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사티
[Eric Satie, 1866~1925]
사티는 기존 음악계가 쌓아놓은 신조나 미학을 무시하고 자신의 고집대로 살아간 '세기말의 반항아'였다. 그는 낭만주의나 인상주의에 반대하여 감정의 표출을 절제한 채 단순하면서도 기발한 음악들을 써냈다. 괴팍한 아이디어와 신랄한 유머, 그리고 신비주의와 순수에 대한 이념이 그의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만들어냈다. 파리음악원을 마친 후 1884년부터 피아노곡을 중심으로 작곡계에 뛰어든 그는 <오지브>(1886) <사라방드>(1887) <짐노페디>(1888) 등을 통해 단선 성가풍의 투명한 음악들을 선보였다.
1890년에 몽마르트로 이사간 그는 기괴한 옷을 입고 나이트클럽에서 피아노를 치며 생활비를 벌었다. 이 시기부터 드뷔시와 친교를 가졌으며, 또한 신비주의적 비밀결사인 <장미십자교단>의 전속작곡가로 활동하면서 <장미십자교단의 종소리>와 같은 작품을 써냈다. 그는 <지휘자 예수의 예술 메트로폴리탄 교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일한 교인이 된 적도 있다. 1898년 파리를 떠나 아르쾨유로 간 그는 조그만 방에 기거하면서 죽는 날까지 살았다.
항상 아마추어로 취급받는데 대해 불만을 느낀 사티는 1905년엔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하여 알베르트 루셀에게 다시 음악을 배웠으나 그의 음악은 과대망상증, 기벽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1917년에 콕토의 대본과 피카소의 무대장치에 의한 발레 <파라드>의 음악을 맡으면서 그의 가치는 반전되었다. 시대를 초월한 대담한 수법과 혁신적인 사티의 사상은 미래파의 출현을 예고해주었고, 초현실주의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독특한 개성의 천재
20세기 초기 프랑스의 음악계에서 수수께기 같은 인물이 에릭 사티이다. 그는 그 당시 풍미하던 여러 양식에 속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한군데도 끝까지 속해있지 않았던 기인이었다. ‘에릭 사티’하면 그가 붙인 이상한 표제들(엉성한 진짜 전주곡, 바싹마른 태아 등)과 악보상에 연주자들엑 요구한 기이한 주석들(혀끝으로, 잠시 홀로되기, 마음을 열라!)과 극도로 절제도니 간결하고 경제적인 음악작품들도 기억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작품 중에서 나타난 혁신적인 화성과 익살스럽다고만 하기에는 고도로 정화된 시성들은 그를 여느다른 작곡가들과 분면히 부별지어주는 그만이 가진 독특한 개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가의 가까운 친구들조차 완전하게 파악할 수 없었던 에릭 사티. 요즈음 음악도들에게는 이름이나 한번 겨우 들어본 듯한 정도이다. 그의 생애와 작품경향을 통하여 천재가 가진 여러 가지 껍질들을 벗겨내는 작업은 사티에 대한 순수한 매력과 호기심을 발동시키게 한다.
회색 벨벳 양복의 기인
1866년 5월 1일 프랑스 Honfleur라는 소도시에서 프랑스 선박 중개인 알프레드 사티와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티는 다섯 살 때 파리로 이사를 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자 조부모의 손에 맡겨졌고, 다시 조부모의 사망으로 파리로 돌아온 그는 피아니스트이며 아마추어 낭만 작곡가였던 새엄마를 만나게 된다.
그때부터 실상 그의 비공식적인 음악공부가 시작된다. 열세살때엔 파리 콘서바토리에 들어감으로 정식으로 음악공부가 시작되지만, -그의 생활기록부에는 “재능은 있으나 너무나 게으르고 결석이 잦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 있다- 결국 수준에 못미치게 도어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 예를 들자면 피아노 교사는 그에게 “피아노를 그만두고 작곡에 전념하는게 어떻겠느냐”라고 하고, 작곡 교사는 그에게 “작곡 보다는 피아노에 전념해 보라”고 하는 식이었다.
