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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enn Gould (글렌 굴드) : 기행으로 점철된 피아니스트

想像 2023. 5. 24.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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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살아있을 때부터 전설로 분류된 사람. 평생 결혼하지 않고 50년의 생애를 보내면서 일생동안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피아니스트.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1964년(32세) "고통일 뿐인 속임수"라며 돌연 모든 콘서트 일정을 취소하고 그후론 단 한 차례도 공개된 장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던 굴드.

 

피아니스트 아닌 피아니스트가 되기 까지의 글렌 굴드

 

1932년 9월 25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출생한 글렌 굴드. 그의 아버지 러셀 허버트는 모피제조공이었고, 또한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였다. 그의 어머니 플로렌스도 한때 직업 연주자를 꿈꾸었을 만큼 뛰어난 피아노 실력을 지닌 아마추어 피아니스트였다. 글렌 굴드의 외가쪽 먼 친척 중 작곡가 에드바르트 그리그가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이야기가 얼만큼 사실일지는 모르겠지만 굴드의 집안이 그만큼 음악과 가까운 집안이란 것이다. 굴드의 회상에 의하면 그의 외할머니는 파데레브스키의 연주를 듣기 위해 그녀가 살던 시골 마을 욱스브리지를 떠나 온타리오까지 장거리 여행을 할만큼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글렌 굴드는 간신히 걸음마를 옮겨놓을 무렵인 3살 때 어머니에게 첫 피아노 렛슨을 받았다. 이후 그가 10살이 될 때까지 어린 굴드에게 피아노를 가르쳐 준 유일한 스승이 바로 그의 어머니였다.

 

천재 음악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소위 '절대음감'이라는 것이 있는데, 글렌 굴드는 5살 때 단순한 곡들을 연주했고, 즉흥적으로 곡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등 뛰어난 천재성을 보였다. 굴드의 같은 반 급우였던 작가 로버트 풀포드 (Robert Fulford)는 9살 무렵 이웃에 살던 굴드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글렌은 위대한 사람이 되기 위해 미친 사람처럼 노력했기 때문에 외로웠다. 그는 음악에 대해 부드럽고도 열정적인 엄청난 사랑을 지니고 있었다. … 그건 절대적이고 완전한 감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군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11살 되던 해 굴드는 어머니 이외의 새로운 스승을 찾아야 했고, 칠레 출신의 피아니스트 알베르토 게레로(Alberto Guerrero)를 만났다. 

 

 이후 게레로는 더 이상 굴드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고 고백하기 까지 9년 동안 굴드를 맡아 지도했다. 굴드는 자신의 스승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음악적 접근은 완전히 상반되는 것이었다. 그는 '가슴으로 느끼는' 인간이었던 데 반해 나는 '머리로 이해하는' 소년이기를 원했다." 굴드의 나이 6살 때 그는 부모를 따라 요제프 호프만의 독주회에 가서 매우 놀라운 경험을 한다. 굴드는 연주회 뒤 내내 거의 무아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연주회 광경은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지만 '음향' 만큼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했다. 만약 우리가 굴드에게 있어 고전적인 의미의 피아니스트보다는 일종의 '음향 연주자'로서의 음악가적 면모를 보게 된다면 그가 지닌 '절대음감'과 더불어 그가 음악을 먼저 '음향'으로 이해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굴드가 처음 무대에 선 것은 1944년 2월 15일 키와니스 페스티벌의 '피아노 트로피 경연대회'에서 일등상을 받는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 굴드는 토론토 왕립 음악학교에 직업 피아니스트와 동등한 자격으로 합격한다. 그는 단순히 연주에만 치중한 것이 아니었던지 1946년에는 음악 이론시험에서도 일등상을 받았다. 어린 굴드에게 유일한 우상이 있었다면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이었다. 굴드는 '슈나벨'의 연주를 듣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할 만한 말을 했다. "슈나벨은 실제로 악기로서의 피아노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에게 피아노는 하나의 목표를 향한 수단이었는데, 이 목표는 베토벤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글렌 굴드는 그 목표를 아마 '바흐'로 삼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음향'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만들어 냈다.

 

 

경이로운 데뷔로부터 경악스런 콘서트 은퇴

 

