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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Bach : The Goldberg Variations)과 글렌 굴드(Glenn Gould)

想像 2020. 9. 19.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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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글렌 굴드

 

다섯 살 때 작곡을 시작했고 절대 음감을 가지고 있었던 신동, Glenn Gould

글렌 굴드는 1932년 9월 25일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태어났다.아버지는 음악교사일을 했고, 어머니는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굴드가 세 살 되던 해 그는 악보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소위 절대음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다섯 살 때 그는 작곡을 시작했고, 가족과 친구들을 위한 조그마한 작품을 연주했다. 여섯 살 때에 굴드는 요제프 호프만의 마지막 토론토 연주회에 참가할 수 있었는데 이 연주회는 소년 굴드에게 깊고 중요한 인상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10살이 되던 해에 굴드는 토론토의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음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굴드는 또한 프레데릭 실베스터에게 오르간을, 레오 스미스에게 음악이론을 배웠다. 그는 12살 때인 1944년, 음악원을 수료하고 키바니스 음악 페스티벌의 피아노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1945년에는 로얄 콘서바토리의 독주자 종합시험을 통과하여 완전한 콘서트 피아니스트의 수준에 도달했음을 인정받게 된다. 굴드가 14살 되던 1946년 그는 음악이론 시험에 합격하고 최고 성적으로 졸업장을 수여받았다.

 

10대의 굴드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인물은 아루투르 슈나벨과 로잘린 투렉의 바흐 녹음 그리고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였다. 1946년 그는 로얄 콘서바토리에서 베토벤의 4번 협주곡을 연주하여 독주자로 데뷔한다. 이 연주에 대해서 굴드는 그 자신이 슈나벨의 녹음을 2년이 넘도록 소유하면서 듣고 있었다.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의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랏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굴드는 뉴욕 데뷔 연주를 가졌다. 일부에서는 이 연주회가 성공적이었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입장권 판매는 미미했고 전문가들도 그리 많은 참석을 하지 않았다. 글렌 굴드가 국제적인 스타가 된 것은 바로 전날에 일어난 일 때문이었다. 굴드와 함께 실내악을 연주했던 바이올리니스트 알렉산더 슈나이더는 데이비드 오펜하임의 전화를 받았다. 오펜하임은 컬럼비아 음반사의 녹음부 책임자였고, 새로운 피아니스트를 찾는다며 자문을 구했다. 슈나이더는 “애석하게도 살짝 미치기는 했지만 피아노에서는 사람들의 넋을 빼앗을 만큼 놀라운 연주를 해내는 인물”이라며 글렌 굴드의 공연을 알려주었다. 그 덕분에 오펜하임은 글렌 굴드의 데뷔 연주회에 참석할 수가 있었다.

 

1955년 충격적인 <골드베르크 변주곡> 녹음과 '괴짜 글렌 굴드'

 

글렌 굴드는 뉴욕 연주회 다음날 컬럼비아 음반과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1955년 6월의 어느 한 주 동안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컬럼비아 녹음부와 함께 뉴욕 이스트 30번가에 있는 오래된 교회에서 녹음 했다. 이때에 선보인 굴드의 기괴한 모습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굴드는 외투에 베레모를 쓰고 목도리를 두르고 장갑까지 끼고 나타났다. 그의 ‘장비’는 통상적인 악보 뭉치와 수건 묶음, 큰 생수 두 병, 작은 알약 다섯 병, 그리고 이후 굴드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애용품으로 유명해진 피아노 의자였다.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어서 연주할 때 몸의 각도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었다. 연주에 들어가기 전 굴드는 두 손을 20분간 더운 물에 담그고 자신이 가져온 수건으로 손을 닦아 냈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도취된 상태에서 입을 벌리고 노래를 불렀으며 몸을 앞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다. 컬럼비아의 녹음 기술자들은 굴드의 허밍을 녹음하지 않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 음반은 레코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음반 중의 하나가 되었고 발매 당시에도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오늘날까지 한 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다. 굴드의 연주가 준 충격의 원인은 당시의 분위기에 돌을 던졌기 때문이다. 1950년대 중반은 반 클라이번과 블라디미르 아슈케나지 등의 ‘뛰어난’ 피아니스트들이 리스트, 쇼팽, 라흐마니노프의 통속적이면서도 화려한 선율을 연주하며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때였다. 당시 낭만주의 음악은 대단히 상업화되고 말랑말랑한 레퍼토리로 변질된 상태였다. 청중들에게 ‘바흐’는 낡고 재미없는 음악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굴드는 특유의 생동감으로 바흐의 곡들을 살려 놓았다. 굴드는 농담으로 자신의 연주를 <굴든베르크 변주곡>이라고 불렀다. 그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굴드는 이 곡을 평생에 걸쳐 두 번 녹음했다. 굴드는 예외적으로 이 작품을 1981년 4월과 5월에 다시 녹음했다. 그의 해석은 여전히 화려하고 달콤한 음(音)을 거부한다. 그의 피아노는 명징하게 스타카토로 울려 나온다. 말년의 굴드는 그렇게 소멸하는 음에 집중했다.  

 

"나는 콘서트 보러가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뛰어난 연주자가 연주회보다는 레코드 음반을 선호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콘서트를 비난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청중의 존재로 인해 연주가 왜곡된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많지만 한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레코드형 인간입니다. 나는 콘서트 보러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콘서트를 들으러 갈 때에는 늘 지나치게 긴장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레코드를 듣고 있을 때에는 편안한 상태가 됩니다. 실제로 나는 거의 레코드로만 음악을 듣습니다. 레코드는 음악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긴장과 모든 문제를 의식하지 않는, 프로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레코드가 절대로 완벽하게 콘서트를 대신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는 1964년 4월 10일 LA에서 피아니스트로서 마지막 연주회를 가진 이후 콘서트에 등장하지 않았다.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하나의 ‘역사’로 남겨놓은 굴드는 1982년 10월에 영면했다. 사인은 뇌졸중이었다. 녹음을 하거나 연주를 하는 동안 굴드는 특유의 허밍 소리를 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1년도 녹음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듣고 있노라면 피아노 건반 사이로 흘러나오는 그의 허밍 소리를 접하게 된다. 그것은 또 다른 음의 영역이자 마르지 않는 글렌 굴드의 신화가 퍼져 나가는 소리이다.

 

출처 : 네이버캐스트-오늘의 세계 인물

글 : 이상용/ 저술가,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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