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Faust Symphony, S.108
Franz Liszt, 1811~1886
리스트가 [파우스트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바이마르의 궁정악장으로 재직 중이던 1854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연주에 70분 이상이 소요되는 이 대작을 불과 두 달 남짓한 단기간(8월~10월)에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작품을 위한 스케치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었고, 작품의 소재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반세기 가까이 이어온 터였다.
그 시발은 1830년 12월 4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파리에 살던 리스트는 [환상 교향곡]의 초연을 하루 앞둔 베를리오즈를 방문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베를리오즈로부터 '파우스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 그 직후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의 프랑스어 번역본으로 괴테의 [파우스트]를 처음 접하게 된다.
일찍이 소년 시절부터 경이적인 비르투오소로 각광받으며 속세의 영광과 환희, 모순과 고뇌를 두루 경험해온 청년 리스트는 '파우스트'의 심오한 세계로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인간의 욕망과 인생의 의미, 인간 구원의 문제를 파고든 그 내용은 두고두고 그의 뇌리 한 부분에 자리하게 된다.
일단 1840년대에 리스트는 [파우스트]에 기초한 오페라를 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산발적인 아이디어들과 스케치들만 나왔을 뿐, 그 구상은 구체화되지 못했다. 1849년에는 그가 머물던 바이마르에서 괴테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고, 그 기간에 그는 슈만의 [괴테의 파우스트로부터의 장면들 Szenen aus Goethes "Faust"] 중의 일부를 지휘했다.
또 1850년 여름에는 네르발이 바이마르를 방문하여 두 사람은 '파우스트'에 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리스트는 [파우스트]를 음악화하는 데에는 아직 확신을 갖지 못했다. 무엇보다 파우스트라는 인물의 복잡한 성격을 어떤 식으로 정리하고 표현할 것인가, 그것이 가장 큰 난제였다.
결정적 전기를 제공한 것은 다시 한 번 베를리오즈였다. 1852년 바이마르에서 그가 자작의 [파우스트의 영벌 La Damnation de Faust]을 직접 지휘했던 것이다. 리스트는 다시금 머뭇거렸지만, 결국 그 여파로 파우스트에 관한 '교향곡'을 쓰겠다는 계획을 확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요아힘 라프와 같은 헌신적인 조수들로부터 기술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마침내 [파우스트 교향곡]을 써냈다. 1854년에 작곡이 일단락된 작품은 1857년 9월 5일 바이마르 궁정극장에서 리스트 자신의 지휘로 초연되었는데, 그 사이 마지막에 '신비의 합창' 장면이 덧붙여지는 중요한 변경이 있었다. 또 1880년에는 제2악장에 10마디가 추가되기도 했다. 한편 완성된 작품은 당연히 베를리오즈에게 헌정되었다.
[파우스트 교향곡]은 제목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교향곡'과는 궤를 달리하는 작품이다. 차라리 이 작품은 리스트 자신이 창안했던 '교향시'의 방법론을 교향곡의 구조와 융화시키려 했던 새로운 시도의 산물로 봐야겠다. 리스트는 여기서 교향곡의 고전적 수법인 발전과 확대라는 기법을 사용하지 않았고, 베를리오즈처럼 일정한 줄거리에 따라 사건을 묘사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지도 않았다. 사실상 이 작품은 서로 연관된 주제와 내용을 가진 3개의 교향시를 한 데 묶어놓은 '연작 교향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리스트는 세 악장에 각각 '파우스트', '그레트헨',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각 악장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세 인물을 대상으로 한 '음악적 스케치'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리스트는 이 작품에 '세 인물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달았던 것이다.
제1악장 : 파우스트 Faust
성공한 노학자이자 마법사인 파우스트 박사. 그는 이 세상의 거의 모든 지식을 섭렵했지만, 여전히 진리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그는 자괴감에 빠진 나머지 자살을 기도하지만 실패하고,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경험하기 위해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를 하기에 이른다. 그 후 그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을 빌려 시공을 초월한 여행을 다니고, 젊음을 되찾아 아름다운 여인들과 사랑을 나눈다. 이 악장은 그런 파우스트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리스트는 파우스트의 이미지를 대략 5개의 주제로 나타냈는데, 그 주제들에는 파우스트의 성격뿐 아니라 그의 탐구 대상인 이 세상의 모습도 투영되어 있다.