굴드의 공식적인 첫 번째 리사이틀은 1947년에 스카를라티, 베토벤, 쇼팽 그리고 리스트로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955년 1월 11일 저녁. 글렌 굴드는 미국 뉴욕에서 데뷔 연주회를 가졌다(굴드는 이후 뉴욕을 데뷔타운 'Debutown'이라고 불렀다 한다).  데뷔 연주회를 가진 바로 다음 날 CBS는 글렌 굴드와 녹음계약을 맺었고, 굴드의 첫번째 녹음인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1955년 6월 CBS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 굴드의 악명높은 기행은 이때부터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따스한 뉴욕의 6월, 굴드는 베레모를 쓰고, 두터운 코트에 머플러, 장갑까지 끼고 있었다. 그는 뉴욕의 물은 마실 수 없다며 식수로 사용할 두 개의 물병과 각기 다른 색깔로 구분된 5개의 약병, 그리고 한 무더기의 타올을 챙겨 들었다. 게다가 이후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버린 유명한 의자까지 글렌 굴드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챙겼다. 굴드의 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는 이 의자는 다리가 모두 고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굴드는 이 의자에 앉아 그 특유의 연주자세를 만들어 냈다. 마치 건반 속으로 파고들기라도 할 것처럼 건반을 향해 머리를 깊이 박고, 몸을 전후좌우할 것 없이 비틀어가며 움직이는 그의 연주 모습에 이 의자는 어쩌면 꼭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굴드는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반드시 더운 물에 손을 20분간 담그고 자신이 준비해온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그의 연주를 녹음하던 음향 엔지니어는 아마 세 번 놀랐을 것이다. 한 번은 연주를 시작하기 앞서 여러 준비 작업을 거쳐야 하는 그의 기이한 행동에, 몸을 비비틀며 연주를 시작했을 때 흘러나오는 음악에 놀라고, 그가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도취에 빠져 입으로도 쉴새없이 허밍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녹음이 진행되는 동안 굴드는 계속 몸을 앞으로 뒤로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고, 그 와중에도 입으로는 내내 의미를 알 수 없는 허밍을 계속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음반을 녹음할 때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하면 음악 이외의 잡음을 제거할 수 있을까 고심하는데, 이건 연주자가 바로 건반 위에서 입으로 허밍을 하고 있으니 엔지니어로서는 최악의 연주자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음반을 듣다가 혹시 뭐라고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그 음반이 불량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굴드의 음반에는 크든 작든 이런 허밍들이 들어 있으므로. 

 

  음악이야 물론 실연을 듣는 것이 가장 좋은 음악감상법이겠지만 해외의 명연주자들은 물론 이미 죽어 버린 연주자의 연주를 듣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남긴 음반을 듣는 것이다. 모든 음반이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굴드의 연주를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오디오에도 상당한 투자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된다. 질 좋은 오디오 시스템을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허밍 소리는 그러나 소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글렌 굴드의 가까이에서 연주를 듣는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의 음반을 듣다보면 한 가지 명확해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굴드가 현대적 녹음 시스템의 매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기계들을 놀랄만큼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슈나벨이 베토벤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를 이용했듯이 굴드는 바흐에 다가가는 수단으로 피아노와 녹음을 매우 자유롭게 이용한 흔적들이 보인다. 그의 피아노 소리는 우리가 실제 듣게 되는 피아노 소리와 상당히 다르게 들리는 데 여기에는 굴드 자신이 가벼운 터치를 위해 기울인 피나는 노력과 더불어 굴드가 녹음된 자신의 연주를 들으며 당시 기술로 가능한 음향적 가감처리를 했기 때문이다.

 

 

짜깁기 통조림 음악가인가, 순수한 아름다움의 추구자인가

 

앞서 이야기했듯이 굴드는 1964년 이래 더 이상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하지 않았다. 소위 '립싱크'란 것이 일반화된 오늘날의 대중음악 현장에서도 립싱크를 주로 하는 가수들에 대해 경멸의 눈초리를 보내는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당시 글렌 굴드가 콘서트를 포기하고 음반 녹음에만 치중했다는 사실이 던지는 의미는 결코 적지 않다. 더군다나 당시 굴드는 콘서트 현장에서도 최고의 각광을 받는 피아티니스트였다. 1957년에 글렌 굴드는 냉전이 한창이던 소련에서 2주간의 연주회를 시작으로 처음으로 유럽 순회 연주를 시작했다. 그는 소련에서 연주회를 열었던 최초의 캐나다인이자 북미인이었다. 그의 소련 연주회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그의 연주에 대해 청중은 물론 비평가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는 유럽순회 연주기간동안 <베토벤 3번 협주곡>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했으며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예술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음반에 담긴 음악을 '통조림 음악'이라고 불렀던 세르주 첼리비다케였다면 글렌 굴드를 좋게 평가하기는 어려웠겠지만, 음반 녹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빨리 깨우친 카라얀이 음반 녹음 과정 자체를 하나의 연주로 승화시킨 굴드를 높이 평가한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1960년 굴드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뉴욕필과 함께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했다. 굴드는 1960년의 TV 출연 이전에도 이미 캐나다 TV와 라디오 방송에서는 이미 유명 인물이었고, 정기적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라디오 방송을 즐겨 들었는데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글렌 굴드는 전생애를 통해 확고한 평화주의자였고, 그런 때문인지 제1차 세계대전의 끔찍한 상황을 주제로 한 캐나다 영화 <전쟁>의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1964년 4월 10일 LA에서 마지막 연주회 이후 굴드는 콘서트 연주자로서 자신의 경력을 끝냈다. 파블로 카잘스도 프랑코 총통이 스페인을 지배하는 동안엔 절대로 연주를 다시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 했고,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도 곧잘 콘서트 활동을 중단했지만 글렌 굴드는 이들과는 달랐다. 왜냐하면 굴드는 이후 전혀 연주회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이브 콘서트를 할 때는 마치 보드빌배우(vaudevillian)처럼 내 자신이 초라해진다." 이처럼 글렌 굴드는 청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 어쩌면 굴드는 자신의 직업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지 않았을 지 모른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의 공적인 생활을 모두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욱 여러 방면의 생활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그는 작가, 방송활동, 작곡, 지휘 등 그가 가진 모든 재능을 사용해보고자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때 이상의 활동을 했기 때문이다. 