그후 열아홉살 때 마티아스의 피아노 클래스에도 참가했으나, 그도 “곡 하나 배우는데 3개월 걸림, 초견 불가능”이라고 평가했다. 그렇게 맞지 않는 공부를 계속하고자 했던 것은 5년동안 의무로 치루어야 하는 병역 의무를 학생인 경우는 1년으로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33기 보병으로 입대한 군대생활마저도 반 이상은 기관지염으로 병원에서 보내개게 된다. 그후 스물 한 살때는 무척 싫어했던 계모가 있는 집을 나와 몽마르뜨의 카바레에서 가수의 반주를 막데 된 것이 일생동안 그의 주요한 생계 수단이 된다. 이 당시 샤브리에의 영향을 받아 <3개의 사라반드>를 작곡하고, 그 이듬해 <3개의 짐노페디>를 작곡하게 된다.
1889년 파리의 만국박람회는 파리의 모든 음악가들에게 놀라운 충격을 안겨준 사건으로 사티도 여기서 영향을 받아 동양적인 느낌이 가미된 <3개의 그노시엔>을 작곡하게 된다. 그후 신비적 종교·그레고리안 챤트·고딕예술·성자들의 생애에 심취되어 작품으로 표출시키기도 했던 그는 특히 24세 때는 장미십자종단주의의 신비적 비법에 심취되기 시작하여, 그곳의 공식작곡가가 되면서 현학적 계시에 심취하게 된다. 그후 수년 동안 작곡한 곡들은 <장미십자종단 회원의 팔파프>, <영웅적인 천국문의 전주곡> 등으로 신비스러운 사티의 모습을 충실하게 그려준다.
그러던 중 몽마르뜨에서 만난 드뷔시와 알게 되어 25년간이나 지속되는 긴 우정을 나누는데, 그들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관계를 넘어 서로를 깊이 흡수하는 특수한 관계였다. 선천적으로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며 독립적 기질이 강하고, 어린아이 같으면서도 자존심이 강하고,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그의 성격을 그의 음악속에 잘 형성되고 있었다. 1997년도의 몽마르뜨는 변하고 있었다. 전원적이고 시골풍의 느낌은 사라져가고 새로운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1898년 사티는 32세 되던 해 그의 얼마되지 않는 짐을 싸들고 파리 남부의 근교인 Arcueil-Cachan로 이사하게 된다. 이때에 그는 자신의 외형을 바꾸기 시작한다. 그의 길던 머리를 자르고 보헤미안적인 차림새를 벗어버리고, 12개의 똑같은 회색 벨벳 양복을 입은 멋진 신사가 되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서 외형이 말쑥한 신사로 탈바꿈한 그 시기가 사실은 그에게는 생애 중 가장 불행했던 기간으로 여전히 몽마르뜨에서 일을 하기 위해서 하루종일 걸어서 파리로 출근했다가는 이른 아침에 집으로 돌아오는게 15년동안 계속되었다. 이 당시를 반영하는 듯한 음악으로 ‘배 형태에 의한 세 개의 곡’ ‘바싹마른 태아’등으로 대부분이 카바레 선율의 편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는 또같은 회색 벨벳 양복을 언제나 입고 다녔기 때문에 Arcueil에 살던 어린이들은 그를 ‘벨벳 양복의 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의 이 회색 벨벳 양복은 한번 입고 나서는 해질 때까지 계속 입다가 못쓰게 되면 버리고 또 입고하기를 계속, 결국 그중 여섯벌은 입지도 못하고 말았다. 그의 기이한 행적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날 미요가 길거리에서 우산을 옆에 낀 채 비를 맞고 오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우산을 젖어버리기에는 너무 아까와서라고 대답했다고 하는 데서도 나타난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방에서는 수십개의 우산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905년 경인 사티가 40세 되던 해에 그는 자신의 테크닉에 너무나 한계를 느끼게 되어 이미 오래 전에 포기했던 학교로 돌아간다. 스콜라 칸토룸에서 댕디와 루셀의 문하에서 대우법, 푸가, 관현악법 등을 배우고 3년 후, 드디어 학위를 따게 된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성격과 고집은 어쩔 수 없었던지 역시 그 지식들은 그의 강한 개성 속에 흡수되어버린다.
