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작곡가·바이올리니스트. 베네치아 출생. 산 마르코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었던 아버지에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703년에 사제가 되었으나 지병 때문에 미사를 진행할 수 없었으므로 베네치아에 있는 고아원 겸 음악학교인 피에타보육원의 바이올린 교사가 되었다.
피에타와의 관계는 단속적이었으나 죽기 전인 40년까지 계속되었으며, 당시 유럽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그곳의 여성오케스트라를 위해 많은 협주곡과 실내악곡을 작곡하여 상연하였다. 이 작품들 가운데 오늘날 알려져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은 《트리오소나타집 작품1(1705)》이며 그 뒤 《바이올린소나타집 작품2(1709)》, 출세작이 되었던 협주곡집 《조화의 영감 작품3(1711)》을 비롯하여 1713년까지 기악곡만 작곡하였다.
13년 4월 피에타의 악장이 퇴직함에 따라 종교음악의 작곡도 시작하였는데, 이때 유명한 《글로리아》을 비롯하여 미사곡·시편·모테트 등이 탄생되었다. 오라토리오 《적장 홀로페네스에게 승리하고 돌아오는 유디트》는 14년에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다. 1710년대에 그는 오페라 작곡을 시작하였는데, 13년에 초연된 《별궁의 오토대제》로 명성을 얻어 산탄젤로극장의 작곡가 겸 흥행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14년 사육제(겨울) 시즌은 그의 오페라 《광기를 가장한 오라토리오》로 개막되었으며, 17년까지 다시 2편의 오페라가 상연되었다. 1716∼17년에는 모이제극장을 위해 3편의 오페라를 작곡하였으며, 18년 이후 그의 활동은 각지로 넓어져갔다. 그해 4월에 만토바에서 오페라 《이집트전장의 아르미다>를 상연한 것을 시초로, 20년까지는 만토바에서 오페라를 상연하였고 그뒤에는 로마에서 활동하였다.
23년과 24년의 사육제에서 《테르모돈강의 헤라클레스(1723)》를 비롯하여 3편의 오페라가 로마에서 상연되었다. 알토가수 안나 지로와의 관계도 이 무렵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24∼47년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오페라가수였는데, 비발디는 사제의 신분으로 그녀와 그 자매인 파울리네를 늘 곁에 두었으므로 지탄을 받았다.
1726∼28년 비발디는 다시 베네치아의 산탄젤로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기악곡도 많이 출판하였다. 1725년에는 《사계 (四季)》를 포함한 협주곡집 《화성법과 인벤션의 시도 작품 8》이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되었고, 27년에는 협주곡집 《라체트라 작품 9》를 출판하여 황제 카를 6세에게 헌정하였으며, 28년 무렵에는 《바다의 태풍》을 포함하는 《플루트협주곡집 작품10》, 29년에는 《협주곡집 작품11·12》가 출판되었다.
29∼33년에 비발디는 프라하를 비롯하여 각지로 여행하며 오페라상연을 하였는데, 33∼35년에는 산탄젤로극장과 산살루트의 그리마니극장을 위해서도 몇 곡의 오페라를 썼다. 베네치아에서의 오페라 활동은 이 무렵이 마지막이었고, 그 뒤에는 베로나·안코나·레조·페라라에서 크게 흥행하였다.
38년에는 암스테르담의 왕립극장 백년제의 음악감독을 맡는 등 명예와 성공을 얻은 반면에 성직자답지 않은 생활을 한다는 이유로 페라라에서는 입국을 거부당하는 사건도 있었고, 베네치아에서의 평판도 떨어졌기 때문인지 40년 갑자기 고향을 떠나 다음해 7월 여행지 빈에서 객사하였다. 약 770곡의 작품 가운데 오페라는 46곡, 소나타가 약 90곡이며, 그의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500여곡의 협주곡이 있다.
리토르넬로형식을 주된 구성 원리로 하는 협주곡 편성의 대부분(약 350곡)은 독주협주곡이며, 그 가운데 약 230곡은 바이올린협주곡이다. 약 60곡 되는 현악을 위한 협주곡은 오페라의 서곡에 가깝고 전고전파(前古典派) 교향곡의 선구적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J.S. 바흐를 비롯한 당시의 많은 작곡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