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브루크너 [Josef Anton Bruckner, 1824~1896]

想像 2009. 6. 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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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크너 [Josef Anton Bruckner, 1824~1896]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스펠덴 출생. 아버지는 학교 교장으로서 오르가니스트였으며 아버지에게서 음악교육을 처음 받았다. 11세 때 본격적으로 대부였던 바이스에게서 음악을 배우고,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37년 성 플로리안수도원 부속학교에서 오르간을 배웠다. 1840년 교사가 될 생각으로 린츠의 교원 양성소에 입학하였으며, 1841년 교원 시험에 합격하여 보조교원으로 있다가 1855년 콩쿠르에 통과하여 1856년부터 13년간 린츠성당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1861년부터 S.제히터에게서 통신교육으로 작곡이론을 배웠으며, 린츠시립오페라극장의 지휘자 O.키츨러 밑에서 음악형식론과 관현악법을 연구하고 1863년 린츠시에서 《탄호이저》가 초연되자 감동을 받고 바그너에 심취, 교향곡 창작을 시작하여 습작으로《교향곡 F 단조》을 작곡하고, 1864년 《교향곡 제 0번》, 1866년 《교향곡 제1번》을 작곡하였다. 



1868년 은사 제히터의 후임으로 빈음악원의 교수가 되어 화성악, 대위법, 오르간연주법을 가르쳤으며, 1875년부터는 빈대학에서도 강의하기도하였다. 빈 진출 당시 44세였으나, 72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28년간을 음악의 도시에서 생활하고 이 기간동안 교향곡 8곡(2번~9번)과 모테트, 대규모 종교극 《테데움》, 최후의 세속적 합창곡 《헬골란트》를 작곡하였다.

 

그는 주기성을 가지고 창작활동과 오르가니스트의 활동을 집중적으로 하였는데 1885년 이후에는 그의 자작을 개정하는 작업을 하였다. 1887년 그의 미완교향곡 《교향곡 제 9번》을 시작하였지만 마(魔)의 10번 교향곡을 넘지를 못하였다. 그는 바그너에 열렬하였던 관계로 바그너파로 분류되어 브람스 주변의 전통파로부터 적대시되기도 하였다. 1891년 빈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자신의 재능을 하느님께 바쳤던 그는 1896년 성 플로리안 수도원 오르간 밑에 영면하였다.


교향곡의 순수한 구축미를 지향한 그의 음악은 베토벤의 9번 교향곡과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발전시켰으며, 리스트나 바그너의 표제성을 중시한 <신독일파>와는 대립적인 것이었다. 오르가니스트로서의 경험에 바탕을 둔 음향효과나 각 선율의 대위법적인 처리, 교향곡에서도 볼 수 있는 경건한 감정표출 등 19세기 후반에 살면서도 그의 예술적 정신은 슈타인이나 성 플로리안의 고딕과 바로크 교회당과도 통하는 깊은 종교성에 뿌리를 박은것이었다.


대표작품에 3개의 미사곡, 9개의 교향곡(미완 교향곡 제외), 교회음악 《주 찬양》 《시편》 《레퀴엠》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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