먼저 곡이 시작되면 느린 템포로 음산하게 흘러나오는 제1주제는 인간 앞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존재하는 이 세상의 비밀을 나타낸다. 비올라와 첼로로 연주되는 이 선율은 한 옥타브 내의 12개 음표를 모두 사용한 것으로서, 쇤베르크보다 70년이나 앞선 리스트의 혁신적인 발상을 보여준다. 이어서 오보에와 클라리넷에 의해서 여리게 제시되는 제2주제는 일명 '동경의 주제'로 불린다. 이것은 마치 파우스트의 가슴 속 보다 깊은 곳을 슬며시 들추어 보이는 듯하다. 이후 템포가 빨라지면 수수께끼에 도전하는 인간의 정열을 나타낸 듯한 충동적인 음악이 강렬하게 펼쳐진 다음 다시 템포가 느려진다. 제3주제는 ‘알레그로 아지타토 에드 아파쇼나토(빠르게, 흥분되고 정열적으로)’라는 지시어에 따라 바이올린 파트로 연주되는데, 통한의 탄식처럼 등장해서 다시금 정열적으로 치달아가는 이 복잡다단한 선율은 파우스트의 끝없는 욕망과 야망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이 선율이 고조에 이른 후 따라붙는 제4주제는 오보에와 클라리넷이 소리 높여 연주하는데, 이것은 마치 파우스트의 욕망과 도전에 따르는 희열과 고뇌를 가리키는 듯하다.
다시 템포가 느려지면 바이올린의 섬세한 움직임이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운데 클라리넷이 제1주제를 암시하고, 이어서 제2주제를 발전적으로 변형시킨 선율(편의상 '주제 2a'로 표시한다)이 클라리넷, 호른, 비올라, 오보에, 플루트 등이 어우러지는 가운데 흘러나온다.
이후 음악은 다시금 질주하며 또 한 번의 격렬한 고조에 도달했다가, 다시금 템포의 변화를 거쳐 제5주제에 도달한다. 호른과 트럼펫의 장쾌한 팡파르에 실린 이 선율은 파우스트의 잠정적 성취 혹은 결연한 의지를 나타내는 듯하다.
이상으로 느슨한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는 이 첫 악장에 등장하는 5개의 주제를 살펴보았다(여기까지 연주시간 대략 10분 전후). 이 주제들은 이후 발전부와 재현부를 거치는 동안 복잡하게 뒤얽히면서 파우스트의 이미지를 심화시켜 간다. 그 험난한 여정의 지향점은 역시 제5주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작 악장의 마무리는 제2주제가 장식한다. 그리고 이 제2주제의 변용인 '주제 2a'는 마지막 악장의 합창 엔딩에서 다시 한 번 변용되어 나타난다(주제 2b).
이 악장은 절대 호락호락한 악장이 아니다. 오히려 그 흐름을 파악하고 그 요소들을 음미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난해한 음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다루어지는 주제가 많은 만큼 전곡 가운데 가장 장대하고 복잡해서 연주시간도 짧게는 25분에서 길게는 30분까지 걸린다. 그런데 이러한 복잡성과 난해함은 리스트가 이 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어려움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고군분투의 과정을 고스란히 투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울러 그가 여기서 그리고 있는 '파우스트'의 모습을 다름 아닌 리스트 자신의 모습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피아노의 파가니니'가 되기 위해서 피아노 연주와 그 음악의 모든 것을 탐구하고 섭렵했으며, 나아가 '교향시'를 창안할 정도로 다른 장르에서도 음악가로서 파우스트적인 관심과 노력을 경주했던 '미래음악'의 개척자! 물론 그 모습은 19세기 예술가들의 한 전형이기도 했다.
