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베를리오즈 [Louis Hector Berlioz, 1803 ~ 1869]

想像 2009. 8. 10.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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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uis Hector Berlioz, 1803 ~ 1869


베를리오즈는 의사인 아버지와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를 의사로 만들고 싶어하던 아버지의 강요로 의학을 공부하던 그는 해부실에 들어간 순간 즐비하게 놓여 있는 시체를 보고 질겁을 해 도망쳐 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23세 때 어렵게 허락을 받아 파 리 음악원에 입학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그는 어렸을 때 플루트와 기타를 조금 만져 보았을 뿐 악기라고는 전혀 다룰 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는 피아노를 칠 줄 모르는 극소수의 작곡가 중 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베를리오즈의 일생은 투쟁의 연속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우선 작곡가의 길로 들 어서는 과정부터 남달리 순탄치 못했던 그는 파리에서 글루크의 오페라에 매혹 당해 작곡가가 되 기로 결심했으나 부모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한바탕의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20대에는 여배우 해리엇 스미드슨과의 곡절 많은 사랑이 그를 괴롭혔다. 세익스피어의 연극 '햄릿'을 관람 하다 오필리어역을 맡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넋을 잃고만 그는 몽유병자처럼 거리를 헤매는가 하면 파리 교외의 숲속으로 잠적하곤 했다. 그러면 그의 친구인 리스트와 멘델스존, 쇼팽 등은 그가 혹시 자살이라도 하지 않을까 염려하면서 찾아 나서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짝사랑으로 미칠 지경이 된 그는 무대에서 그녀가 상대역 남자의 가슴에 안기기라도 하면 비명을 지르며 극 장 밖으로 뛰쳐나갔고, 이와 같은 사랑의 아픔 속에서 그의 대표작 ≪환상 교향곡≫이 태어났다. 마침 그 무렵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귄다는 소문이 들려 오자 그는 배신감에 몸을 떨며 최종 악 장인 '마녀의 밤연회'에서 그녀를 마녀의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이밖에도 그의 예술을 몰라주던 프랑스 악단의 마찰, 극심한 경제적 궁핍 등 어느것 하나 순조 롭게 해결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음악은 프랑스 대중들을 즐겁게 해주긴 했지만 당시의 음악가 와 비평가들에게는 불쾌감을 주었다고 한다.

맹금류처럼 생긴 용모와 괴팍한 행동으로 끊임없는 이야깃거리를 만든 베를리오즈는 바그너와 함께 낭만파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우뚝 섰을 뿐아니라 '표제 음악'이라는 새로운 관현악곡의 유 형을 창시했다. '근대 오케스트레이션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그만큼 악기를 잘 이해했 고 그 음색과 효과를 잘 이용할 줄 알았다. '관현악기가 그의 손에서 다루어질 때는 갑자기 찬란 하게 빛난다'는 극찬을 듣는 베를리오즈는 후기 낭만파 작곡가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 리고 후대 사람들은 격렬한 열정과 큰 이상을 지녔던 이 천재에게 하늘이 좀 더 긴 수명을 주고 사회가 따뜻한 이해를 주었다면 그의 음악이 좀 더 넓고 다채로웠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베를리오즈는 스미드슨과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했지만 오래못가 이혼했고, 오랫동안 괴로워했 다. 그는 슈베르트나 모차르트 등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운명에 사로잡힌 천재의 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와중에서도 베를리오즈는 각지의 악단을 지휘하는 동시에 수많은 명곡을 썼으며, 음악 평론 을 쓰면서 프랑스 악단에 과감히 도전했다. 그러한 베를리오즈에 대해 파리를 제외한 전 유럽에 서는 진가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얼마후 그는 프랑스 악단의 주목을 모으면서 인정을 받게 되었 지만 아깝게도 그 영광은 그가 타계한 후에나 이루어진 일이었다.

주요작품

◆ 환상교향곡
◆ 교향곡 ≪이탈리아의 헤럴드≫
◆ 극적 교향곡 ≪로미오와 줄리에트≫
◆ ≪로마의 사육제≫ 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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