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도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에 위치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영남 유학의 뿌리이자 성리학의 성지로 불린다. 조선 중기 대학자 퇴계 이황(1501~1570)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574년(선조 7)에 창건되었으며, 2019년에는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퇴계 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이 돌아가시고 딜레마에 빠졌다. 스승을 모실 사당과 서원을 지어야 하는데 스승이 세운 도산서당을 허물 수도 없고, 다른 곳에 터를 잡자니 스승이 〈도산십이곡〉을 지어 부를 만큼 아낀 곳을 외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도산서당 뒤쪽에 서원 건물을 지어 서당과 서원이 어우러지게 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역락서재 등 앞쪽 건물은 퇴계의 작품이요, 전교당과 동·서광명실, 장판각, 상덕사 등은 제자들이 지었다. 퇴계가 꿈꾼 유교적인 이상향인 안동 도산서원(사적 170호)은 이렇듯 스승과 제자가 시대를 달리하며 완성한 의미 있는 공간이다.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을 흠모하는 제자들이 세웠으나, 그 출발은 퇴계의 도산서당이다. 퇴계는 1501년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나 중종, 인종, 명종, 선조 등 네 임금을 섬겼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관직에 140회 이상 임명됐으나 절반은 고사했는데, 스스로 지은 호 퇴계(退溪) 역시 ‘물러남’이라는 뜻이 있다.
이황은 1557년 도산서당을 열기로 마음먹고, “도산에 안식처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만년에 가장 기쁜 일”이라며 친구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좋아했다. 뒤로 야트막한 산을 두르고,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명종의 부름으로 한양에 머무르느라 서당을 짓는 데 4년 가까이 걸렸으나, 도산서당에는 퇴계의 꼼꼼한 설계와 철학이 담겼다. 도산서당은 방과 마루, 부엌이 모두 단칸이다. 선생의 소박함이 그대로 드러난 대목이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독서하고 수양하며, 저술하고 교육했다. 마루와 방 사이 기둥에 아담하게 걸린 ‘도산서당’ 현판은 퇴계가 썼다.
농운정사는 도산서당을 세운 이듬해에 지은 건물로, 유생이 머무르던 기숙사다. 공부에 열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工) 자형’으로 지었고, 하루 종일 어느 한 곳은 반드시 해가 들도록 설계했다.
도산서당, 농운정사를 지나 계단 위쪽은 도산서원 영역에 해당한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 건물이 대칭을 이룬다. 도서관인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 마주 보고, 유생 기숙사인 박약재와 홍의재가 마주한 형태다. 도산서원의 핵심 건물인 전교당(보물 210호)은 유생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선조가 하사한 ‘도산서원’ 사액 현판이 이곳에 걸렸다. 명필 한석봉의 글씨인데, 당시 선조가 마지막 글자부터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도산서당을 완공한 때는 1561년, 이황이 타계한 해는 1570년, 도산서원을 지은 것은 1574년이다. 정조는 평소 흠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1792년, 어명으로 ‘도산별과’를 실시했다. 한양이 아닌 곳에서 과거를 치른 유일한 경우다. 팔도에서 7228명이 응시했고, 서원 내에 수용할 수 없어 낙동강 변 솔숲에서 과거를 치러 11명을 선발했다. 그때 과거를 본 시사단(경북유형문화재 33호)이 강 건너편에 봉긋 솟은 언덕이다. 안동댐 건설로 시사단이 잠길 것을 우려해 높이 10m 단을 쌓았다. 서원 앞 너른 공터에 고목이 늘어서, 나무 그늘에 앉아 시사단과 낙동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