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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음악/기타작곡가

베르디 : 오페라《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Renee Fleming/Joseph Calleja/Thomas Hampson/Antonio Pappano]


Opera 《La Traviata》
Giuseppe Verdi, 1813∼1901

이탈리아의 국민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최고의 작곡가 주세페 베르디. 선이 굵은 남성적인 작풍과 애국심과 인본주의로 대표되는 뚜렷한 주제의식으로 지금까지도 전세계 수많은 오페라 팬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 거장 베르디는 "리골레토", "아이다", "오텔로" 등 불후의 명작들을 쏟아냈지만, 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라 트라비아타" 만큼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받는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렇듯 오페라 좋아하는 사람치고 "라 트라비아타" 모르는 사람 없다지만,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의 "라 트라비아타"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면이 있다.

Violetta : Renee Fleming
Alfredo : Joseph Calleja
Germont : Thomas Hampson
Bervoix : Monika-Evlin Liv
Annina : Sarah Pring
Baron Douphol : Eddi Wade
Gastone : Haoyin Xue
Director : Richard Eyre
Conductor : Antonio Pappano
Orchestra and Chorus of the Royal Opera House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소프라노로 군림했던 그리스계 미국인 마리아 칼라스는 1950년대 초엽부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인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랬지만 번번히 쓰라린 좌절을 맛보아야 했는데, 그 이유는 라 스칼라 극장의 총감독인 안토니오 기링겔리의 방해공작 때문이었다. 광신적인 국수주의자 기링겔리에게 있어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표작 "라 트라비아타"의 여주인공역을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그리스계 칼라스에게 맡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그는 칼라스의 공연을 저지하기 위해 협박과 회유도 서슴치 않았다. 양측의 지리한 공방 끝에 결국 여론몰이로 기링겔리를 압박한 칼라스가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지휘로 저 유명한 1955년의 공연을 성공리에 끝마치면서 이 길고 긴 싸움은 기링겔리의 패배로 종지부를 찍게된다.

칼라스가 사라진 후 라 스칼라가 다시 "라 트라비아타"의 성공적인 공연을 갖기 까지는 거의 4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는데, 1960년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당시 30대의 신예 소프라노 미렐라 프레니를 비올레타로 전격 캐스팅하여 시도한 "라 트라비아타" 부활 계획은 참담한 실패로 끝난채 카라얀의 캐스팅에 반발한 거물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의 라 스칼라 극장 고소 사건이라는 불미스런 기억만을 남기고 말았다. 아바도의 뒤를 이어 라 스칼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한 리카르도 무티는 취임일성으로 베르디 오페라의 전작품을 새롭게 제작하여 공연함과 동시에 특별히 "라 트라비아타"의 부활을 힘주어 강조했는데, 결국 1992년에 젊은 가수들을 대거 기용한 공연이 청중들의 폭풍과 같은 호응 속에 대성공으로 끝남으로써 1955년 이후 자취를 감추었던 라 스칼라 극장의 "라 트라비아타"는 40여년만에 극적인 생환의 감격을 누렸고 청중들은 진정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부활을 소려높여 외쳤으니, 이처럼 "라 트라비아타"는 단순히 잘 만들어진 낭만주의 오페라일뿐만 아니라 실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국민 오페라'로 불러도 모자람이 없을 듯하다.


