워낭소리’에 이어 역대 한국다큐영화 관객동원 2위의 성적이다.

이 작품은 지난해 4월 방송된 KBS 1TV ‘KBS스페셜-수단의 슈바이처’를 영화로 재편집한 것이다. 2001년부터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 마을 톤즈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지난해 1월 14일 대장암으로 별세한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다뤘다. 지난 1월 14일은 그가 선종한지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그의 모습을 보고자 영화관을 찾고 있다.

본인 역시 이번주 《울지마 톤즈》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진정 나눔과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태석신부의  삶을 보면서 나도 몰래 두 눈가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숙연해지게 되었다. 정말 아름다운 휴먼 다큐영화이다. 자녀를 둔 부모라면 아이들과 함깨 손을 잡고 이 영화를 꼭 한번 보여줄 것을 권하고 싶다.


 ■ 영화 줄거리 ■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나라인 수단은 1956년 독립 직후부터 집권층인 소수의 아랍계와 피지배층인 다수의 원주민 사이의 끝없는 내전으로 모든 것이 황폐해져 있는 상태다. 80년대 남부에서 석유가 발견된 이후 이를 차지하기 위해 내전은 더 격화되었다. 특히 반군이 점령하고 있는 남부 수단은 절망의 황무지라 불리 울 만큼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 어린 소년들은 소년병이란 명목하에 군대에서 착취당하고 있으며, 느닷없이 시작되는 전쟁의 불안감과 더욱 심해지는 폭력성으로 인해 국민들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또한 악성 말라리아와 콜레라등의 전염병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어가고 있다. 강한 햇빛과 습기 많은 우기를 가진 자연환경과 질 낮은 위생 상태, 기본적인 먹거리의 부족 등으로 인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빠르게 퍼진 전염병은 전쟁 만큼이나 톤즈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다. 2001년 로마 교황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남부 수단을 자원해 부임한 이태석 신부. 그는 인제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 생활까지 마친 의사였으나, 세상의 가장 가난한 곳에서 의술을 펼치고 싶다는 어린시절의 꿈을 포기할 수 없어 뒤늦게 신학대에 진학한다.

의사로서의 평탄한 삶을 포기하고 사제의 길을 택한 이태석 신부는 아프리카의 가장 척박한 땅, 톤즈로 향했다. ‘내가 많은 것이 부족하지만 무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라고 그는 이야기 했지만 실로 그가 톤즈에서 일궈낸 성과는 대단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운 이태석 신부는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아프리카의 가장 가난한 땅 톤즈로 향하게 된 것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삶이 독립된 혼자만의 삶이 아닌 톤즈 사람들의 삶이기도 하다는 것을 주님의 거대한 사랑 안에서 실감하며, 내전과 전염병으로 병든 톤즈에 병원과 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병원이 생겼다는 소문을 들은 톤즈 사람들은 며칠 밤을 새며 걸어와 치료를 받았고, 그런 환자들을 돌려 보낼 수 없었던 신부님은 잠을 줄여가면서 환자를 맞았다. 하루 종일 쉬지도 않고 치료를 하는 신부님의 투혼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병원은 나날이 많은 환자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이태석 신부는 병원까지 오지 못하는 환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높은 온도에 약한 백신을 아이스박스에 넣어가 직접 환자를 찾아가 접종을 해주었다. 백신을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한 냉장고를 사용하기 위해 전기가 없는 톤즈의 건물 지붕에 태양열 집열기를 설치하여 전기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환자들의 아픔을 좀 더 잘 듣기 위해 그들의 말인 딩카어도 열심히 배웠다. 모든 것을 혼자서 꾸려가야 했던 이태석 신부의 진료는 그렇게 밤을 새워가며 계속되었다. 병과 싸울 힘조차 없었던 사람들이 그의 사랑과 노력으로 인해 소중한 생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병원이 자리를 잡아가자 이태석 신부는 톤즈에서 이루고 싶은 또 하나의 꿈을 펼쳐놓기 시작한다. 소년병으로 끌려가는 아이들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황 속에서 할 일이 없는 아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학교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고 그로 인해 가난이 대물림 되고 있는 톤즈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꿔보기 위해 그는 예수님의 사랑이 깃든 학교를 만들기로 한다. 병원과 마찬가지로 톤즈 사람들과 함께 만든 학교는 고등학교 과정까지 한 교정에 있는 톤즈의 유일한 학교로 완성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직접 수학과 음악을 가르쳤고, 케냐에서 교사 자격증이 있는 교사들을 선발해 데려와 학생들을 가르쳤다. 톤즈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12년 과정)는 남부 수단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교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보통 다른 학교들은 오전에 간단한 수업을 하고 선생님이 없을 경우 수업을 하지 못하기도 하면서 오후 12시면 모든 과정이 끝나는데 돈보스코 초. 중 고등학교는 항상 선생님들이 수업을 하고 있고, 고등학교의 수업은 3시까지 알찬 수업으로 짜여져 있어 많은 아이들이 오고 싶어하는 학교가 되었다. 수업의 열기 또한 대단하여 고등학교 3학년 수업의 경우 한 교실에서 120명의 학생이 비좁게 모여 앉아 수업을 들었다. 학교 근처에는 기숙사도 만들어서 집이 먼 아이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배려했다. 오랜 전쟁으로 몸과 마음이 부서진 톤즈의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꿈이 담긴 학교에서 드디어 자신들의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고 사랑을 배우게 되었다.

