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음악/파가니니·사라사테·크라이슬러

크라이슬러 : 사랑의 기쁨 (Liebesfreud) [Itzhak Perlman, 정경화, Joshua Bell]

想像 2020. 11. 13.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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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tz Kreisler,1875~1962

Liebesfreud


크라이슬러는 탁월한 기교와 서정미가 풍부한 연주로 사람들을 깊게 감동 시켰는데 <사랑의 기쁨>, <사랑의 슬픔>, <비엔나 기상곡>, <크라이슬러의 자장가>등 많은 바이올린 소품들을 작곡해서 자신의 연주곡목을 풍부히 했다. 이 중 <사랑의 기쁨>은 <사랑의 슬픔>과 한 쌍을 이루는 유명한 곡인데 두곡은  형식은 같으나 느낌이 다르므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20세기에 활동했던 뭇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외젠느 이자이와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자주 언급했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숭고한 예술성과 대중적인 인지도를 겸비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왕’이었다. 짧고 하얀 고수머리와 덥수룩한 콧수염의 사진으로 흔히 기억되는 크라이슬러는, 그 특유의 19세기적인 향취를 불러일으키는 달콤한 음색과 귀족적인 스타일을 통해 당대의 다양한 청중들은 물론이려니와 지금까지도 한결 같은 격찬을 받아왔다.

 

Fritz Kreisler (1875~1962)

 

20세기에 활동했던 뭇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외젠느 이자이와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자주 언급했던 프리츠 크라이슬러는 숭고한 예술성과 대중적인 인지도를 겸비한,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왕’이었다. 짧고 하얀 고수머리와 덥수룩한 콧수염의 사진으로 흔히 기억되는 크라이슬러는, 그 특유의 19세기적인 향취를 불러일으키는 달콤한 음색과 귀족적인 스타일을 통해 당대의 다양한 청중들은 물론이려니와 지금까지도 한결 같은 격찬을 받아왔다.

 

오스트리아의 영화로움이 깃든 크라이슬러의 연주

 

1875년 2월 2일 비엔나에서 태어난 크라이슬러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빼어난 재능을 보였다. 내과 의사의 아들로서 젊은 크라이슬러는 아르투르 슈나벨과 지그프리트 프로이드와 같은 이웃을 절친한 친구로 둔 훌륭한 환경 아래에서 성장했다. 7세에 그는 비엔나 콘서바토리에서 당대 오스트리아 최고의 음악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존경받던 요제프 헬메스베르거 Jr.(1855-1907)의 클래스에서 수업을 받을 수 있었고, 3년 뒤 졸업과 동시에 파리로 건너가 콘서바토리에서 벨기에 출신의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인 람베르 마사르(1811-1892)를 사사했다. 마사르는 크라이슬러의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저는 지금까지 비에니아프스키를 비롯한 많은 학생들을 가르쳐왔지만, 이 어린 크라이슬러야말로 그들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결국 크라이슬러는 불과 12세의 나이로 파리 콘서바토리에서 1등상을 받게 되었다.   

 

파리 콘서바토리를 13세의 나이로 졸업하게 된 크라이슬러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연주회를 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리스트의 제자인 모리츠 로젠탈과 팀을 이루어 50여회의 연주회를 열었는데, 그가 연주한 다음 등장하여 회당 50달러를 받았다. 크라이슬러의 첫 미국 데뷔 리사이틀은 1888년 11월 9일 보스턴에서 이루어졌고, 그 다음 날 밤에는 뉴욕의 스타인웨이 홀에서 멘델스존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이날의 평가는 대단히 호의적이었지만, 이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를 단숨에 거장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

 

6개월 정도의 연주 여행을 마치고 크라이슬러는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와 김나지움에 입학하여 정규 교과 과정을 이수했다. 이 무렵 그는 삶의 전반적인 지식과 다양한 예술을 접하게 되었는데, 특히 고전 그리스와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언어를 습득했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그는 비엔나 대학에 의과생으로 입학했다. 이렇듯 폭넓은 교육을 받은 크라이슬러는 곧바로 폭발적인 예술적 에너지를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작곡가인 브람스, 후고 볼프, 오페레타 작곡가 리하르트 호이베르거, 작가인 후고 폰 호프만슈탈과 아르투르 슈니츨러 등과 같은 여러 분야의 인사들과 교류를 맺으며 비엔나 서클의 일원이 되었다. 

 

크라이슬러는 2년 뒤 의대 교육을 포기하고 다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려고 마음먹었지만, 1895년 육군에 징집되었다. 그는 신동 출신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당시 비엔나에는 브로니슬라프 후베르만이나 얀 쿠벨릭과 같은 거장급 바이올리니스트들이 이미 점령하고 있었다. 더 나쁜 상황으로서 제대 후 그는 비엔나 궁정 오페라 오케스트라(지금의 비엔나 필하모닉) 단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오디션에서 떨어졌다. 악장이자 말러의 처남인 아르놀트 로제(1863~1946)에 의해 거부되었는데, 비브라토를 억제하고 깔끔한 사운드를 추구하던 로제의 관점에 있어서 크라이슬러의 비브라토 많은 스타일은 오케스트라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전화위복이라고 했던가, 그는 자신의 연주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더욱 연습을 한 결과 한스 리히터의 초청으로 비엔나 필하모닉과 협연을 하게 되었고, 1899년 12월 1일에는 아르투르 니키쉬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협연하기에 이른다. 이 베를린 데뷔 무대에 청중으로 앉아있던 이자이는 특유의 커다란 제스춰를 섞으며 크라이슬러를 격찬하며 이 젊은 연주자의 승리를 선전했다. 