뚱뚱한 소프라노 때문에 초연은 대실패로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 발레리는 프랑스 사교계의 여왕이었던 실존인물 마리 뒤플레시스를 모델로 삼은 것이다. 소설 "삼총사"로 유명한 뒤마 페르의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는 작가로 명성을 떨치기 전에 마리 뒤플레시스의 살롱을 몇 번 드나들었는데 그만 그녀의 우아한 자태에 반하여 남몰래 연정을 불태우게 되었다. 후일 뒤마는 이때의 체험을 바탕으로 "동백꽃 여인 (La Dame aux Camelias)"이란 소설을 발표했고, 이 작품은 희곡으로도 각색되어 파리의 연극무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베르디가 이 연극을 보게 된 것은 1852년 2월 파리에서였는데, 당시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한 채 소프라노 주세피나 스트레포니와 불안한 동거생활을 하고 있던 베르디는 자신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두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큰 감명을 받아 이를 오페라로 만들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베르디는 곧 대본을 피아베에게 의뢰했다. 그가 쓴 전작 "리골레토" 가 대호평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 "춘희" 라는 제목은 "라 트라비아타" 로 바뀌었는데, 이 말은 이탈리아어로 "길을 잘못들어선 여인" 이라는 뜻이다. 대본은 1853년 1월에 완성되었다. 그 무렵 바로 "일 트로바토레" 의 초연 연습이 겹쳐서, 그는 그 지도도 해야했다. 날마다 바쁜일정에 쫓긴 나머지 그는 지쳐 있었지만, 피곤한 몸을 채찍질하면서 "라 트라비아타" 의 작곡에 힘을 기울여서, 비교적 짧은 기간안에 일을 끝냈다.

초연은 1853년 3월 6일에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 행해졌는데,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후년에 그토록 전세계 오페라 팬들을 열광시킨 작품답지도 않게 비참한 실패를 맛보았던 것이다. 그 때 베르디의 나이 40세였다. 베르디는 이 작품에 아주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던만큼 충격도 컷다.

실패한 이유는 여러가지 있지만, 첫째 원인은 가수들에게 있었다. 알프레도는 감기에 걸려 목소리가 터지지 않았고, 제르몽역의 바리톤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이 단역이라고해서 연습을 게을리했다. 가장 중요한 비올렛타역의 프리마돈나는 아주 뚱뚱한 여자였기때문에 결핵으로 죽는 역으로서는 적당치 않았다. 분명히 결핵으로 몸이 여위고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비올레타가, 자동차에 치어도 쓰러지지 않을 정도의 여장부형의 여인이었으니 관중들이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육중한 몸매를 이리저리 움직일 때마다 무대는 자욱한 먼지로 가득했고 울어야 할 관객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하니 어떻게 제대로 된 공연이 가능했겠는가. 사실 비올렛타가 죽는 마지막 장면은 울음바다가 되어도 시원찮은데,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비극이 바뀌어서 희극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또 하나 실패의 원인을 들라면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웠던 의상 연출이 꼽힌다. 시대배경이 1840년대였던 까닭에 출연진들 모두가 당대의 의상을 입고 나왔으나 관객들은 이를 낯설어 했다. 자유롭고 분방한 연출정신으로 충만한 요즘 오페라 무대에서야 신사복 정장에 바바리 코트 걸치는 정도는 점잖은 축에 속하고 아예 사이버 룩이니 밀리터리 룩, 스페이스 룩이니해서 파격적인 의상설정이 되려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어쨋든 당시 관객들의 머리 속에는 오페라는 역시 옛날 이야기를 그린 것이란 생각이 공식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 보면 이 오페라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시대적 상황과 그 내용에 있었다고 할 수 있겠다. 시민혁명 이후 그 토대가 견고해지면서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은 학시고가 재산과 교양을 갖추고 새로운 도덕규범을 확립하여 견실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역이 된다. 그러나 이들은 상공업으로 축적한 재산을 정실 자녀에게 상속해 대를 이어가며 부를 늘리려는 목적으로 일부일처제를 신성시한다. 가장에게 처가 여럿 있으면 재산이 이리저리 찟겨져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남자에게는 '밖에서 자유롭게 즐기는 일'을 허락하는 이중윤리가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19세기에는 이런 사회 구조와 세태를 비판하는 리얼리즘 문학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바로 이 오페라의 배경이 된 소설 뒤마의 "동백꽃 여인 (La Dame aux Camelias)"이 대표적이다.