이태석 신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성당에서 상영해준 ‘다미안 신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보고 그와 같은 삶을 살겠노라 다짐했다. ‘다미안 신부’는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살던 하와이 근처 ‘몰로카’ 섬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한센인들을 돌보다가 자신도 한센병에 걸려 48세에 하느님의 품에 안겼다. 이태석 신부는 어린시절의 다짐을 잊지 않고 톤즈의 한센인들의 상처받은 마음과 몸을 어루만졌다. 톤즈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위치한 한센인 마을은 그가 찾기 전까지 초가집에 지하수조차 없던 곳이었다. 그는 그 곳에 벽돌 집을 짓고 지하수를 끌어올린 펌프 시설을 만들었다. 그는 톤즈에서 단 하나뿐인 앰뷸런스를 타고 한센인 마을을 찾았다. 차 소리가 나면 나무막대기를 집고 걷는 손과 다리가 성하지 않은 어른과 아이들이 몰려 나온다. 이태석 신부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고 직접 고름을 짜내고 붕대를 감아주며 발에 깊은 상처를 입은 환자들을 위해 직접 만든 신발을 신겼다. 처음으로 한센인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느낀 그들에게 이태석 신부는 사랑 그 자체였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지금, 그들은 그의 사진을 보자마자 너나 할것 없이 사진에 입을 맞추며 애통한 눈물을 쏟아냈다. 자신들을 환자가 아닌 인간으로 대해준 그에 대한 그들의 그리움은 안타까운 절규 그 자체였다. 그들은 이태석 신부를 ‘영원한 아버지’라고 불렀다.

톤즈에서 내전은 끝났지만 평화는 오지 않았다. 여전히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는 그 곳의 아침은 군대의 구호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전쟁과 가난에 찌든 아이들의 마음이 음악으로 치유될 수 있길 바랬던 이태석 신부는 그가 오래도록 꿈꾸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것은 바로 35인조 브라스 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모든 악기를 자신이 먼저 스스로 배워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악보를 만들고 한국 살레시오에서 보내준 단복을 입혔다. 총 대신 악기를 든 톤즈의 아이들은 곧 남부 수단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브라스 밴드는 정부 행사에도 초청 받았다. 남부 수단 대통령이 개최한 리셉션에서 연주를 선보인 브라스 밴드는 정부 공무원들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아이들은 지금도 새벽이면 모여서 연습을 한다. 이태석 신부가 만들어준 악보를 보고 선배들이 후배를 가르치며 밴드를 꾸려 갔다. 아무런 꿈도 가질 수 없었던 아이들에게 브라스 밴드는 희망의 상징이 되었다. 

온통 톤즈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그의 인생은 한국에 정기휴가를 나와 받은 정기 건강검진에서 말기암진단을 받으면서 끝을 맺게 되었다.  2010년 1월14일 그는 그토록 사랑했던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태석 신부가 없는 2010년의 톤즈는 온통 깊은 슬픔과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다.

 ■ 감동의 영화 ■

영화를 보는 내내 감동의 연속이었다. 진정 나눔과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태석신부의  삶을 보면서 나도 몰래 두 눈가에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숙연해졌다. 끝없는 헌신과 사랑으로 이루어진 열정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동을 느끼게 했다. 

바람직한 선생님, 의사, 성직자, 사회 지도자의 모습을 이 신부에게서 발견하게 된다. 진정 나눔과 사랑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태석 신부의 삶을 보면서 내 자신에 대해 깊은 반성도 해보게 된다. 얼마나 소외받는 사람들을 향해 진정어린 나눔과 사랑을 실천해 왔는지 말이다.

최근 개신교계 대형교회에서 여러 가지 불미스러운 일들로 어수선하다.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이러한 이그러진 모습들을 보면서 사랑과 희생을 몸소 실천한 이태석 신부의 모습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 같다.

 ■ 감동의 메세지 ■

이영화 속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태석 신부의 인터뷰는 지금도 진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신부가 아니어도 의술로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는데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아프리카까지 갔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다.
다만, 내 삶에 영향을 준 아름다운 향기가 있다.

가장 보잘것없는 이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라는 예수님 말씀"

“처음에는 워낙 가난하니까
여러가지 계획을 많이 세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갈수록 같이 있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을 저버리지 않고 함께 있어주고 싶었다.’’

- 이태석 신부 인터뷰 中

 ■  영화 추천평 ■

요새 재미있는 영화. 최첨단 영상기술을 자랑하는 영화는 많다. 하지만 점점 감동을 주는 영화를 찾기는 힘들어 지고 있다. 자라나는 우리아이들에게 보여줄 만한 그런 영화는 더더욱 발견하기 힘들다.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가족끼리 꼭 한번 가서 볼 만한 영화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의 평점은 ★★★★★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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