제2악장 : 그레트헨 Gretchen
간주곡 풍의 느린 악장으로, 앞선 악장에 비해 한결 듣기 편하고 아름답다. 이 악장의 주인공은 파우스트의 연인인 그레트헨이다. 그녀는 멋진 청년으로 변신한 파우스트에게 반해 사랑을 나누고 그의 아이까지 가졌지만, 그를 만나기 위해서 지은 죄 때문에 정신착란을 일으키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결국 그녀의 진정한 사랑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된다.
전체는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제1부에서는 순결한 처녀 그레트헨의 모습이 그려진다. 처음에 클라리넷의 도움을 받은 플루트가 청초한 분위기를 자아내면, 가녀린 오보에 선율이 그녀의 모습을 수줍게 드러낸다. 비올라의 부드러운 장식음들이 그녀의 순수한 이미지를 한층 부각시킨다. 계속해서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이 머뭇거리며 대화를 이어가는 부분은 다분히 상투적이지만 사랑스러운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그녀가 꽃잎을 하나씩 뜯으며 이렇게 되뇌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해, 사랑하지 않아, ……"
제2부는 파우스트와 그레트헨의 '사랑의 2중창'이다. 제1악장의 제3주제가 등장하여 그레트헨의 선율과 어우러지며 감미로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그것이 뜨거운 열정으로 번져가는 낭만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반면에 제3부는 파우스트에게 버림받은 그레트헨의 가련한 운명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 감미롭고 애틋한 악장의 마무리는 제1악장의 '주제 2a'가 장식한다.
제3악장 : 메피스토펠레스와 종결 합창 Mephistopheles And Final Chorus
'부정하는 정령'인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그린 악장으로, 성격상 스케르초 악장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에 등장하는 주제들은 제1악장에 나왔던 주제들을 기묘하고 익살맞게 변형시킨 것들이다. 즉, 여기에 그려진 메피스토펠레스의 모습은 곧 그의 술수에 휘말려 타락해버린 파우스트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혹은 악마는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보다는 인간을 조종하고 조롱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한다고 할까. 이 악장은 그런 악마의 음흉한 표정과 신랄한 풍자, 난잡한 춤사위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악마적인 곡을 쓰는 과정에서 리스트는 극단적인 반음계를 사용하여 음악을 무조성 직전까지 밀어붙였다. 아울러 메피스토펠레스 역시 리스트의 또 다른 자화상이기도 하다. 그의 '악마적인' 피아노곡들이나 '사제복을 입은 메피스토'라는 그의 별명을 떠올려 보라. 이런 이유로 이 악장은 전곡 가운데 가장 주목받아왔다.
한편 이 악장은 원래 앞선 악장에 나왔던 그레트헨의 주제가 다시 나타나 궁극적으로 메피스토펠레스를 물리치고 나면, 합창 없이 10마디의 코다로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리스트는 나중에 계획을 변경하여 합창과 테너 독창이 노래하는 경건한 엔딩을 덧붙였는데, 그 가사는 괴테의 [파우스트] 대단원을 장식하는 '신비의 합창' 대목에서 가져왔다. 그 마지막 구절에서 앞서 언급한 '주제 2b'가 반복해서 새겨지는 부분은 '끊임없이 열망하고 노력하는 자는 구원받을 수 있다'는 [파우스트]의 메시지를 상기시켜준다.
Alles Vergangliche / ist nur ein Gleichnis;
das Unzulangliche, / hier wird's Ereignis;
das Unbeschreibliche, / hier ist's getan;
das Ewig-Weibliche / zieht uns hinan.
일체의 무상한 것은 한낱 비유일 따름이다.
완전치 못한 일들도, 여기서는 실제 사건이 된다.
형언할 수 없는 것들도, 여기에서는 이루어진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 올리도다.
이처럼 피날레에 합창이 등장하는 점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외형적인 유사성은 지적할 수 있을지언정, 내용적인 면에서는 그와는 사뭇 다른 이상을 추구한 작품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 이상은 괴테가 제시하고 베토벤에서 말러에 이르는 '낭만파 작곡가'들이 끝없이 음미하고 갈망했던 화두이기도 했다.
발췌 : [네이버 지식백과] 리스트, 파우스트 교향곡 (클래식 명곡 명연주, 황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