자식의 행복보다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보전하는 일이 훨씬 중요한 부모, 그리고 부르주아 남성사회의 이중적 윤리, 이에 대한 비판은 현대사회에서도 여전히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나 보수적인 시대를 살았던 당시의 관객들은 스스로도 찔리는데가 있던 터라 이런 소재를 오페라로 만드는 데 대해 불같이 화를 내고 배척했다. 특히 파리 사교계의 퇴폐성을 정면으로 공격당했다고 생각한 프랑스인들이 격렬히 반발했다.

베르디는 문제된 소프라노를 교체하고, 시대설정을 1700년대로 옮겨 다시 무대에 올리게 되고, 베르디의 감동적인 음악이 청중들의 가슴 깊은 곳을 울려 이 오페라의 명성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곧 "라 트라비아타"는 전 유럽을 열광시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라 트라비아타" 는 그 극적인 고양이나 통일성, 또 음악의 구성에 있어서 전작들인 "리골레토" 나 "일 트로바토레" 를 크게 앞서지는 못한다고 비평가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연회수나 인기에 있어서 전작을 훨씬 능가하고 있는 까닭은 이 오페라가 관객의 가슴에 직접 호소하는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를 뒷받침하는 감미롭고 감상적인 음악이 이상할만큼 신선미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라 트라비아타" 는 그 보편성있는 테마로서 깊은 공감을 얻고 있는게 사실이다. 그리하여 보다 충실하고 완성된 작품들인 "아이다" 나 "오텔로" 를 앞질러 베르디의 대표작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오페라의 줄거리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사생아였는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가출 소녀였는지 출신이 불분명한 오페라의 주인공 비올레타는, 아내를 해마다 임신시켜 놓고 매일 밤 사교계의 매춘 여성들과 파티를 즐기던 당시의 귀족 및 부르주아 남성들의 재력에 기생해 살아간다.

술과 담배에 절어 건강이 악화된 비올레타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던 부르주아 청년 알프레도는 어느 날 비올레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세상을 알만큼 다 알기 때문에 이 사랑이 실현 불가능함을 직시하고 비올레타는 거절한다. 그러나 결국 정성을 다한 알프레도의 구애로 두 사람은 결혼식도 올리지 않은채 파리 교외에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아버지가 부유한 상인일 뿐 아직 재산을 상속받지 못한 알프레도는 비올레타가 자신의 물건들을 팔아가며 꾸려가는 살림에 얹혀사는 신세가 된다.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것이 풍족하게 갖추어진 환경에서 자라난 알프레도는 자신들이 무슨 돈으로 살고 있는지에 대해 관심도 두지 않다가, 하녀의 넋두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려 돈을 구하러 나선다.

그 사이에 아들을 찾으러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선다. 처음엔 자기 아들이 매춘부를 먹여살리는 줄로만 알고 예의도 차리지 않은 채 비올레타를 공격하지만, 오히려 아들이 경제적으로 신세를 지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진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아들과 헤어져 달라는 것이다. 천사같이 순결한 알프레도의 여동생이 결혼을 해야 하는데 오빠가 매춘부와 살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혼담이 깨지게 생겼으니, '사랑의 결단'을 내려 영원히 사라져 달라는 것이다.

비올레타는 화를 내지만 결국 제르몽의 설득에 무릎을 꿇고 떠난다. 그러나 매춘의 세계로 돌아간 비올레타를 오해하고 증오하는 알프레도는 파티에 나타난 비올레타를 모욕하고 다른 귀족과 결투까지 벌인뒤 먼 곳으로 떠난다.

결국은 진실이 밝혀져 알프레도는 비올레타에게 다시 돌아오고 제르몽도 비올레타를 며느리로 인정하고 받아 들이지만, 병이 깊어진 비올레타는 알프레도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다.

  • 이정복 2012.06.14 16:3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직접 가서 보고 싶어 집니다. 한번도 오페라는 경험 해보지 않아서 이번 미스사이공도 보러 가야지 생각만 했네요.
    직접관람이 아닌 전곡감상시간이 너무 길어서 조금만 들었습니다. 오디오 시설이 아닌 노트북 스피커로 들으니 갑갑하네요. 좋은 음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