그후 45세가 되던 1911년에 접어들면서 그의 생애는 조금씩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라벨이 그의 <사라방드>를 연주하고, 두달 후 드뷔시가 짐노페디의 2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여 지휘하게 되자, 사티 자신도 크게 놀랄만큼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마침 라벨 음악의 뛰어난 해석자이기도 한, 리카르도 비네스가 사태의 음악으로 독주회를 열게 되자 갑자기 그의 음악을 출판하겠다고 몰려드는 바람에 그는 곧 기묘한 제목들과 괴상한 주석들을 달아놓은 유머러스한 피아노 시리를 발표한다. 이때를 기하여 그의 오래된 작품들도 한꺼번에 빛을 보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후의 사태의 명성을 높인 사람은 장 콕토였다. 문학과 희곡작가인 그는 유명한 연주가를 통해 사티의 작품을 알리는 한편, 자신의 시나리오에 사티의 음악, 피카소의 무대미술, 무용의 디아길러를 동원하여 전위발레 퍼레이드를 만들어 낸다. 이 공연 후, 스캔들에 휘말리게 되어 8일간이나 유치장 신세를 지기도 했으나, 이로써 사티는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런 계기로 사티 주위에 젊은 음악가들의 기수인 ‘Les Nouveaux Jeunes'란 작곡가 그룹이 모이게 되고, 이 요원들이 1920년에는 저널리스트이자 음악학자인 헨리 콜렛에 의해 임의적으로 6인조(Lex Six)로 되는 것이다.
1917년에는 그의 생애 최대 걸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칸타타 소크라테스>를 작곡한다. 이는 플라톤의 「대화」를 번역한 것을 과함하게 줄여서 4명의 소프라노와 작은 오케스트라로 구성된 것으로 음악자체는 너무나 평온하고 단순하다 못해 속은 기분을 줄 정도여서 첫 공연에는 말이 많았으나, 1920년 스트라빈스키가 들어보고 난 후, 프랑스 음악은 비제, 샤브리에와 사티라고 극찬할 정도였으므로 그의 명성은 드디어 절정에 다달랐음이 확인된다. 그 이후엔 그의 양식이 점점 더 다양해져서 미요와 함?가기구음악이라는 독특한 형식과 개념을 가진 음악을 만들어 낸다. 가구음악이란 한마디로 거실에 있는 안락의자와도 같이 연주자 자신의 기분여하에 따라 취할 수도, 말 수도 없는 음악이다. 이러한 경향은 반인상주의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후에 ‘6인조’의 미요와 플랭에게 영향을 주게 되어 감상의 배제, 경제적인 구성, 간결한 조성과 선율 등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나오게 되었다.
만년에는 그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고 술에 취하는 날이 많아지고 점점 사람과 어울리지 못하게 된다. 1925년 6월 1일 간경화증으로 사망하게 되자, 미요와 그의 동생은 Arcueil에 있는 30년 동안 관리인 한번 들여보내지 않았던 그의 방에 들어가서 너무나 텅빈 것을 보고 놀란다. 침대와 의자와 책상, 반쯤 비어 있는 벽장에는 입다 남은 12개의 회색양복이 쌓여 있었고 망가진 피아노 뿐이었다. 그러나 그의 초기 습작 시절부터 모아논 자필악보들과 엄청난 양의 서류들이 불에 타고 있었는데, 놀랜 미요가 이들 중 악보를 끄집어 내었던 일은 음악사에 감사할 만한 일이다.
