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로시니 [Gioachino Rossini, 1792 ~ 1868]

想像 2014. 8. 30.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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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oachino Rossini, 1792 ~ 1868



낭만파 가극의 큰 깃발을 재빨리 이탈리아에서 내건 로시니는, 밝고 기지에 찬 음악에다 아름다운 가락을 종횡으로 구사하여 오늘날에도 크나큰 감흥을 남기고 있다.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 이탈리아의 피사로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도시 도살장의 감독관이자 또 지방극장의 트럼펫 주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굉장히 아름다운 목소리의 소유자였다고 전해진다. 10세 때 양친을 도와서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프리넷티에게 하프시코드를, 안젤로 테세이에게 창법과 화성을 배웠다. 15세 때는 볼냐로에 있는 리세오 음악원의 마티 대위법 교실에 들어가 별도로 첼로를 배웠다. 그리고 조그만 가극이지만 「데메트리오」라는 곡을 작곡했으며, 그리고 이듬 해에는 칸타타로 상패를 받았다.


18세 때의 작품인 1막의 희가극 「라캄비알레 디 마트리모니오(약혼 어음)」는 베네치아에서 상연되어 로시니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이어서 「탄크레디」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이 상연됨에 따라 로시니의 이름은 이탈리아 전국에 퍼지고, 그 가극은 대단한 속도로 보급되어 갔다. 로시니의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20일에 로마에서 상연, 같은 해의 12월 4일에는 「오텔로」가 나폴리에서 상연되었는데, 이들 가극은 순식간에 전국에 퍼져서 마침내는 빈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베토벤은 46세로, 제9교향곡 작곡에 착수하려 하던 시대로서, 그 명성은 빈은 물론 전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빈 사람들이 열광하는 로시니에는 도저히 미치지 못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토벤의 연주회가 로시니의 가극에 압도되었다고 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이었으니, 얼마나 로시니의 음악이 당시의 빈 사교계의 마음을 사로잡았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1823년 로시니는 파리를 거쳐서 런던에 갔으며, 이듬해까지 영국에 머물다가 파리로 돌아갔는데, 런던에서는 17만 5천 프랑의 큰 돈을 벌었다고도 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 극장 총지배인으로 취임했다. 「윌리엄 텔」은 1829년 파리에서 상연했으며, 왕궁과 시민이 통틀어 열광했던 프랑스에서의 성공은 빈에서의 성공 이상의 것이었다고 한다. 「슬픔의 성모(스타바트 마테르)」는 1842년에 완성, 이듬해 1월 7일에 파리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무렵부터 로시니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1855년 파리로 옮기고부터는 차츰 나빠지더니 1868년 11월 13일 파리에서 타계했다. 가극 38개, 칸타타 15개 등 성악곡이 대부분이고, 기악곡은 적다. 그러나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윌리엄 텔 서곡」은 교향곡으로서도 훌륭하다.


[네이버 지식백과] 로시니 [Gioacchino Antonio Rossini] (최신명곡해설 & 클래식명곡해설 - 작곡가편, 2012.5.31, 삼호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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