 

유럽 전역에서 연주회 요청이 쇄도한 크라이슬러는 1900년 12월 7일에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카네기 홀에서 뉴욕 필하모닉과 데뷔 무대를 가졌고, 피아니스트 요제프 호프만과 첼리스트 장 제라르디와 함께 트리오를 결성하여 앙상블리스트로도 활동했다. 이제 신구대륙 모두에서 유명인사로 등극하게 된 크라이슬러는 테너의 엔리코 카루소, 피아노의 이그나츠 얀 파데레프스키, 첼로의 파블로 카잘스와 더불어 바이올린을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 해롤드 바우어, 페루치오 부조니, 칼 프리드베르그, 레오폴드 고도프스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요제프 호프만, 고향친구의 아르투르 슈나벨 등등과 연주를 함꼐 했다. 한편 말러가 이끄는 뉴욕 필하모닉과 생상스와 브루흐 협주곡을 연주했고, 현대의 많은 새로운 협주곡들 또한 앞장 서서 연주했다. 특히 1910년 11월 10일 런던에서 가진 엘가의 바이올린 협주곡 초연을 성공적으로 이끈 이후, 그에게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왕’이라는 명예로운 별명이 붙여진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으로서 나치가 기승을 부릴 당시인 1938년, 1차대전 이후 줄곳 베를린에서 살았던 크라이슬러는 파리로 옮긴 뒤 시민권을 획득했고, 1940년에는 나치에 협력한 비시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는 미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얻은 이후 1947년 11월 1일 카네기 홀에서 마지막 리사이틀을 열 때까지, 그는 다른 현대적인 젊은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등장하고 사라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여전히 최고의 인기와 명성을 누리면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1962년 1월 29일 아름다운 바이올린 향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19세기 바이올린 전통의 마지막 거장은 우드런 공동묘지에 안장되어 비로소 그 큰 눈을 감게 되었다.  

 

연주와 작곡 모두에서 존경받은 20세기의 거장

 

1910년부터 그는 빅터 레코드에서 레코딩을 남기기 시작하며 본격적으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경력을 쌓아나가기 시작했지만,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인해 그는 오스트리아 육군에 징집되어 러시아 전선으로 향했다. 오스트리아군으로 활동한 그에게 많은 반대자들이 생겨났지만, 전후 크라이슬러는 여전히 높은 명성과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1919년 10월 카네기 홀에서 승리에 찬 복귀 리사이틀을 연 이후 1921년에는 런던, 1924년에는 파리에서 연주회를 열며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1923년에는 극동 지방을 연주여행하며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서울을 방문하여 연주회를 갖기도 했다.

 

1920~30년대 그는 베를린과 런던을 중심으로 HMV에서 중요한 레코딩을 남겼다. 특히 20년대 중반에는 레오 블레흐가 이끄는 베를린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와 함께 베토벤, 멘델스존,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고, 30년대 중반에는 영국에서 모차르트, 멘델스죤, 베토벤, 브람스, 브루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녹음했다. 더군다나 한편 전속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루프와 함께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을 녹음하여 이 작품을 전곡 녹음한 역사상 최초의 음악가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로서 이들 레파토리를 모두 녹음할 수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는 크라이슬러가 유일했던 만큼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빅터에서는 1910년 이후 1944년까지 자신이 작곡한 소품 위주로 녹음을 지속적으로 남겨 비교적 많은 양의 레코딩을 남길 수 있었다. 자신이 편곡한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 외에는 빅터에서는 협주곡 레파토리를 녹음하지 않은 것이 특징인데, 이 가운데 절친한 사이였던 라흐마니노프와 함께 녹음한 그리그와 슈베르트,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과 테너 존 맥코맥과 소프라노 제랄딘 파라와 함께 녹음한 노래집 또한 역사적인 녹음으로서 그 가치가 높다.

 

당시 세계무대에 막 등장한 하이페츠가 불러일으킨 저 가공할 만한 파괴력으로부터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유일한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수많은 녹음을 남긴 동시에 작곡가로서도 대단한 명성을 쌓았다. 

 

코렐리와 비발디, 뒤이어 크로이처, 슈포어, 파가니니, 뷔에탕, 비에니아프스키, 요하임, 사라사테로 이어져내려온 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의 오랜 전통의 가장 마지막 세대로서, 크라이슬러는 자신의 아름다운 연주만큼이나 아름다운 작품들을 작곡했다. 보석과도 같이 반짝이는 바이올린을 위한 소품들은 비록 그의 선배들이 작곡한 것 만큼 비르투오시티를 강조한 것은 아니었지만, 우아함과 매력에 있어서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멜로디에 대한 천부적인 재능과 하모니와 대위법에 대한 날카로운 귀는 그가 비엔나에서 공부할 당시 브루크너와 들리브스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덕분이었다. 

 

주옥 같은 바이올린 소품들

 

크라이슬러가 작곡한 많은 소품들은 현재 바이올리니스트로서는 반드시 연주해야 할 필수 레파토리로 자리잡았다. [사랑의 기쁨]과 [사랑의 슬픔], [아름다운 로즈마린], [비엔나 기상곡], [중국의 북], [고엽] 등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들 작품을 발표할 당시 크라이슬러는 “재발견된” 고전 작품이라고 사람들을 속인 뒤 1935년 뒤늦게 고백을 할 때까지 작곡가로서의 자신을 숨겼다. 뿐만 아니라 그는 두 개의 오페레타도 작곡하여 꽤 높은 인기를 누렸는데, 1차대전 직후에 작곡한 [사과꽃 Apple Blossoms]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엘리자베트 황비를 주제로 하여 1932년 비엔나에서 초연한 [씨시 Sissy]가 그것이다. 그 밖에 그가 작곡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위한 카덴차는 전세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애용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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