쉽게 구분되지 않은 장르
한 작곡가가 스타일이 자신을 벗어나기가 여느 사람의 경우 참 힘든데 비해 사티는 천재답게 여러 양식을 종횡무진한 것처럼 보인다. 20대 초반에는 기하학적인 고대선율과 그리스적인 피아노곡들, 20대 후반에는 장미십자가 종단의 곡들로 작곡되었으므로 신비적·종교적이었고, 30대엔 주로 카바레 슭?위주의 편곡들, 40대엔 명성으로 인해 자신감이 생겨 사티 특위의 괴짜이며 유머러스한 피아노 곡을 다산했다. 50대엔 중요한 발레 작품 3개와 칸타타인 <소크라테스>, 성악곡 및 후기피아노 곡 등을 포함하는 다양한 양식을 산출했다.
이중 대표적이 몇 곡만 살펴보면, 초기에 작곡한 3개의 사라방드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9도 병해 진행이 나타나며, 3개의 짐노페디<그노시엔>에서는 또다른 기하학적 세계로 안내한다. 짐노페디란 그 말뜻이 의미하듯이 고대 그리스의 종교 축제에서 젊은이들이 추던 의식적인 춤으로 이를 상상해 볼 때 ‘어느 그리스의 새벽 하늘 아래 소년들이 벌거벗은 채로 아라베스크 풍의 춤을 우아하게 너울대는 모습’이라고 누군가 표현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피아노 곡들이 3개씩 묶여져 있는 것인데, J.S.Bach가 ‘3’이란 숫자에 의미를 두었고, 18세기 작곡가들이 3의 배수인 6, 12, 24등으로 곡을 그룹지었던 것도 이와 비슷한 현상이었다고 보겠다. 어쨌든 3이란 삼위일체설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으며, 그에게 어떤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음엔 틀림없을 것 같다.
스캔들을 일으켰던 <파라드>란 전위발레음악에서는 악보에 적힌 악기구성에 타이프라이터와 시렌이 등장하기도 한다. 칸타타(소크라테스>는 또다른 영역으로 인상주의적 요소가 전혀 없으며, 특이한 것은 곡 중 클라이막스라고 볼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임종시 다른 음악에서 당연히 나왔음직한 극적인 요소 대신 단순한 Plain Song Lineol Ostinato Bass위에 적막하게 진행하는 것이 오히려 너무나 밀도 있게 느껴져 통렬한 기분이 될 정도이다.
후기 피아노 소나타인 <관료적인 소나티나>는 클레멘티의 피아노 양식을 parap hrase한 신고전주의 작품이며, 가장 진지하고 성의를 보인 5개의 녹턴은 고도의 수학적인 수치로 만들어진 중요한 곡이다.
특이한 미학
위에 열거한 작품만으로도 우리는 사티를 어느 한 양식에 묶어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흑자는 그를 음악계의 피카소라고 하여 피카소의 반인상주의 정신과 그의 음악을 같은 맥락으로 보았으며, 그의 <파라드>란 전위발레 음악은 아예 큐비즘이라고 불리울 정도였다. 그의 다양성은 그의 영향을 받은 작곡가들의 분류가 각각 듸뷔시와 라벨 및 미요와 플랭, 나아가서 현대 전위음악 작곡가인 존 케이지에 이르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추종자들이 무엇보다도 찬탄해 마지않던 공통된 요소는 그의 음악에 나타나는 명료함, 절제, 순수함 및 장식이 없는 비수사학적인 특성이었다. 오늘날까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사티는 어쨌든 간에 음악 미학에서도 특이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사티 음악이 주는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 어떤 이의 비유를 들어 이 글을 마치기로 하자. “사티의 음악이 주는 신의 숨같은 맛에 길들여지면 쇼팽의 샴페인이나 브람스의 독한 맥주 맛이 더 이상 성에 안 찰 수도 있다.
The Best Of Erik Sat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