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정리음악

마르타 아르헤리치 (Martha Argerich,1941 ~ ,Pianist)

想像 2009. 4. 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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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타 아르헤리치는 부친이 외교관이고 1943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피아니스트이다. 그녀는 여류 피아니스트로서는 드물게도 다이내믹과 기교를 완벽히 갖춘 연주자로 평가되고 있다.

열정적인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1941년 6월 5일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처음 빈센초 스카라무차로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기 시작하여, 8살 때 콜론느 극장에서 모짜르트 피아노협주곡 20번과 베토벤 피아노협주곡 1번으로 데뷔했다.1955년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유럽으로 이주한 후, 니키타 마갈로프, 리파티 부인, 프리드리히 굴다, 베네디티 미켈란젤리, 스테판 아쉬케나제 등으로부터 피아노 수업을 받았다.

특히 프리드리히 굴다는 엄격한 스승으로서 그녀를 혹독하게 훈련시켰다. 슈만의 '아베크 변주곡'과 라벨의 '밤의 가스파르'를 불과 5일만에 독파하도록 요구할 정도의 강행군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이 과업을 쉽게 해냈다. 1957년 아르헤리치는 불과 3주 동안에 볼자노의 부조니 콩쿨과 제네바의 국제 피아노 콩쿨에서 우승하여 세계를 놀라게 했다.

1960년부터 레코딩 작업을 시작하는데, 도이취 그라마폰에서 쇼팽, 리스트, 브람스, 라벨, 프로코피에프의 작품을 수록한 앨범을 레코딩하여 한바탕 '아르헤리치 열풍'을 일으켰다.특히 그녀가 연주한 프로코피에프의 '토카타'와 리스트의 '헝가리 랩소디 6번'을 듣고 호로비츠는 두 눈을 깜박거리며 감격스러워 했다. 그러나 1년에 150회 이상의 콘서트와 레코딩 작업으로 잠시 주춤거리기도 했다.아르헤리치는 1965년 바르샤바의 쇼팽 국제 콩쿨에서 우승과 마주르카 특별상을 획득하면서 다시 등장하여,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쌓게 되었다. 당시 심사위원으로 배석했던 위젠 리스트는 그녀의 연주에 대해서 '화산처럼 강렬한 열정의 분출'이라고 극찬했다.
 
1967년 뉴욕, 링컨센터의 연주를 통해 미국에서 데뷔하고, 1968년 지휘자, 샤를르 뒤트와와 결혼했다. 1970년 샤를로 뒤트와 지휘, 마르타 아르헤리치 피아노 연주로 차이코프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을 녹음하여 단번에 베스트셀링 레코드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후에 그녀는 뒤트와와 이혼했다.아르헤리치의 레파토리는 베토벤, 쇼팽, 슈만, 리스트, 드뷔시, 프로코피에프, 라벨, 바르톡 등을 포괄하지만, 그녀는 주로 19, 20세기의 비르투오조 피아노 작품 연주를 통해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그녀 혼자서 연주하는 경우를 만나기가 어렵다. 아르헤리치는 1978년 워싱턴 DC에서 바르톡의 소나타와 아르헨티나의 현대 작곡가 히나스테라의 '아르헨티나 무곡' 세 작품을 공연한 이후 솔로 리사이틀 무대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떠하든지, 그녀는 혼자서 연주하는 것보다 다른 연주자와 함께 하는 것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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