 

  혹자는 글렌 굴드를 단순히 피아니스트로 부르기 보다는 그를 일종의 '전위예술가'로 구분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나는 그런 주장을 읽고 매우 참신한 주장이며 상당히 옳은 지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글렌 굴드는 연주라는 음악의 재현에 매달렸던 전통적 개념의 피아니스트,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피아노만을 고집한 사람이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생애 동안 콘서트 연주자로 활동한 기간은 넉넉히 잡아주어야 10년 남짓한 기간에 불괴했다(물론 그 10여년 동안 남들보다 더 많은 것들을 성취하긴 했지만).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바흐에는 분명 다른 연주자의 그것과는 다른, 단순히 '파격'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굴드는 녹음 기술을 자신의 예술을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 채택했고, 자신의 연주 중 가장 좋은 부분만을 샘플링하여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내는 행위 자체에 대해 당시 다른 연주자들이 느끼는 거북한 기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아마 기술적인 제약만 없었다면 글렌 굴드는 신서사이저나 컴퓨터를 도입했을 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피아노는 목적을 향해가는 도정에서 채용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글렌 굴드와 바흐 그리고 골드베르크 변주

 

일찌감치 콘서트를 포기한 탓인지 글렌 굴드의 음반 레퍼토리는 상당히 다양하다. 하지만 그 모든 음반들이 글렌 굴드라는 명성에 걸맞는 것들은 아니었다. 평생동안 편식(그는 고기는 물론 야채도 즐겨먹지 않았다. 성인이 된 뒤 그는 거의 크래커와 오렌지 주스 같은 것들로 연명했다고 한다)과 기행으로 일관한 그 답게 좋아하는 작곡가와 곡들도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었다. 그 단적인 예로 그는 쇼팽과 슈베르트를 연주하지 않았고, 심지어 브람스의 경우에도 녹음 직전에야 겨우 연습하여 녹음에 임했다. 더 나아가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작곡가는 오로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였고,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점에서(이 말은 어떻게 연주해야 한다는 명확한 설정이 없다는 점에서) 바흐 이전의 영국 작곡가 윌리엄 버드와 오를란도 기본스를 꼽았다.

 

 글렌 굴드가 한 번 녹음한 곡은 다시 녹음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철칙을 어기고,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1981년 다시 녹음하게 된 것은 1955년과 1981년 사이에 엄청난 기술적 발전이 있었기 때문이며 골드베르크변주곡과 바흐는 바로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골드베르크 변주곡> 음반을 냈을 때만 하더라도 대중의 환호와 달리 일부 비평가들은 "미친 놈의 연주"라고 혹평을 가했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솔직히 내 경우엔 그의 연주가 오히려 정격 연주로까지 들릴 만큼 귀에 익어 버렸기 때문에 도리어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가 밍숭밍숭하니 재미없게 들릴 지경이라는 것을 전제하더라도 확실히 그의 연주는 남달랐다. 


 

 

온갖 기행으로 점철된 글렌 굴드의 일화들

 

글렌굴드에 대해서 아무리 좋은 쪽으로 해석해주려고 해도, 그가 남긴 기행들 모두를 이해하기엔 나의 머리가 너무나 단순하다. 앞서 그가 녹음이나 연주에 임하기 전 생수 두통과 알약병, 몸 전체를 칭칭 감아맬 정도의 옷차림을 하고 몸을 전후좌우로 연신 흔들어가며 정신없이 허밍을 늘어놓는 연주 방식에 대해서는 이미 말한 바 있지만 굴드는 절대로 에어콘이 켜진 식당을 가려 하지 않았고, 타인과의 접촉도 최대한 피했다. 그와의 대화가 필요하다면 전화를 통해야만 했는데 전화 통화 중 상대방이 감기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감기 옮아요."하며 전화를 끊어 버리기도 했다. 게다가 그의 노이로제 증세는 매우 심각해서 이스라엘 항공사의 비행기만을 이용했다. 그가 이스라엘 항공사만 이용했던 까닭은 이 항공사의 비행기 수가 적으니 그만큼 정비에 시간을 더 들이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물론 나중엔 그나마 비행기를 타지도 않았지만. 그의 대인기피증은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해져서 다른 사람과의 악수도 피하고, 손을 내밀어도 "올해는 악수 안하는 해로 정했어요."하며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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